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건방진 산적, 흡성 마법진
나와 한나 누나는 시선을 마주치곤 픽 웃었다.
산적을 무서워하는 건 초보 모험가, 또는 D급 이하의 용병이나 그렇다. 어엿한 기사까지 셋이 포함된 일행이 산적을 무서워할 수는 없는 노릇.
다만 여유로운 우리와 달리 앨리스는 긴장을 잃지 않고 외쳤다.
"진형을 갖춰라!!"
"예!!"
터더덕-. 일사불란한 발소리와 함께 가문의 병력이 나를 둘러싼다. 앨리스는 내 곁으로 붙었고, 가문의 기사 둘은 각기 전방과 후방을 맡았다.
우리의 움직임을 보고 움찔거리는 산적들.
이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걸까?
물론 나는 여전히 노예를 백허그하는 중이었다.
"근데 애초에 왜 덤빈 거야? 제대로 된 갑옷 입은 거 봤으면 알아서 내빼야지."
"그러게 말이야......"
한나 누나도 눈을 좁히며 동의했다. 겉보기에도 30명을 넘는 데다가, 갑옷까지 입은 일행. 애초에 덤비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믿는 구석이 있나...."
중얼거리는 와중, 산적이 이를 악물었다. 마구 뒤엉킨 흑발이 인상적인 여자다.
"제기랄, 잘못 걸렸는데....."
"대장, 그냥 튈까요?"
"기다려봐......"
대장이라 불린 산적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장대한 풍채에 그에 걸맞은 가슴이 출렁거린다.
"이봐!! 서로 싸우면 좋을 거 없잖아?"
"닥쳐라.네놈들 따위와 대화할 입은 없다."
이 표준적인 대답은 앨리스였다. 역시나 예상대로 행동한다.
"아니, 그니까 말이지. 너희도 우리 사정은 알잖아? 저기 이쁘장......아니, 존나 잘생긴 남자 한 명만 내주면 서로 싸우지 않고 넘어갈 수 있다니까."
쐐애액-
느닷없이 날아가는 짱돌. 산적은 기겁하며 몸을 숙여 피했다. 뒤통수를 스치는 기세로 봐서 맞았다가는 대가리가 터졌을 거다.
"지, 지금 대화하자니까.....!"
"그니까 내 사랑하는 동생을 넘기라는 거지? 주제를 모르고 말이야.“
”아, 핏줄......“
한나 누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분명 웃기는 하는데 미소가 거의 빨간마스크 수준이었다.
'밤에 봤으면 오줌 지렸겠네.'
창을 꽉 잡는 한나 누나. 그녀는 앨리스를 힐끗 보며 말했다.
"호위는 맡기고, 나는 좀 날뛰어도 되지?"
"그러라고 뽑은 용병입니다."
한나 누나는 말에서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날 둘러싼 사병들을 훌쩍 뛰어넘어 착지.
단번에 산적 대장과 대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아, 아니 좀 진정하고 말이야....... 솔직히 남동생이면너도 옆에서 맛봤을......"
"미친년이!!"
한나 누나가 벌컥 하면서 달려들려는 찰나였다.
스스슥-
수풀을 헤치고 소리가 들린다. 이어서 바람처럼 등장하는 녀석.
전체적인 형태는 인간과 비슷한데, 피부 대신에 털가죽이 붙어있고 반쯤은 늑대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크르르."
선천적인 능력이 인간의 몇 배라는 웨어울프였다. 움직임으로 봐서 꽤 상위 혈족인 듯했고.
"이제야 왔나!!"
"크르, 남자 냄새가 나는데?"
웨어울프는 코를 킁킁거렸다. 산적 대장은 곧바로 나를 가리켰다.
"저것 봐봐!! 존나 맛있어 보이지? 옆에 데리고 다니면서 따먹고 싶지?"
"......진짜군."
뚝뚝-. 웨어울프의 입에서 침이 떨어진다.
인간도 아닌 것이 날 보고 발정하는 기분이란...... 형용할 수 없이 끔찍했다.
”오오, 그분이 오셨어!“
”저놈들 다 죽이고, 우리도 남자맛 좀.....“
삽시간에 기세등등해지는 산적들. 당연히 주제 모르는 소리였으며, 날 향한 성욕이 좆같았다.
