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 세계는 차근차근 멸망하고 있는 상태다.
차근차근 멸망이라니.
솔직히 그게 말이 되나 싶긴 한데 놀랍게도 그게 이 세계의 현실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진 건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남성 인구 때문이겠지.
덕분에 나라에서 남자를 무슨 중요한 자원 관리하듯 관리하게 된 것도 사실은 그 때문 아니겠는가.
사실 그 정도만 되어도 남자 입장에서는 감지덕지일 것이다.
나야 기가 차고 코가 막히지만 듣자하니 어디 오지같은데서는 남자를 마을 내에서 단체로 돌려먹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게 시발 종마지···'
어디 사람 사는 꼴이겠는가.
뭐, 아무튼 중요한 건 대체 어쩌다가 그리 되었냐는 것이다.
왜.
대체 왜 남자가 태어나질 않는 것일까.
솔직히 현 상황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되질 않으니까.
남자 쪽만 유독 드물게 태어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가 태어날 확률이 더 줄어들고 있다?
내가 뭐 어디서 생물학을 전공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그게 말이 되지 않는 다는 것쯤은 지나가는 일곱 살짜리 꼬맹이도 알 거다.
그렇다는 건?
'분명 뭔가 그 원인이 있다는 소린데···'
그게 대체 뭘까.
그래, 문제는 그거다.
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짚이는 구석도 딱히 없었다.
워낙 특이한 케이스라서 대체 뭘 하면 상황이 이리되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으니까.
'설마 주신이 여신이라서?'
일 리는 없겠지.
여태껏 거쳐온 곳들 중에 여신 혼자 다스리는 세계가 두 개나 있었는데 이곳과는 달리 그 두 세계는 지극히 멀쩡했으니까.
'마족이라는 종양을 품고 있어서 그렇지.'
적어도 그런 문제 관련해서는 그랬다.
차라리 그냥 그 두 세계처럼 누군가를 두들겨패서 끝낼 수 있는 문제라면 참 좋았을텐데.
마침 내 덕분에 제국, 왕국, 교국, 대초원 간의 대화합도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여태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사실 이건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다.
멸망이라는 글자가 턱밑까지 올라와도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 바쁜 게 인간이라는 생물의 습성이니까.
'신성 제국 새끼들···'
오죽하면 여기 뚫리면 다 뒤진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들만 살아보겠다고 보내기로 한 지원군을 취소해버리곤 하겠는가.
뭐,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몸 쓰는 일 위주로 하다가 갑자기 머리 굴리는 일을 하려니 골이 지끈거린다는 것 정도.
갑자기 맡게된 일이 차라리 좀 쉬운 편이었다면 그나마 나았을텐데 이건 뭐, 이제 막 소환된 용사에게 싸구려 철검 하나 쥐여주고 쟤 좀 어떻게 해보라며 마왕 앞으로 등떠미는 꼴이니···
어지간하면 좆까라고 하고 포기하고 날랐을텐데 그럴 수 없다는 게 또 문제였다.
"꺄! 꺄아ㅡ!"
이런 핏덩이를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배부르게 먹었겠다 꺽하고 시원하게 트림도 했겠다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대며 현재 기분이 좋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깨끗한 손수건을 이용해 입가에 묻은 거품을 살살살살 닦아주었다.
얘는 내가 지금 자기 때문에 골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걸 알기나 할까.
그야 뭐··· 모르겠지.
더 솔직히 말하면 앞으로도 몰랐으면 했고.
"으이구, 산책 나오니까 그릏게 좋아요?"
"아부! 아우!"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또 시작되어버린 손바닥 세례에 허허 웃으며 얌전히 볼을 대주고 있으니 내 오른뺨을 찰싹찰싹 두들겨대던 린이 자기 사전에 차별따위는 없다는 듯 이번에는 왼쪽 뺨을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챱챱 소리를 들으며 다시금 생각해봤다.
나름대로 주신까지 있는 세계가 어쩌다가 이런 개판이 되었을까하고.
'보니까 완전히 방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차라리 여신이 근무태만이었다면?
그래서 그런 갑다 했을 것이다.
