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고백, 실패
“그니까 무능한 도련님은 방패 들고 쳐맞기만 하라는 거지? 응? 맞잖아?”
“아...... 아닙니다. 제 의도는 그게 아니라.....”
“그럼 쳐맞지도 말고 죽으란 건가?”
“도련님이 죽지 않도록 가져온 물건입니다!!”
“내가 방패를 안 쓰면 뒤지는 새끼라고?”
“충분히 훌륭하십니다.......”
“지금 비꼬는 거야?”
“으으......”
앨리스는 끝도 없이 허둥지둥댔다.
사실 한 15분째 앨리스를갈구는 중인데, 이게 또 꼴릿하다.
‘하아, 인생을 노력으로 점철한 인간을 갈굴 수 있다니.... 진짜 핏줄이랑 성별이 최고다.’
앨리스는 잔뜩 풀 죽어서 다시 방패를 가져가려고 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 다른 무기를 찾아볼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잠깐 앨리스경!!”
앨리스를 꽤 갈구긴 했어도, 사실 방패는 꽤 적절한 무기였다.
지금 내 유일한 장점은 힘이 세다는 것. 그러니 존나 무겁고 튼튼한 방패를 다루면 적어도 다칠 일은 없다.
‘뭐 방패술도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아.’
난 앨리스가 가져온 대형 방패, 파비스를 잡았다. 문양이 화려하게 새겨졌고, 번쩍번쩍 거리는 게 대충 만든 물건은 아니다.
“소재가 뭐지?”
“내부는 5번 압축된 마나 메탈이고, 외부는 마나 메탈과 미스릴 합금입니다. 가격이 같은 무게인 철 방패의 스무 배쯤 할 겁니다.”
“훌쩍 넘을걸?”
스무 배가 뭔가, 일반 마나 메탈만 해도 철의 5배 가격이었다. 그걸 공들여 압축시키고, 미스릴 합금까지 했으니 오십 배는 되리라.
‘어쩐지 존나 무겁더라. 원래는 10kg쯤 할 텐데, 이건 50kg은 나가겠어.’
다 백작가 삼남이라 쓸 수 있는 거다. 난 방패를 쓰다듬다가 문양을 자세히 봤다.
“흠, 생긴 건 마음에 드네.”
처음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반색하는 앨리스.
“저, 정말입니까?”
“당연하지. 사실 백작가의 삼남한테 방패 따위를 권하는 건, 큰 모욕이지만.......”
앨리스가 다시 긴장한다. 난 일부로 뜸 들였다가 씩 웃으며 긴장을 풀어줬다.
“앨리스경이 가져온 방패니까 특별히 써볼게. 경을 닮아서 예쁜 것 같아.”
“옛.....? 뭐라고 하셨습니까?”
왜 이러지? 너무 구식 멘트였나.
괜히 초조해서 앨리스를 바라보는데, 오히려 그녀가 내 눈을보지 못했다.
“도..... 도련님. 놀리지 마십시오.”
“뭐가? 예쁘다는 거?”
“......예.”
앨리스는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있었다. 기분은 좋지만 그럴 리 없다는 듯한 반응.
‘이건 또 뭔 상황이야..... 씨발, 저렇게 생겼는데 평생 예쁘단 말을 못 들어봤나?’
솔직히 말이 안 된다. 난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경의 동료들이 예쁘다고 안 하나?”
“당연히 합니다.”
“그런데?”
“같은 기사에겐 듣는 게 당연합니다. 그야 기사단장에게 못생겼다고 말할 간 큰 단원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
하기야 앨리스는 출세한 여자 기사였다.
능력이 하도 출중해서 우리 가문의 회의에도 참여할 정도니, 말 다 한 셈이다.
“그럼 나는?”
“도련님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시니까......”
“좀 착각이 있는데 말이야.”
난 생각하는 대로 말하는 게 아니라, 생각을 안 거치고 내뱉는 거였다.
내가 똑똑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형들을 다 제치고 가주 후계자라도 됐을 거다.
아무튼 앨리스한테 내가 진심이라는 걸 알려줘야 할 텐데.
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놀리는 게 아니라, 앨리스경은 아주 예뻐. 어느 정도냐면......”
“어느 정도입니까?”
은근한 기대를 담는 앨리스의 눈빛.
동료가 아닌 윗사람의 평가. 특히 솔직하다가 정평이 난 내 평가였으니 기대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나도 긴장했다는 거다.
‘앨리스한테 평소 가졌던 생각이 뭐더라? 일단 생긴 게 예쁘고, 백금발도 탐스럽고, 눈도 똘망똘망하고, 몸매도 본 것 중에 최고고. 종합하자면.......’
“존나 따먹고 싶을 정도로 예뻐.”
“......”
침묵이 흐른다. 난 눈을 감고 그저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
‘회귀!! 회귀 없나? 나 환생한 거잖아. 그러면 회귀도 좀 달라고!!’
하지만 눈을 다시 떠도 싸늘한 앨리스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1.5m짜리 방패인 파비스가 있어서 다행이다. 어디 숨을 구석은 만들 수 있으니까.
앨리스는 날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만 거기에 담긴 감정은 분노보다는 슬픔이었다.
작게 중얼거리는 앨리스.
“내 힘이 탐나시긴 하겠지.......”
응? 절대 아니다. 힘 따위를 원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진심이었다.