다만 불쾌함만 느낀 건 아니고,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산적 따위가 웨어울프를 데리고 다니는 건 말이 안 된다. 그것도 상위 혈족이다.
저게 보통 산적일까?
"앨리스, 움직임 봤지?"
"예."
"저 정도 웨어울프면 어느 수준이야?"
"꽤 수준 있는 모험가 파티라도 힘들었을 겁니다. 만약 도련님 혼자였다면......"
"그런 건 상상하지 말라고."
혼자였다면 진짜로 잡혀서 착정당했을 거다. 그것도 저 늑대 같은 면상을 매일 마주 보면서.
'귀족이라 다행이야. 평민으로 태어나서 이 얼굴이었으면 진짜 끔찍하네.'
아무튼 기사가 있으니 괜찮다는 거였다. 난 재차 물었다.
"보통 산적일까?"
"절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도련님을 암살하려고....."
난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과한 충성심이다.
나 따위를 암살한다는 가정은 안 해도 무방하다. 산적으로 위장해서 귀족 일행을 습격하는 세력이라면 역시......
생각하려는 순간, 격돌이 시작되었다.
산적대장과 웨어울프, 그리고 한나 누나의 대결이다.
2 대 1이었는데도 한나 누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달려들었다.
"이것들이 제스한테 발정해!!"
"크으윽....!"
한나 누나가 창을 흩뿌린다. 강하게 내뻗은 일격에 산적 대장은 비틀거리며 물러섰고, 회수하면서 돌려치는 이격에 웨어울프가 얻어맞았다.
"크르르르!!"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경직되는 웨어울프. 높은 혈통에 비해 수련은 덜 한 모양이었다.
한나 누나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안으로 감았다가, 바깥으로 내치고 다시 찌른다. 란나찰을 충실하게 익힌 게 훤히 보였다.
일반적인 용병의 막싸움과는 확연히 다르다.
공격 이후의 연계로 물 흐르듯 이어졌다. 빠르긴 해도 투박한 웨어울프와는 상반되는 부분.
까아앙- 푸욱-
"크아아!!"
시원시원한 연격에 결국 옆구리가 뚫렸다. 옆에서 보조 역할이던 산적 대장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렸다.
앨리스조차 미세하게 감탄할 정도.
"가문에 있을 때도 재능있다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요."
"좀 잘하긴 하네."
"조금이 아닙니다. 사실상 A급은 벗어난 거 같습니다."
앨리스는 만족하는 동시에 경계의 눈빛을 더욱 짙게 보냈다. 저렇게 강하니까 내 곁에 두는 게 더 불안하다는 뜻일 거다.
푸욱-
마침 웨어울프의 몸에 구멍이 하나 더 생겼다. 창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거칠기 그지없다.
이대로면 10합 이내에 웨어울프의 목이 떨어질 거다.녀석도 그걸 느꼈는지 발작적으로 외쳤다.
"크아아!! 제기랄, 계약이랑 다르다고!!"
그 말을 끝으로 바로 뒤도는 웨어울프. 순간앨리스의 몸이 긴장했다.
"조심하십시오, 도련님."
"응."
사실 내 쪽으로 오는 것보다 웨어울프가 튀는 게 더 불안했다.
'투박하긴 해도 움직임은 존나 빨랐어. 일직선으로 도망치면 추적할 수가.......'
쐐애액-
불안한 생각을 꿰뚫는 듯한 파공성. 한나 누나의 투창이었다.
뒤돌아서 달릴 준비를 하던 웨어울프의가슴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큼직한 구멍이 난 채였다.
"끄어어..... 이런 미친 파티가."
털썩 쓰러지는 녀석. 웨어울프를 통과한 창은 땅이 박혀서 부르르 진동하고 있었다.
그걸 본 산적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응? 아까는 제스를 내놓고 가라며?"
"진짜진짜진짜진짜 죄송합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산적 대장은 대가리를 바닥에 처박고 빌었다. 공포에 질려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다.
"목숨 귀한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살려만 주시면 뭐든......"
"쉿."
"흐끅!"
한나 누나의 말에 산적의 입이 딱 닫혔다. 날 돌아보며 활짝 웃는 누나.
"제스!!"
나 잘했지? 라는 건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여기선 칭찬해야 뒤끝이 없겠지? 난 어색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하......”
“그게 끝이야? 아무튼 이놈은 어떻게 할까?”
