〈 13화 〉성주 리리나
그래도 뭔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난 희망을 품고 한나 누나에게 물었다.
"그니까 앞으로 계획이 뭐야?"
"으음,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좀만 더 생각해볼게.... 헤헤."
씩 웃는 한나 누나. 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정말 즉흥적으로 행동했으리라.
뒤따라 들어온 앨리스와 백합 기사단원은 경악했다.
"도, 도련님....?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그렇게 보지 마. 내가 한 일 아니라고."
그 와중에 슬금슬금 초소를 빠져나가려는 경비병이 보인다. 저렇게 둘 수는 없지.
"잡아!!"
"예?"
"앨리스경, 저기 도망치는 경비병 잡으라고!! 일단 이곳 경비대는 우리가 장악한다!"
"충성!"
평소에 앨리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앨리스는 가문의 가신이었다. 명령을 내리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앨리스를 위시한 세 명의 기사가 경비대 전체를 압박한다. 이래 봬도 홀란트 가문의 최상위 실력자들.
경비대는 별 반항도 못 하고 얻어터졌다.
퍼억- 쿠당탕탕-
"끄허어억!!"
"리, 리리나 성주님께서 아시면 전쟁이....."
"닥쳐라, 도련님의 명이다."
약 5분 후. 이곳에 있던 경비대원 열댓 명은 전원 포박되었다. 순찰 나갔던 대원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괜찮으리라.
앨리스는 일을 마치고 내게 다가왔다. 귓속말로 속삭인다.
"도련님......"
으음, 이 따뜻한 숨결. 기분 좋단 말이지...... 혀도 내밀어서 조금 핥아주면 훨씬.....
한가한 생각을 깨트리는 말이 이어진다.
"가주님께서 아시면 괜찮습니까?"
"하아."
앨리스의 숨결은 여전히 달콤했지만, 아빠의 이름은 그조차도 잊게 만들었다.
'제길, 안 그래도 구제 불능이라고 쫓겨났는데 사고까지 치면......'
다만 한 가지 구명줄은 있었다.
"원래 아버지는 여성주의자들을 싫어하셔. 순전히 능력을 중요시하지. 그건 너도 알잖아."
"맞습니다. 하지만 무역도시 움튼과 사이가 틀어지는 건......."
움튼의 성주와 홀란트 가문 중 누가 강할까? 굳이 따지자면 우리 가문의 손을 들어주는 쪽이 더 많을 거다.
하지만 큰 차이는 아니었다. 적으로 두고도 편안하진 않다는 거다.
'외교 문제로 만들려고 해도, 이미 경비병을 폭행한 마당이지. 끄으음.'
그때, 한나 누나가 앨리스와 나 사이를 슥 갈라놓았다. 그리고 둘의 중간을 차지한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누나가 친 사고를 수습하려고."
"경비병 좀 쥐어팬 거?"
"그 이상이지. 가문의 문제로 커질 수 있다고."
한나 누나는 가볍게 웃었다. 이어서 명쾌하게 말한다.
"이건 응징이야."
"그니까 내가 모욕당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니. 반역을 획책한 거에 대한 응징."
"......?"
설명이 이어진다.
"우리를 습격한 산적, 정체가 뭐였지?"
"블랙 용병이라며."
"그래, 블랙 용병.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놈들이지. 근데 놈들은 대체 의뢰를 어디서 받았을까?"
"용병은 보통 길드에서......"
말하다가 깨달았다.
일반적인 의뢰야 용병 길드에서 주겠지만, 블랙 용병이 다룰만한 의뢰는? 저들은 무슨 경로로 의뢰를 받지?
내 얼굴을본 한나 누나가음침하게 웃는다.
"당연히 뒷거리에 접선책이 있지.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거 말이야. 보통 큰 도시의 뒷거리에 있는 편이고."
"아..... 그래서?"
"이쯤 말하면 척하고 알아야지. 우리가 포획한 노예, 저놈들의 접선책이 움튼에 있을 거란 뜻이야."
누나의 말을 들은 순간, 퍼즐이 맞춰졌다.
순혈여성주의자인 이곳의 성주를, 반역도로 몰아세울퍼즐이.
"그니까 움튼의 뒷거리에서 의뢰를 받았으니, 성주도 개입했을 거다. 이 말이지?"
"증거가 없으니까 그렇게 몰아가긴 어려워. 하지만 진퇴양난으로 만들 순 있지."
"오......"
"첫 번째, 성주가 블랙 용병의 접선책을 알았다면? 사실상 암묵적으로 반역에 동의한 거야."
"몰랐다면?"
"두 번째로, 접선책의 존재를 몰랐으면? 태만이지. 능력부족이나 게으름으로 반역에 협조한 거야."
나는 큭큭 웃었다. 이거면 됐다.