뭐라 항변하려 하는 순간, 앨리스는 차갑게 말했다.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도련님.”
“어? 앨리스 내 말은......”
“일단 방패를 쥐십시오. 방패술은 원래 막으면서 배우는 겁니다.”
“자, 잠깐.....!!”
내 말을 무시하고 달려드는 앨리스. 그녀는 아주 가벼워 보이는 움직임으로 방패를 걷어찼다.
뻐어엉-
몸이 통째로 들썩인다. 분명 힘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도 거의 날아갈 뻔했다.
“이 무슨 괴물 같은......”
“아까는 이쁘다고 하시더니, 지금은 괴물입니까? 역시!!”
뻐억- 뻐어억-. 연속으로 발을 내뻗는 앨리스. 난 어설픈 움직임으로 방패를 내밀기 바빴다.
방패의 손잡이도 특수하게 제작됐는지, 아주 튼튼했다. 문제는 내 손아귀가 허약했다는 거다.
저 괴물 같은 발길질이 가해질 때마다 몸이 통째로 들썩였고, 방패를 놓치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더 세게 잡아야 했다.
어느새 피가 줄줄 흐르는 손바닥.
뻐어어억-!
“앨리스!! 부상이야, 나 다쳤다고!!”
“예?”
발길질이 뚝 멎는다. 나는 그제야 방패 너머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이것 봐봐. 피 철철 흐르는 거 안 보여?”
“정말이군요...... 방패만 건드렸는데 어찌.......”
앨리스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구제불능 도련님에서 보호해야 할 애완동물쯤으로.
하여간 내 문제는 아니다. 앨리스는 고수고, 나는 하수니까 더 그랬다.
‘원래 잘하는 새끼가 사정 봐주면서 때려야지, 맞은 하수는 죄가 없다고.’
앨리스는 품에서 자그만 가죽 물통을 꺼냈다. 저기에 뭐가 있는지는 나도 잘 안다.
‘일반 기사는 희석한 포션, 단장급이면 포션 원액을 넣고 다니지.’
손바닥 까진 상처에 포션 원액이면 충분하고도 남는다. 도리어 과분할 정도.
한바탕 포션이 손바닥을 휩쓸자 상처는 눈에 보이지도 않게 되었다.
“됐습니다. 제가 도련님 수준을 너무 높게 봐서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는 됐고. 그 여기 조금 덜 아문 것 같지 않아?”
“어디가?”
앨리스는 내 손을 잡고 눈을 바싹 들이댔다. 물론 보일 리는 만무하다.
그냥 손 좀 더 잡고 싶어서 한 말이니까.
“도련님, 암만 봐도 멀쩡합니다.”
난 앨리스의 조물거림을 좀 더 음미하다가 답했다.
”큼큼, 착각한 모양이야.“
”그런가요?“
앨리스는 해의 위치를 힐끗 확인했다.
”이런저런 일은 많았지만, 수련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습니다. 방패는 그나마 마음에 드시는 것 같으니, 최선을 다해 알려드리죠.“
”아......“
결국 수련의 늪을 벗어날 수는 없나?
난 마지못해 앨리스에게 제대로 배웠고, 이때까지와 달리 시간은 겁나 느리게 흘렀다.
‘내 인생에 이런 지루한 시간을 또 보낼 줄이야.’
그래도 어찌어찌 배우긴 했다. 배우는 속도는 느려도 까먹지는 않는 편이다.
방패를 쥐는 법이며, 충격을 흘려내는 법, 최대한 사각을 만들지 않는 법 따위를 배웠다.
난 불어 터진 국밥을 쳐먹듯 꾸역꾸역 기술을 익혔고, 거의 기절할 때가 돼서야 수련은 끝났다.
”허억, 허어억...... 해 넘어갔어. 수련 시간 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노을이 유독 빨리 사라지는군요.“
”그 반대인데.....“
힘들다. 진짜 야간행군 방금 끝낸 것보다 더 힘들어서 몸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도련님.“
”응?“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번쩍-. 앨리스는 날 쉽사리 안아 들었다. 등에는 파비스를 매고, 팔로는 날 들었는데도 힘든 기색이 전혀 없다.
저택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앨리스. 난 안긴 채로 앨리스의 얼굴을 감상했다.
하얗기 그지없는 피부는 수련했음에도 여전히 뽀송뽀송했다.
”저기, 앨리스경.“
”예?“
”키스할래?“
”......그만 좀 하십시오.“
이 방법은 안 통하나 보다. 하지만 내가 멍청한 건 아니었다.
왜냐면 이때까지 여자 꼬시는 멘트로는 ‘따먹고 싶어.’ 같은 거나 ‘이쁘네, 키스하자.’ 정도로 충분했던 것이다.
‘역시 앨리스는 콧대가 높아.’
난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편안히 있으면 하녀들이 알아서 씻기고 재워줄 거다.
아스라이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듯, 마는 듯했다.
”도련... 잘...... 정도..... 니다.“
하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순간.
”으음?“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사라졌다. 난 상쾌한 몸으로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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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아침이 아닌 새벽이었다.
난 잠을 깨운 주범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날 깨웠단 말이지?“
”예...... 도련님께서 오라고 하셔서......“
내 눈앞에는, 낮에 불경을 저질렀던 ‘식사 보조’와 ‘받침대’가 나란히 무릎 꿇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