산적 대장의 처분을 묻는 한나 누나.
나는 아직도 우리를 둘러싼 산적들을 가리켰다.
"어, 이놈들도 다 처리하고 말하면 안 될까?"
"아!! 아직도 무기 들고 있었니, 너희?"
한나 누나의 말에 산적들은 하나둘 무기를 떨어뜨렸다. 저 미천한 실력으로도 아는 거다.
거역하면 바로 목이 날아간다는 사실을.
결국 단 한 명에 의해서 모조리 제압된 상황. 앨리스는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어디까지나 호위가 최우선이라 가만히 있었지, 저였으면 훨씬 간단히......."
"알겠어, 앨리스경."
"...네."
앨리스가 드물게 시무룩해 보인다. 갑자기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안 되겠지? 자존심이 보통이 아닐 테니까.'
난 앨리스와 한나 누나에게 말했다.
"앨리스경, 일단 산적들 죄다 포박해서 정리해줘. 누나는 대장 제압해서 끌고 오고."
"알겠습니다."
"그러지 뭐."
내 요청대로 산적들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뭐 잡다한 무기 같은 것도 있었는데 솔직히 저딴 고철을 취급할 레벨은 아니라서 챙기지도 않았다.
'돈은 가문에서 받은 거로도 충분한데 뭘.'
남은 건 심문이었다.
나는 무릎 꿇고 앉은 산적대장. 아까까지는 당당하게 날 노리던 녀석을 쳐다봤다.
"날 따먹고 싶다고?"
"죄, 죄, 죄송합니다. 제가 진짜 주제를 몰랐습니다...... 이렇게 귀한 분일 줄도 모르고."
“사과는 됐고.”
난 식사 보조의 팬티에 손을 넣으며 산적 대장에게 물었다.
“누가 시킨 짓이냐?”
-------
산적 대장의 눈은 바쁘게 돌아갔다.
잘 씻기고 꾸미면 괜찮은 면상이지만, 지금처럼 산적 꼴이니 딱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뻐어억-
말에서 내려서 녀석의 얼굴을 걷어찼다. 양심의 가책은 없었다. 따먹으려 했던 산적인데 뭐.
"똑바로 대답해. 눈알 굴리는 거 보였다가는 곱게 못 죽는다."
"어, 어차피 죽는 거 아닙....."
뻐어억-. 다시 산적의 얼굴이 뭉개진다. 이래 뵈도 힘 하나는 훌륭한 편이다.
무방비 상태로 얻어맞았으니, 당연히 아플 터.
산적의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죽이지 않을 수도 있어."
"그, 그허면....."
혀를 씹혔는지 발음이 뭉개진다. 나는 녀석의 배를 잘근잘근 밟으며 말했다.
"난 홀란트 가문의 삼남이다. 너희들을 전부 노예로 바꿔줄 정도의 능력은 있다는 거지."
"끄으으....."
"어때? 죽을 바에야 노예로 사는 게 훨씬 낫지 않겠나? 혹시나 '은총'이라도 받으면 쾌락을 경험할수도 있다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산적의 인생이라고 해봐야 적당히 날뛰다가 토벌당하거나, 주제도 모르고 덤비다가 죽는 게 보통.
개중에 눈치 좋게 오래 살아남는 녀석도 있겠다만 남자 맛은 못 보는 게 대부분이다.
"저,저헝말로 살 후 이후니카....?(정말로 살 수 있습니까?)"
"그럼."
내 말에 산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설득이 쉬워 보이긴 하지만, 애초에 어디 근본도 없는 녀석들이다. 병사나 간부를 설득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게 당연했다.
산적의 말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그니까 오크 제국에서 의뢰를 넣었다고? 지나가는 풋내기 귀족 가문을 덮쳐서 몰살시키라고 말이지?"
"예......"
"저기 뒤진 웨어울프는 그쪽에서 지원해준 병력이고?"
"그, 그렇습니다...."
황제의 징집령은 제국 전체에 내려졌다.
적국인 오크 제국에서도 모를 수가 없다는 뜻. 모이는 병력을 각개격파하기 위해서 산적을 고용했을 거다.
‘오크 잡것들은 죄다 멸종시켜야 해.’
적국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오크 제국이 마음에 안 드는 점은 그 외에도 많았다. 대표적인 건 모계 사회라는 거.