헌데 신탁이라는 제법 귀찮고 품이 많이 들어가는 일까지 해가며 굳이 멸망에 대해 예보한 걸 보면 완전히 두 손 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쪽이라고 봐야겠지.
그게 과연 얼마나 성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신탁도 그래.'
의문 투성이인 건 여신이 성녀의 입을 빌려 전했다는 신탁또한 마찬가지였다.
예언의 남성과 동침하면 그 사이에서 이 세계의 구원자가 될 아이가 태어날 거라니.
그게 정말 원본 그대로인지는 나야 모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모호한 신탁 아닌가.
그 아이가 어떤 식으로 세계를 구원해해는지부터 시작해서 세상이 개판이 난 이유는 무엇인지까지.
누락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하···'
어떻게 성비가 개판나기 시작한 원인이 무엇인지만 알아낼 수 있어도 그나마 좀 지끈거림이 덜해질텐데 말이다.
레이시아에게도, 바이올렛에게도 알아봐줄 수 있겠냐고 부탁도 해봤고, 내 나름대로 역사책이랑 신화까지 뒤져봤지만 건진 거라고는 하나도 없으니 그저 답답할 따름이었다.
마치 누군가 그 부분만 의도적으로 도려내기라도 한 것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부! 아부우!"
그 와중에 이쪽이 자길 두고 딴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귀신같이 알아채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항의를 해대는 린의 모습에 피식하고 웃으며 린을 안고 있던 팔을 움직여 둥기둥기 해주었다.
그러자 언제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듯 뽀송뽀송한 얼굴 위로 해맑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예 손뼉까지 쳐가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하는 린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아부?"
그도 그럴 것이 이 골치 아픈 문제를 아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딱 하나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알고 있어도 써먹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고.
세계가 왜 이 꼴이 났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의 주인공 님에게 물여보면 된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세계의 구원을 사명이랍시고 짊어지신 분이니만큼 틀림없이 그에 대해 알고 있을테니까.
문제의 원인을 알아야 그걸 해결할 수 있는 건 당연한 이치니 말이다.
고로 진을 찾아가 원인에 대해 묻고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을 듣는다면 요 며칠동안 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던 이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되겠지.
'그래 듣는다면 말이지···'
정답으로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자 편한 길을 알고 있음에도 그쪽을 선뜻 택할 수가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전회차의 업보 때문이었다.
진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자길 강간하려 했던 놈을 적극적으로 변호했던 놈에 지나지 않을테니까.
그런 놈이 찾아와서 질문을 던진다 한들 그게 곱게 보이기나 하겠는가.
오히려 칼 빼들고 달려들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이 답답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그걸 써먹지 못한다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엿같았다.
이리 될 줄 알았다면 그냥 그 새끼가 사고 쳤을 때 교단 측에서 죽이든 살리든 그냥 내버려뒀을텐데.
'설마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겠냐고···'
뭐, 그거도 그거지만 그녀를 상대로 마지막으로 보였던 모습도 마음에 걸렸다.
이제 틀렸다며 망설임없이 자살을 택한 날 보며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야 솔직히 안봐도 비디오였으니까.
보나마나 둔기로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뒤통수가 뜨끈뜨끈했겠지.
'쯧···'
그래서 선뜻 진에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자칫 척이라도 지는 날에는 그것만큼 곤란한 상황도 또 없을테니까.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서로 본체 만체하는 것이 최선이기는 한데···
'이번에도 아무 것도 못 건지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날 찾는 급한 부름이 있었고, 그에 날 찾으러 온 시녀를 따라 바이올렛의 앞에 도달하니 어제 봤을 때보다도 더 배가 부풀어오른 듯한 그녀가 날 향해 표지가 새까만 책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 수상해보이는 책은 또 뭘까.
확실한 건 함부로 만져서 좋을 건 없을 것 같다는 점이었고, 품에 안고 어르고 있던 린을 옆방에서 쉬고 있던 리파의 품으로 넘긴 것도 사실은 그래서였다.
혹시라도 보는 이를 미치게 만든다거나 뭐 그런 종류의 책이라면 피해를 입더라도 나 혼자 입는 게 맞았으니까.