'솔직히 근거는 빈약하지. 하지만 반역이잖아. 역도로 몰 때는 빈약한 근거로도 충분한 법이지.'
일단 움튼 시의 성주가 반역도가 되면, 내 행동은반역도를 응징한 정의로운 행동이 되는 거였다.
아무 문제 될 게 없다.
"좋아, 그러면 일단 제국의 관리부터 만나야겠네?"
"그치. 얼마 전에 관리가 바뀌었다고 하니까 아직 성주랑 친하지도 않을 거야."
"그럼 더 좋고."
귀족의 영지에는 관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무역도시, 중립도시나 직할령에는 관리가 당연히 있었다.
반역을 고하려면 이런 관리를 만나는 게 당연하다.
'그야 관리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 만약 성주가 진짜로 반역을 꾀하는 거라면 거슬리는 관리부터 해치우지 않겠어?'
그런 고로 다음 목적지는 정해졌다.
난 앨리스와 한나 누나를 향해 말했다.
"한밤중에 도시로 몰래 들어가자. 그 경비병들은 적당히 숨겨두고."
"예!!"
"그래야지!"
졸지에 난 열댓 명의 경비병을 납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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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행렬은 꽤 크다.
기사와 사병을 합해 서른가량. 조교시킨 산적이 마흔, 사로잡은 경비병이 열댓 명이니 주목을 안 받을래야 안 받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초소에서 소란도 벌어졌으니, 지금쯤 다른 경비대원 한둘은 다가오고 있을 거다.
그래서 우리가 선택한 방법은 이거였다.
"앨리스, 두 명쯤은 들고 뛸 수 있지?"
"물론입니다. 저희 단원이라면 누구나 가능합니다."
"한나 누나도?"
"당연하지!"
바로 경비병을 들쳐메고 전력 질주하는 것. 은밀히 나갈 수는 없으니까 속도로 승부하는 셈이다.
기사가 한 명당 둘씩, 사병은 둘이서 하나를 들고 뛰면 된다. 노예는 알아서 따라올 테고.
사로잡은 경비병들은 반항을 막기 위해 전부 기절시키고 옷을 갈아입혔다.
준비를 마친 우리는 초소를 부수듯이 나왔다.
콰아앙-
"뛰어!!"
"달려라! 도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는 거다!"
두두두두-. 사람이 달리는 건데 마치 기병의 쇄도하는 소리가 들린다. 귀족가의 전력이란 거다.
달리는 와중에 축복용 스크롤도 찢었다.
촤아아. 아군 전체를 감싸며 근력과 속도가 살짝 증가한다. 전쟁터에 나간다고 받아온 비싼 물건이었다.
꽤 떨어진 곳에서 줄을 서던 사람들이나, 검문하던 경비병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경비병은 당장 우리를막기보단 우리가 뛰쳐나온 초소로 황급히 달려갔다.
"대장니이임!! 무슨 일입니까?“
상황을 파악하려는 모습이다.
'옷을 갈아입힌보람이 있네. 당장 경비대장이 납치당했다고는 생각을 못 하고 있어.'
그러 그럴게, 대체 어느 귀족가의 자식이 경비대장을 납치한단 말인가. 망나니 짓을 하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경비병이 들어갔던 초소가 시끄러워졌다.
땡-땡-
비상을 알리는 경종 소리도 들린다. 이어서 크게 외치는 경비병.
"끼에에에에엑!! 저 미친놈들이 대장님을 납치했다아아아!!!“
”뭐 대장님을? 대체 무슨 놈들이.....“
”귀족가의 습격이다아아아아앗!!!“
"동문과 서문의 경비대도 소집해라!! 비번이라 놀고 있던 놈들도 불러!!“
시끄러워지는 경비대. 초소에 있던 건 열댓 명이라고 해도 실제 인원은 훨씬 많을 게 뻔했다.
'당장 성문도 4개나 있고, 다른 곳에 나가 있던 인원도 있을 거고.'
하지만 추적 능력은 다른 이야기다. 저놈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우리를 따라올수 없으면 그만.
나는 계속 달리면서도 초소를 확인했다. 마침몇몇 경비대원이 말을 타고 나오는 게 보인다.
'열 마리? 저 정도면 당장 끌고 나올 건 전부 나온 거겠어.'
이때를 위해 지시해둔 게 있다. 난 전속 하녀이자, 4위계 마법사. 에델에게 물었다.
"기마병 열 마리는 가뿐하지?"
"제스님."
"응?"
"전 홀란트 가문에서 배운 마법사입니다."
에델이 미리 준비해둔 마법을 펼친다. 그녀의 손에 공기가 한껏 응축되었다가 쭉 날아갔다.
쐐애애액-
바람을 찢는 소리. 이어진 결과는 깔끔했다.