신기하게도 오크 놈들은 모계 사회로 유지되었다.
본디 남자가 더 강하기 마련인데 무슨 방법이 있는 모양이다.
그때 한나 누나가 나섰다.
"잠깐, 정확히 말해야지. 따지자면 너희는 산적도 아니잖아."
"무슨 말이야?"
"저놈들 블랙 용병이야.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놈들. 애초에 저 대장이라는 년도 산적치고는 너무 강했어."
"블랙 용병......"
들어본 적은 있었다.
도덕이나 법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돈을 주는 대로만 움직이는 놈들이라고. 하지만 그런 만큼 신뢰도도 떨어진다는 게 중론이었다.
'확실히 신뢰도가 낮기는 하네. 나라를 배신한 주제에 이렇게 술술 부니까 말이야.'
난 인상을 확 찌푸렸다.
아무튼 반역도라는 거네. 제국의 병력을 의도적으로 공격했으니까.
"앨리스경, 이러면 최하급 노예 아니면 사형이지?"
"맞습니다."
"좋아, 전부 노예로 만들자고. 죽이는 것도 아까우니까."
충성을 믿기 힘든 노예? 상관없었다.
일단 힘을 빼앗고 낙인을 찍으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난 싱글싱글 웃으며 명령했다.
"에델, 흡성 마법진을 준비해."
"알겠습니다."
어딜 가도 밥값은 한다는 4위계 마법사 에델이 움직였다.
-----------
남자는 양기를, 여자는 음기를 품고 태어난다.
서로의 반대되는 기운을 흡수하면 음양의 조화를 이루어 강해지고.
전에도 말했듯, 대표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방법은 섹스 또는 수련이다.
그것 말고도 전쟁터에서 꽤 사랑받는 방식이 있었는데, 바로 흡성 마법진이었다.
'존나 흡성대법 같은 이름이야.'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흡성 마법진은 사람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마법진이었다.
산적들은 전부 여자였으니까, 이들을 단번에 흡수하면 꽤 많은 음기를 얻을 거다.
순식간에 파워업한다는 소리였다.
'내 비율이 7 대 3이었는데, 이번엔 확실히 달라지겠지?‘
비율이 달라지면 힘도 훨씬 강해진다. 나는 기대감에 차서 흡성 마법진을 바라봤다.
에델이 약 3시간을 들여서 만든 마법진.
뭔가 복잡한 문자가 잔뜩 쓰여 있고, 촉매제도 상당량이 들어갔다. 소모성 재료도 한둘이 아니다.
"역시, 귀족 가문이라 이런 건 철저하다니까."
내 말에 한나 누나도 끄덕였다.
"확실히 비싼 게 잔뜩 있기는 하네. 효율이 좋겠어. 부모님이 챙겨주신 건가?"
"응, 전쟁터에 가니까. 거기선 흡성 마법진을 사용하기 쉽잖아."
흡성 마법진의 단점은 유일했다.
기를 빨린 대상이 영구적으로 힘을 잃는다는 것. 섹스를 통해 방출한 기는 느리게라도 차오르지만, 이건 아니었다.
기운의 80-90%를 빨아가는 주제에 영구적으로 회복이 안 된다.
진짜 노예한테나 쓸 수 있는 기술이었다.
난 입을 열었다.
“산적들 수준이 어느 정도야?”
“대장이라는 년은 대충 B+급 용병이고,나머지는 D급쯤 되더라. 웨어울프까지 치면 허술한 병력 털어먹기는 충분하지.”
"흐흐, 그게 전부 내 차지라는 거지?"
"좋아할 법도 하네. 음양의 조화를 넘어서 기의 절대량도 늘겠어."
대화하는 사이에 준비는 거의 끝났다.
꽁꽁 묶인 산적들은 마법진의 가장자리에 잘 뉘어 있었다. 마치 제물처럼 보일 정도다.
'실제로도 제물 비슷하긴 하고.'
작업을 마친 에델이 내게 걸어왔다.
"제스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시죠."
"중앙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되지?"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는 정도는 해주셔야 합니다."
"그건 당연하고."
공기 중의 기운을 흡수하는 법.
귀족 가문 출신이니까 당연히 익힌 기술이었다. 평소엔 귀찮아서 수련 안 했더라도 지금은 마음껏 쓸 때다.