아니,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대체 어디서 주워온 걸까.
대충 그런 느낌으로 날 향해 그 책을 내민 장본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더니 동맹관련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바이올렛이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올렸다.
"사교의 성전이라더군."
당연한 말이지만 원본은 아니란다.
이번에 우연찮게 사교도 놈들 중에서도 나름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이를 사로잡는데 성공했다는게 그 놈의 소지품과 은신처를 뒤지다가 나온 거라나?
"다행히도 교국 측보다 우리가 한 발 빨랐지."
만약 놈을 발견한 게 성기사단이었다면 얄짤없이 활활 불태워졌을 거라며 짤막하게 덧붙인 바이올렛이 턱짓으로 내 앞에 놓인 책을 가리켰다.
"대체 무슨 소리를 씨부려놨길래 그리도 광신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건가 싶어서 먼저 한 번 확인해봤는데···"
"아니, 위험하게 왜 그런 짓을··"
"저번에 네가 부탁했던 것하고 관련이 있어보이는 내용이 적혀있는 것 같아서."
홀몸도 아닌데 위험하게 왜 그랬냐며 따지려 하기 무섭게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내가 바이올렛에게 부탁한 것이라고 하면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교국 측에서 뭔가 냄새를 맡기라도 한 건지 놈의 은신처에서 나온 게 그것뿐이냐며 자꾸만 귀찮게 해서 말이야."
그러니 빨리 확인하라고 부르셨단다.
내가 확인한 다음에는 그대로 벽난로에 던져버릴 예정이라고 하고.
해서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조심스레 책에 손을 댔다.
대체 뭐로 만들었길래 이딴 칙칙한 색을 자랑하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딱봐도 함부로 손대면 안 될 것같은 비쥬얼을 하고 있는 것치고는 의외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좀 많이 까칠까칠한 감촉이 책과 맞닿은 손가락 끝으로 착하고 감겨들 뿐.
이번에 사로잡은 놈이 사교 내에서도 나름 높은 위치라더니 이 성전인지 뭔지를 꽤나 신봉하는 놈이었나 보다.
기본적으로 거칠거칠한 편인 표지 군데군데가 해져서 반들반들하게 변해있는 걸 보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대체 이 안에다가 뭘 적어놨길래 사포같은 게 반들반들해질 정도로 열심히 들여다본 것일까.
호기심을 더는 억누를 수가 없어서 꼴깍하고 침을 한 번 삼킨 다음 조심스레 책을 펼쳤다.
첫 장의 내용은 딱히 별 거 없었다.
여신교에서 내세우고 있는 신화가 얼마나 허황되고 거짓 투성이인지 토로하는 내용이 전부였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뭐 이런 류의 책이 으레 그러하듯 신화에 대해 서술하고 있었다.
살짝 의외였던 점은 앞장에서 그토록 열렬하게 여신교를 까내릴 때는 언제고 정작 신화랍시고 적어놓은 건 여신교에서 쓰는 경전에 적혀있는 것과 거의 똑같은, 아니 그걸 그대로 옮겨다 놓은 듯한 내용이었다는 점이었다.
'뭐야 이거···'
이럴거면 대체 왜 그리 까댄 건가 싶어서 황당해하고 있으려니 중간부터 내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사 차 읽어본 여신교의 경전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원래 수많은 신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헌데 인간들의 교만함에 실망한 신들이 세계에서 손을 떼고 사실상 소멸에 가까운 수면에 잠기길 택했고, 덕분에 혼란스럽게 변한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는 피조물들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긴 여신이 홀로 잠들지 않고 남아 세계를 책임지기로 했다는 게 여신교의 경전에 적힌 여신이 주신이자 유일신으로 거듭나게된 계기인데···
-여신교에서는 그리 말하지만 사실 여신이 주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친족들을 배신했기 때문이다.
-여신은 자신의 친족을 배신하고 죽인 희대의 쌍년이다.
-세계가 이 꼴이 나게 된 것도 그렇게 소멸한 신들의 원념이 세계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사교의 겅전에는 그리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