히이이잉- 철푸덕
열 마리의 말은, 깔끔하게 목이 잘려 죽었다.그 결과로 경비병들은 낙마해서 뒹굴었고.
부상병까지 수습하려면 시간이 더 걸릴 거다.
에델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정도는 가뿐하다는 뜻입니다."
"훌륭해."
추적 수단을 저지한 셈. 우린 몸을 돌려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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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나절 후.
우리는 적당한 산속에 숨게 되었다.
올톰 시 경비대의 추격은 '반쯤' 따돌렸다. 당장은 따라붙지 않는다는 소리다.
"아마 곧추적하겠지?"
"그럴 겁니다."
내 말에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저지른 일을듣고 황당해했지만, 이제는 한배를 탄 입장.
그녀도 별수 없이 나를 따랐다.
"해가 슬슬 지는군."
이제 다시 성벽을 넘을 차례다. 올톰 시에 머무르는 황제의 관리를 만나야 하니까.
난 데려갈 인원을 추려 보았다.
'엘리스는 기사단장이니까 당연하고, 한나 누나도 한 실력 하는 편이야. 에델은......'
마법사다. 하지만 몸놀림이 침입할 정도로 뛰어나진 않다는 게 문제였다. 결국 제외되는 셈.
난 둘에게 말했다.
"앨리스경, 한나 누나. 다시 올톰 시로 돌아가자."
"이번엔 관리를 납치하는 겁니까?"
"아니지. 뭘 들었어. 관리한테 성주를 고발하는 거라니까."
내 말에 앨리스는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수긍했다. 가문 간의 전쟁으로 퍼지지 않을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앨리스는 딱딱한 말투로 염려했다.
"도련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만 가는 건....."
"내가 안 가면 관리가 둘을 만나줄까? 고작해야 가신이랑 용병인데?"
백작가의 직계쯤은 되어야 말이 통할 거다. 뭐 몰래 침입하는 꼴이긴 하지만.
여전히 앨리스가 불안을 해소하지 못하자, 나는 그녀에게 은근슬쩍 다가갔다.
"앨리스경."
"예."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침입하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잖아."
"그렇습니다."
"내 마지막이 될까 봐 그러는 건데....."
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경 가슴 한 번만 만지고 죽으면 안 될까?"
"......"
역시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 반쯤 농담이었는데, 분위기가 더 싸해졌다.
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곤 발을 옮겼다.
"긴장이라곤 하나도 없으시군요. 걱정한 제가 잘못입니다."
"어....?"
우리는 약간 어정쩡하게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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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칠 때는 산적들 속도에 맞추느라 좀 느렸지만, 돌아갈 때는 충분히 빨랐다.
셋 중에 달리기가 제일 부족한 건 바로 나.
앨리스는 나를 업고도 한나 누나와 대등하게 달렸다.
타다다닥-. 한나 누나가 앨리스를 힐끗 확인한다. 핸디캡이 있는 상대와 똑같은 게 분한지, 속도를 좀 올렸다.
파아앗-.
"흐읍!!'
하지만 앨리스는 평온했다.
"용병과 기사는 다릅니다. 기사는 주인을 모시기 위한 각종 상황을 가정하지요."
곧바로 따라붙는 앨리스. 그러고는 턱을 살짝 들어 한나 누나를 깔아봤다.
할 수 있으면 더 해보라는 듯.
"이게...... 난 홀란트 가의 핏줄이야!!"
"훌륭한 핏줄에 비해 노력을 덜 한 모양입니다."
눈빛이 충돌하며 불꽃이 일어나려는 순간, 내가 외쳤다.
"잠깐만!! 더 빨라지면 안 돼!!"
'내가 붙잡기 힘드니까'라는 뒷말은 삼켰다. 그래도 대강 알아들었는지 둘은 경쟁을 멈췄다.
"아.... 도련님."
"동생 때문에 참는다."
난 앨리스를 붙잡은 팔에 힘을 더 가했다.
사실 내 손은 이때도 앨리스의 배와 가슴 사이.
즉, 요충지에 위치해 있었다.
'이렇게 위태로운 척하면서 즐기는 거지.'
대놓고 가슴을 만지면 의심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갈비뼈쯤에서 흔들릴 때마다 슬쩍슬쩍 밑가슴을 터치하면?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타닥-
땅을 박찰 때마다 앨리스의 가슴이 살짝 내려온다. 봉대로 꽉 둘러매도 막을 수 없는 관성이었다.
그리고 내 손이 조금 올라가면 서로 맞닿는다.
단단한 붕대 위로 전해지는 물컹한 감각. 내 몬스터는 잔뜩 부풀어 올라 앨리스의 등을 쿡쿡 찔렀다.
'하, 씨발 가문 떠나길 잘했어. 앨리스랑 접촉할 일이 이렇게많아질 줄이야.'
