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 〉순혈 여성주의자
"왜지?"
화도 나지 않았다. 그보다 궁금함에 훨씬 앞선다.
어딜 가나 남자를 환영하는 게 당연한데, 남자를 거부한다니.....
경비병은 늘어선 줄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뒤로 빠지며 손짓했다.
"자, 잠시 이쪽으로......"
"흠."
경비병을 따라 초소로 들어간다. 그사이에 다른 경비병들이 검문을 맡았다.
초소 안으로 들어가자 경비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본판은 냉미녀일 것 같은데 묘하게 세월에 찌든 모습이다.
"하아아, 성주님의 지시입니다."
"그건 당연하겠지. 무역도시의 주인이 성주인 걸 누가 모르나."
무역도시나 자유도시 따위로 불리는 곳은 성주가 주인이었다. 돈 많은 평민이 차지한다는 뜻이다.
'뭐 굳이 평민일 필요는 없지. 큰 상단의 주인이 차지하는 게 보통이니까.'
경비병은 더듬거리며 설명을 이었다.
"그, 그게 성주님이 얼마 전에 임신하셨습니다."
"설마......?"
"예. 성안에 양기가 침입하는 건 못 참는다고 남자의 출입을 금하셨습니다. 순혈 여성주의자인편이라서....."
여성주의. 남자가 훨씬 귀한 이 세상에서 일부 여자들이 지지하는 사상이었다.
한 마디로 여자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가졌으니, 당연히 자손도 여자를 원했다. 심하면 귀한 남자가 태어나도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어떻게 명맥을 유지하는지 모르겠어. 그나마 권력자한테는 납작 엎드려서 그런가?'
난 따라 들어온 에델에게 물었다.
"움텔의 성주가 누구였지?"
"몇 년 전에 리리나라는 여자로 바뀌었습니다. 전원 여자로 구성된 상단을 운용하는 여자입니다."
"하, 호위도?"
"예. 그것도 극음지기를 사용하는 호위를 더 쳐준다고 합니다."
난 혀를 쯧 찼다.
극음지기, 음양의 조화를 따르지 않고 음기만 잔뜩 모아 활용하는 심법이다. 당연히음양의 조화보다는 효율이 떨어졌고.
"머리에 똥이 가득 찼군."
우리의 대화에 경비병이 조심스레 끼어든다.
"성안에 양기가 차오르면 혹 남자가 태어날까 봐 노심초사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움텔말고 다른 도시를 이용해주시면......"
"헛소리!! 여기가 괜히 무역도시인가? 주변에 마땅한 요충지가 없지 않나!"
벌컥 화를 내자 경비병은 쩔쩔맸다.
애꿎은 하급자에게 화풀이하고 싶지는 않지만, 녀석의 말이 허황된 건 사실이었다. 움텔까지 오는 데도 한참 걸렸는데, 여기 말고 다른 곳을 가라니.
'대체 며칠을 낭비하라는 거야?'
그럴 수는 없다. 노예 40명은 반드시 여기에서 처리해야 했다.
팔짱을 끼는데, 경비병이 조심스레 제안한다.
"혹시 용건을 알 수 있습니까?"
"노예 처리다. 밖에 40명이나 되는 건 봤겠지?"
"아..... 그거라면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기사도 데려오신 것 같습니다......"
말끝을 흐리는 경비병. 에델도 미세하게 동의하는 듯했다.
"괜히 소란을 만드는 것보다는 그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제스님. 제가 팔고 와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난 단호하게 거절했다.
"안 돼."
".....?"
동시에 의문의 시선을 보내는 경비병과 에델.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예?"
"저놈의 여성주의자들 특징이 뭔지 알아?"
경비병이 우물쭈물 거리는 사이, 난 말을 이었다.
"바로 진짜 권력자한테는 납작 엎드린다는 점이야. 여성주의니 뭐니 해도 비교적 약한세력만 건드리지. 더 강한 쪽한테는 도리어 철저히 기어."
"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했을 거야."
뒤쪽 말은 순전히 내 예상이었다. 저놈들에게 뭔가 흑막이 있을지는 모르는 노릇이다.
아무튼 중요한 부분은 이거였다.
"경비병."
"예, 예!!"
"남자의 출입을 금지한다고 해도, 통과시키는 가문은 있겠지?"
"그것이..... 저기......"
우물쭈물거리는 녀석.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 한층 더 늙은 듯하다.
난 차갑게 말했다.
"그 목록에 우리 홀란트 가는 포함되지 않은거고 말이야."
"......"
경비병은 입을 딱 다물었다. 이쯤 되자 에델의 눈에도 분노의 기색이 감돈다.
"그게 정말입니까? 성주가 얼마나 건방지길래 감히 홀란트 가문을......!"
기세를 끌어올리는 에델. 하녀 신분이긴 해도 4위계 마법사다.