난 천천히 걸어가서 흡성 마법진의 중앙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녀이자 마법사인 에델이 눈을 감고 집중하는 게 보인다. 더불어 제물처럼 바쳐진 산적들은 체념한 얼굴이었다.
"너무 상심하지 마. 힘을 잃는 대신에 새로운 삶을 사는 거잖아?"
"노예의......"
"오히려 이런 밑바닥 생활할 때보다는 쾌락을 더 자주 맛본다고."
솔직히 노예가 되면 성감이 개발된다. 당연히 쾌락 자체는 더 커질 수밖에.
마조 성향이 있는지 가끔 고개를 끄덕이는 산적도 있었다. 뭐 개조된 후엔 다들 노예의 삶에 만족할 거다.
'애초에 공포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쾌락으로 지배하니까.'
잡생각을 마침 즈음, 에델이 외쳤다.
"시작하겠습니다아!!"
우우웅-. 마법진이 공명한다. 바깥에서부터 시작되는 작업.
짙은 음기가 산적의 몸에서 몽글몽글 나왔다. 마치 파도를 타듯이 순서대로 음기가 흘러나온다.
이내 뭉치는 음기.
가장자리부터 훑으며 뭉친 음기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개처럼 애매할 줄 알았는데, 지금은 거의 구슬 모양이다.
'에델의 실력이 좋은 건가? 촉매제가 좋은 건가?'
아무튼 구체적이면 흡수하기 좋은 법이다. 난 뚜렷이 보이는 음기를 꿀꺽 삼켰다.
뱃속으로 들어가 시린 느낌을 주는 음기.
"끄으으......"
"제스님!! 거부하지 말고 흡수하셔야 합니다!!"
나도 알아! 아는 거랑 실천하는 게 아예 다른 거라서 문제지.
"씨이발......!!"
수련을 너무 안 했다.
평소에 성실하게 수련했다면 이깟 음기 덩어리 흡수하는 게 대수겠냐만, 나는 한 달에 한 번 수련이 최고기록이었다.
처음에 자신했던 것과 달리 내게는 꽤 어려운 일이라는 거다.
나는 부들거리며 음기를 통제하려 애썼다.
'이걸 흐트러뜨려야 해. 뭉쳐서 몸을 돌아다니게 하지 말고, 여기저기 퍼지도록.....'
"끄어어!"
사람 죽는소리가 나온다. 내 입에서 나는 소리였다.
뭔 놈의 기운이 이렇게 많은지 내 실력으로 조절하기엔 확실히 부족했던 것이다.
자꾸만 내 통제를 벗어나 몸을 질주하려고 드는 음기.
'미친......! 차라리 안개 형태였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농도가 낮으면 흡수 효율은 떨어져도 음기가 질주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작금의 상황은 너무 뛰어난 마법진과 심하게 부족한 내 실력이 맞물려 일어난 거였다.
"제스님!! 대체 왜 그러십니까? 설마 음기 따위에 휘둘려서......"
"내 동생을 뭐로 보는 거야!! 쟤가 병신도아니고, 음기에 휘둘릴 리는 없잖아! 같은 양기라면 혹시 몰라."
한나 누나의 말이 맞았다.
반대되는 기운은 그냥 흡수하면 몸의 양기가 저절로 일어나 조화를이루게 된다.
같은 기운은 과정이 꽤 복잡하지만, 반대 기운은 너무 쉬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조차 못 하고 있는 상황.
몸의 양기가 자연스레 일어나 조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도리어 도망치고 있었다.
‘미친 새끼들!! 왜 도망치냐고!’
이때까지 강자의 음기를 섭취한 적이 없어서 그럴까? 강력한 음기가 들어오자 도리어 맥을 못 추는 내 기운이었다.
“아으으......”
“제스니이이임!! 무슨 일입니까?”
말이 제대로 안 나와서 뭐라 설명하기도 힘들다. 내가 끙끙거리는 와중에 점점 의식이 희미해졌다.
‘이대로 기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나도 모른다.
단지 마지막 순간에 몸의 양기가 겁화처럼 타오르는 것만을 느꼈다.
어렴풋한 감각이지만...... 평소의 기운보다는 확연히 강했다.
에델의 다급한 외침이 아스라이 들렸다.
“양기폭주현상!! 제스님의 양기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그거 치료법이 섹......”
내 의식은 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