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한 번 생각해보겠다.
레이시아는 그리 말했지만 사실 이건 생각하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이올렛이 내민 제안은 왕국 입장에서 보면 사양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었으니까.
지도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기존의 철도를 바이올렛이 말한 수준까지 확장시키려면 얼마나 대공사가 되겠는가.
그걸 위해 부담해야할 비용이 문제라서 그렇지 일단 공사가 시작된다면?
경기는 확실하게 좋아질 것이다.
그 정도 되는 대규모 토목공사는 사실상 나라에서 민간에 돈을 뿌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그렇게 풀린 돈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경제를 살아나게 만들겠지.
'아닌가?'
뭐, 아무튼 거기에 들어가는 금액을 반씩 내자고 한 것도 아니고 자기 쪽에서 전부 부담하겠다는데 굳이 사양할 이유가 있을까?
눈 딱 감고 남자 한 명하고 별 쓸모도 없어서 소작이나 주며 방치해두고 있는 공유지 조금만 내주면 왕국 입장에서는 일타쌍피 수준을 넘어 길가다가 주운 복권이 1등에 당첨되는 꼴인데?
그러니 이건 레이시아가 자기 선에서 잘라내려 한다고 친들 결국에는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으니까.
그리고 바이올렛이 건넨 제안에 대해 들은 좀 높다 싶으신 양반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야 안봐도 뻔했다.
보나마나 레이시아에게 자기 일을 전부 떠넘기고 탱자탱자 욜로를 즐기고 계신다는 여왕이니 뭐니하는 사람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읍소하겠지.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여 부르짖지 않을까.
제국의 의도가 수상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건 받아들여야만 하는 제안이라고 말이다.
뭐, 바이올렛이 내어달라 청한 땅이 수도하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곳이었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아까 말했듯 수도보다는 국경과 훨씬 가까운 외곽아닌가.
그러니 더더욱 그리 될 터.
'뭐, 이야기가 안 새어나갈 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그리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아는 바이올렛이라면 이미 밑작업을 시작하고도 남았으니까.
뭔가 거창하게 할 필요도 없이 왕국 내에 깔아둔 첩보라인에 소문 좀 퍼뜨리라고 하면 그대로 게임 끝이니 거리낄 것도 딱히 없었을 것이고.
그리고 그 사실을 레이시아라고 해서 모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일까.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휴식을 청한 레이시아의 얼굴은 누가봐도 외통수에 몰린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렇게 잠시동안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된 순간, 레이시아가 방을 빠져나가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내쪽을 향해 다가왔다.
"···좋았니?"
"어, 음···"
왠지 아까 했던 상상이 그대로 구현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잽싸게 리파를 향해 도움을 청해봤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리파라도 내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그녀가 차를 마시는 척 하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어딜 보는 걸까? 응?"
"그게··· 그러니까···"
"대화 중에는 대화 중인 사람을 보는 게 예의잖아? 안 그래?"
"그, 그렇··· 죠···"
잃어버린 무력에 아쉬움은 느낄지언정 집착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는데 상황이 이리되니 아쉬움이 장난 아니었다.
'시발···'
카트린느한테 가서 파워업 물약이라도 만들어달라고 해야하나?
아니, 근데 카트린느는 대체 뭘 하길래 이토록 눈에 띄질 않는 걸까.
아직도 죄책감이 덜 풀렸나?
'난 진짜 괜찮은데···'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찾아가서 위로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봐야 효과는 딱히 없을 거다.
그건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을 한들 카트린느의 머릿속에 본인이 만든 약이 날 죽일 뻔 했다는 사실이 화인처럼 새겨져있을테니 결국 최선은 그녀가 조금이라도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극복할 시간을 주는 것 뿐이겠지.
그래도 언제까지고 방치해둘 생각은 없었기에 언제고 기회를 봐서 한 번 찾아가봐야 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ㅡ
"또, 딴생각."
턱이 잡혔다.
'아차.'
그제서야 속으로 아차했지만 어느새 얼굴 앞으로 바짝 들이밀어진 바이올렛의 금안은 요사스레 빛나고 있었다.
"정말··· 아버지가 이래서야 아이가 뭘 보고 배울지 모르겠어."
"윽···"
"그래도 뭐··· 이번만큼은 봐줄게. 어찌되었건 내가 새치기를 한 건 맞으니까."
그리 말한 바이올렛이 내 귀에 입술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딱 나와 본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자그마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대신··· 최우선은 항상 이 몸이어야 하는 거 알지?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궁금하거든 직접 확인해봐도 돼."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여주시겠단다.
그에 황급히 고개를 끄덕이니 바이올렛이 언제 얼굴을 굳히고 있었냐는 듯 싱긋 웃으며 내 볼을 혀로 살짝 핥았다.
그 모습이 꼭 내게 영역표시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닦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 둬."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반사적으로 들어올렸던 손을 다시금 내리고 있으니 바이올렛의 뒤에 서서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고, 헛웃음을 터뜨렸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그렇게 중간에 약간의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바이올렛의 제안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잠시 자리까지 비워가며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나 그걸 받아칠만한 방법을 떠올려내지 못한 걸까.
다만 그냥 고개를 끄덕이긴 좀 그랬는지 레이시아가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왕국에도 충분히 이득이 되는 제안이니만큼 당장 이 자리에서 확답을 해드리고 싶지만 아무래도 제 신분이 아직은 왕녀라서 말입니다."