황홀하다. 매 걸음마다 조금씩 다른 부드러움, 몰캉함이 내 손을 자극했다.
조금만 더 올릴까? 그러면 앨리스의 따뜻한 가슴을 더.....
그리 생각하는 순간 두 명이 딱 멈췄다.눈치챘나 싶어 괜히 움츠러드는데, 앨리스가 입을 연다.
"도련님, 내리십시오."
"어? 아, 아니 그거 좀 즐긴 거 가지고 너무 뭐라고....."
"성벽 안 넘으실 겁니까?"
아. 도착했나?
촉감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거대한 성벽조차 눈에 들어오질 않았다. 난 멋쩍게 웃으며 내렸다.
티 나지 않게 손냄새를 킁킁 맡는다.
'가슴 냄새는 안 나네. 옷 위로 만졌으니까 당연한가.'
한나 누나는 성벽을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이거 넘는 건 그렇게 안 어려워.“
"생각보다 높아 보이는데?"
성벽은 은근히 높았다. 대충 10m는 확실히 넘고 13-4m쯤 되는 듯했다. 이 정도면 요새가 아닌 것치고 높은 편이다.
"맞아. 높지. 그래서 경계를 대충 서기도 하고."
"아! 다른 쪽은 더 낮은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한나 누나. 확실히, 나라도 높은 성벽보다는 낮은 쪽을 방비할 거다.
용병으로 10년을 살아서 그런지 잡지식이 확실히 많았다.
한나 누나는 앨리스를 보며 살포시 웃었다.
"뭐, '주인만 지키는 기사' 나리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무엇보다 일신의 무력이 가장 중요한 법입니다. 게다가 이곳의 성주는 방비 상태를 고작용병에게 들키는 우를 범한 거지요."
갑자기 말이 많아지는 앨리스. 자존심은 대단했다.
"흥, 그냥 용병이라니. 나 정도 되니까 아는 거라고."
"그게 무슨, 누나 정보 용병인 것도 아니잖아?"
"아..... 크흠."
한나 누나는 드물게 말을 아꼈다. 아차 싶은 표정이 아주 짧게 스친다.
'누나가 보통 용병이 아닌가? 하기야 A급인 시점에서 일반적이진 않지만......'
아무튼 이곳은 높긴 해도 순찰을 잘 하지 않는 곳. 마음 편히 올라가면 된다는 뜻이다.
우리 셋은부지런히 벽을 타고 올라갔다.
튀어나온 돌을 잡아다가 쭉 끌어당긴다. 근력은 자신 있었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팔만 써도 충분하겠네.'
탁-탁-탁-. 몇 번 몸을 튕기자 어느새 성벽의 중반쯤이었다. 이때까지경비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생각하니까 우리 잡으러 나간 병력도 있겠어. 방비는 더 부실하겠네."
"그럴 겁니다."
작게 대화를 나누며 마지막 돌을 붙잡는다. 그리고 몸을 수축시켜 성벽 위로 올라갔다.
턱-
"이제 어디...... 음?"
나는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성벽 위에는 수많은 창칼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의 무기가 우릴 겨눈다.
경비병수준이 아니라, 제대로 훈련받은 병사. 게다가 기사처럼 보이는 자도 얼핏 있었다.
기사들은 한 여자를 둘러싼 상태였는데, 그 여자는 고고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뭐야, 의자를 들고 다니나? 별 미친.....'
낭비. 한순간의 멋을 위한 말도 안 되는 낭비다.
그리 생각할 때, 여자의 입이 열렸다.
"처음 뵙는군요. 올톰의 성주이자 그레이트우먼 상단의 주인, 리리나입니다."
"......성주? 기다리고 있었나?"
앨리스와 한나 누나는 무기를 빼들고 내 양옆을 철통같이 지켰다. 든든하긴 하다만, 여기서 이길 것 같진 않다.
리리나는 붉은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그럼요. 오늘 홀란트 가문의 패륜아가 내 아이들을 납치했다고 들었으니까요."
"패륜아.....?"
어이없다는 반문에도 리리나는 태연했다.
"여성이란 훌륭한 성별을 두고, 남자로 태어났으니 패륜. 좋은 핏줄을 가지고도 발전이 없으니 패륜. 어머니께 복종하지 않으니 패륜. 삼위일체 아닌가요?"
"이 쿵쾅충 새끼가....."
"쿵쾅? 전 적절한 몸무게를 지녔답니다."
"아무튼 네가 모르는 게 있어."
어떻게 빠져나가지? 머리를 팽팽 굴리던 중이었다.
리리나는 부채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말했다.
"다들 고마워요."
"뭐가....."
"지금 제 포로가 되러 와주신 거잖아요?“
그녀의 웃음은 끝없이 가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