3위계부터는 전투 마법사로 활동했고, 4위계는 용병으로 치면 B+급에서 A급 사이는 되었다.
"우릴 무시하고도 그냥 넘어갈 줄 알았습니까?"
에델의손에서 화염이 이글거린다. 당연히 경비병 수준에서는 감당하기 힘들다.
"자, 잠시....."
경비병이 새하얗게 질려서 주춤거리는 순간, 다른 쪽 문으로 누군가 들어왔다.
쾅-
벌컥하는 소리와 함께 등장한 건경비대장. 대충 경비병보다 화려한데 경비병 비스무리한 복장이다.
"멈추십시오!!"
"니는 또 뭔데?"
퉁명스레 묻자 경비대장은 움찔했다. 그러더니 서류를 슥 내민다.
"홀란트 가문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무시할 리는 없지요."
"진짜?"
서류를 낚아채서 살펴봤다.
......
13. 홀란트 백작가
14. 스프링 백작가
15.....
대강 스무 가문쯤 적혀 있었는데 그중에 우리도 있었다. 열세 번째라는 순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뭐 그럭저럭 납득했다.
'우리가 최고 실세는 아니긴 해.'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홀란트 가는 제국에서 10위 ~ 20위쯤 된다는 게 중론이었다.
제국은 존나 크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한 거다.
난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럼 이 경비병이 교육을 못 받은 거군?"
"아, 그게....."
공문은 이렇게 내려왔는데, 공문대로 행동하질 않았다. 결국 말단의 실수라는 얘기였는데...... 경비대장의 반응이 조금 달랐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아래쪽에 설명이 있습니다."
"응?"
다시 서류를 보자 이런 글귀가 있었다.
아빠, 첫째 형, 둘째 형...... 끝이었다.
"씨발, 나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경비대장을 쳐다보자 황급히 눈을 피한다.
"야."
"전 무역도시 움텔의 경비대장......"
"아니, 말이 되냐고."
난 서류를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방계면 말도 안 해. 다른 직계는 전부 되는데 왜 나만 안 된다는 건데?"
"......"
대답이 없는 경비대장.
"좆같네, 진짜."
내가 무능하다는 게 가문 바깥까지 퍼졌나? 황당할 따름이었다.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거면 몰라도, 공문까지 내릴 정도면 제대로 된 멸시였다.
'순혈여성주의자...... 나한테는 엎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복수할까? 당장 쳐들어가서 뒤엎을까?
생각은 많이 들었지만, 힘들었다. 가문의 전 병력이 나서면 이기긴 할 거다.
뭣보다 우리 아빠가 십존급의 강자니까.
'하지만 내가 끌고 온 인원으로는.....'
도저히 역부족. 난이 공문을 따라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즉, 홀란트 가문이지만 능력 없는 삼남이니까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거다.
"하아아......"
답답함에 한숨을 내뱉는다. 경비대장과 경비병은 슬슬 안도하는 눈치였다.
"저기, 제스 홀란트 도련님. 심정은 알겠으나 성주님의 의지가 확고하십니다. 죄송하지만......"
"이것들이."
발끈하려는 순간, 나보다더 성격 급한 사람이 있었다.
콰아앙-! 내가 들어왔던 문에 폭발하듯 부서진다.
"내 동생 무시하는 놈이 누구야!!"
"한나 누나....? 엿들었어?"
"어떤 놈이 내 동생을 무시하냐고!! 너야?"
묵직한 철창을 이쑤시개처럼 휘두르며 걸어오는 한나 누나. 이미 초소 안의 집기는 와장창 깨져 엉망이 되었다.
"히익,저분은 또 무슨.....?"
"야."
한나 누나는 경비대장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사실 저 정도의 실력 차이는 아닐 텐데, 워낙 기세가 살벌해서 먹힌 모양이다.
"지, 진정하십시오. 전 명령대로......"
"잘못된 명령을 따르는 게 잘못이야!!"
한나 누나는 그리 말하며 경비대장의 턱을 후려쳤다. 재빨리 반응하려 했지만, 멱살을 잡혀 얻어맞는 녀석.
"꺼허어....."
"이게 어디서!!"
연속적으로 두들겨 팬다. 경비대장은 미약한 반항을 끝내고 축 늘어져 기절했다.
초소 안에 있던 몇몇 경비병들도 멍한 눈으로 지켜볼 뿐.
'뭐야...... 이래도 되는 거야?'
"누나, 다 좋은데 뒷감당은 할 수 있지....?"
한나 누나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 튀어야지."
"응?"
"그냥 화나서 팬 거야. 이제 도망치자고."
무역도시의 성주한테 무시당해서 출입도 금지당했다. 그런데 누나라는 작자가 빡친다고 경비대장을 잡아다 후드려팼다.
이게 뭔 상황일까.....
"하아아."
씨발, 대책 없는 것만 닮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