그리 말한 레이시아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본국의 허락을 받아낼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고, 그에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바이올렛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가 여왕에게 전해진다고 한들 달라질 건 없을 거라고 본 것일까.
"아, 이왕 이리된 거 아까 그 공터에 세울 것에 대한 문제도 마무리 짓는 게 어떻습니까?"
"세울 거라고 하심은···"
"당연히 신혼집이겠죠? 물론, 그 크기가 좀 많이 크긴 하겠지만···"
그 정도면 사실상 신혼집이 아니라 신혼도시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아무튼 그것에 대해 언급한 바이올렛이 레이시아에게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혼수로 이 정도까지 해가는데 적어도 신혼집에 들어가는 비용은 너희들이 감당해야하는 거 아니냐라고 눈치를 주는 듯한 모양새였다.
'하긴···'
따지고 보면 그게 맞긴 했다.
아무래도 거기 들어가서 살 사람들의 신분이 신분이다보니 어지간한 규모로는 어림도 없는 만큼 분명 그걸 짓는데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가겠지만ㅡ
'그래도 철도 공사 비용보다는 덜 나올테니까.'
그 정도면 충분히 감당할만한 금액 아닐까.
아니나 다를까 레이시아는 그런 바이올렛의 행동을 도발이라 판단하기라도 했는지 순간 그녀의 목덜미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그러더니ㅡ
"그 정도는 저희 쪽에서 감당하죠.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쪽에서 내기로 한 게 있으니까요."
그렇게 받아치더라.
무리할 정도로 간절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상대적으로 여유를 부리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둘 모두 신분도 그렇고 자존심도 그렇고 어마어마한 편이다보니 대립이 한 번 반복될 때마다 무슨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런 저런 문제들이 착착 결정이 되더라.
그런 식으로 눈을 한 번 감았다 뜰 때마다 결혼이라는 현실이 어디 공포 영화에 나오는 여고생 귀신마냥 쿵쿵쿵쿵하며 가까워지는 걸 살짝 멍하니 받아들이고 있으려니ㅡ
"으윽···!"
언제까지고 그 상태로 있을 것만 같았던 리파의 몸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애가 나올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덕분에 간신히 정리되나 싶었던 분위기가 다시금 소란스레 변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금방이라도 출산을 시작할 것처럼 땀을 뻘뻘 흘려대는 리파의 모습에 교국 측에서 그런 그녀를 배려해 파견한 고위 사제들이 몇 번이고 그녀의 방을 드나들었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초조해 죽겠는데 더 미치겠는건 대체 어떻게 되먹은 꼬맹이인지는 몰라도 엄마를 괴롭히기만 할뿐 바깥으로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설마···'
그 탓에 자꾸만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억지로 머릿속에서 쫓아냈다.
좋은 생각만 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국에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생각했으니까.
그런 나만큼은 아니지만 얼추 비슷하게 초조해보이는 이들이 있다면 다름아닌 다른 여성들이었다.
바이올렛이나, 디아나, 레이시아의 반응이 특히 그랬다.
아무래도 다들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리파와 같은 상황이다보니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하는 그녀의 모습이 어째 남일 같지가 않았던 것일까.
"으으음···"
자신들도 언젠가는 저런 걸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살짝이지만 두렵고,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의 첫째가 다른 여자의 배를 빌어 태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뭔가 복잡하기라도 했던 걸까.
들어오면 안 된다고 그래서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문 앞에다가 가져다놓은 의자에 털썩 걸터앉아있던 내 옆을 지키고 있는 그녀들또한 나만큼이나 힘겨워보였다.
"아아악···!"
대체 얼마나 더 속을 썩일 생각인 걸까.
다른 이의 출입을 불허하듯 굳게 닫혀있는 문 너머에서부터 들려온 고통에 찬 비명소리에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비명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입술을 깨물어댔던 탓에 이미 너덜너덜하게 변한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그리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정신을 바로잡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들어갈 것만 같았으니까.
'미치겠네···'
입술과 마찬가지로 손바닥도 이미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계속해서 손을 꽉 움켜쥐었다가 풀어대길 반복하니 얼마 되지 않는 힘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이 남아나질 않더라.
"정신 차리셔야 됩니다···!"
안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사제의 목소리가 저리도 급박한 것일까.
맘 같아서는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문 너머에서 뭔가 들려올 때마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부터 들었으니까.
허나 그러지 않았던 건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고.
계속 의자에 앉아있기도 힘들어서 아예 문 앞에 서서 그 앞을 배회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안쪽에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들이 점차 급박해지더니···
"지금!"
이라는 외침과 함께 참 여러 사람을 애타게 만들었던 녀석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응애응애하고 아기 울음 소리가 문틈 사이로 세차게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문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바로 앞에서 듣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더라.
딱 거기까지였다.
내가 눈앞에 자리하고 있던 문을 두고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닫혀있던 문을 걷어차다시피 해가며 사람 속을 미친듯이 썩힌 녀석과 리파가 기다리고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눈으로 들어온 것은ㅡ
힘이 쪽 빠지기라도 했는지 유난히도 수척해서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리파와ㅡ
벌써 포대기로 잘 포장되어 있는 새빨간 핏덩이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깨달았다.
그 쪼글쪼글한 모습이··· 원래라면 못 생겼다는 생각부터 들어야 정상인 그 모습이···
이토록 사랑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