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61)화 (360/366)



〈 36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것처럼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행동에 리파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번졌다.

"설마설마하긴 했는데 정말 그리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표정이 꼭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해를 받아 씁쓸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표정을 한채 리파가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둘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이안은 치료를 위해서 교국을 떠날  없는 상황이라고."


"그건···"


"그대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억지로 끌고 간다한들 얼마 지나지 않아 상태가 심각하게 나빠질텐데 내 말이 틀린가?"

그건 확실히 리파의 말대로였다.


만약 내가 이대로 교국을 떠나게 된다면?

과연 얼마나 살  있을까.

한 달?

일주일?


어쩌면 그것조차 살지 못할 수도 있었고.

이런데 날 다른 곳으로 끌고 간다?

사실상 죽이려고 데려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리파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서슴없이 저지를 거라는 오해를 받은 걸 굉장히 억울했다.

마치 '날 뭘로 보고!'하는 느낌으로 화를 내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리고 이런 말을 하면 좀 민망하긴 하지만··· 이쪽의 내부 상황이 그리 안정적인 게 아니라서 말이지."

내부 상황이라고 함은 전에 말했던 독살 건을 말하는 것이겠지.


확실히 그 점까지 고려하면 대초원은 내게 있어 사지나 다름없긴 했다.

뱃속에 있는 아이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들이 원수나 다름없는 왕국 출신의 남자가 대족장쯤 되는 이의 반려 자리를 차지하도록 가만히 내버려둘까.


모르긴 몰라도 리파가 겪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자주 독살 시도를 겪게될테지.

리파가  혼자 방치해둘리는 없으니 어지간한건 시중드는 이들 선에서 걸러질 가능성이 크지만 한 손으로 열 손 못 막는다고  중에 하나라도 뚫려버린다면···

'음··· 백퍼 죽겠네.'

몸이 멀쩡해도 생사를 장담할 수가 없는 게 독이라는 놈이다.

하물며 암살에 만만한 걸 써먹을 리도 없으니 틀림없이 극독을 동원할텐데 그 정도면 농담 아니고 한 5분 안에 뒤지지 않을까.

그러니 리파가 대초원으로 가자고 사정사정 하더라도 그곳만큼은 절대로 가지 않을 생각이다.

뭐, 지금 말하는 걸 보면 애초에 리파도  거기로 데려갈 생각이 없는  했지만.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 점을 설명하는 리파의 행동에 그녀와 시선을 맞대고 있던 레이시아의 표정이 어딘가 묘하게 변했다.

"그럼 결혼한 다음에는 어찌할 생각이죠?"


설마 이대로 교국에 눌러앉기라도 할 생각이냐.

레이시아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그런  가능할 리 없었다.

부족 안에 철퍼덕 눌러앉아 내부를 안정시켜도 모자랄 판국에 대족장이라는 년이 바깥으로만 떠돌게 되면 부족 내에서 벌어질 일이야 솔직히 뻔했으니까.

전에 리파가 말하길 믿을만한 측근에게 자신을 대행할 수 있는 권한을 주어 자리를 비운 동안 부족 내부의 일을 다스리도록 했다는데 솔직히 지금이야 자리를 비운지 얼마 안 되서 그 방법이 먹히는 거지 만에 하나 외유 기간이 길어진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내부에서부터 잡음이 일어날테지.


거기에 그 믿을만한 측근이라는 년도 리파가 자리를 비우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생각을  가능성이 크고.

그러니 언젠가는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 리파의 운명이었다.

그 시기는 아마도 출산이 끝난 후가 되겠지.


덕분에 리파가 바이올렛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나  알게 되었다.

애만 낳는다고 끝이 아니니 몸을 추스르는데 어느 정도 시간을 쓴다 쳐도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게 될테니까.

그 얼마 되지도 않는 시간 안에 애도 낳고, 나랑 간략하게라도 식을 올리고 하려면 이곳에서 나름 입지가 탄탄한 바이올렛의 조력이 꼭 필요할 거라고 본게 아닐까.


'흐음···'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던 바이올렛이 전면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해서 제안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어느새 그런 그녀의 손에는 척봐도 두꺼울 것 같은 종이 한 장이 돌돌 말린  자리하고 있었다.


저건 또 뭘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돌돌 말려있던 것을 양손으로 잡고 쫙 펼쳤고, 그와 함께 테이블 위로 등판한 것을 교국과 왕국, 그리고 대초원을 아우르고 있는 커다란 지도였다.


대략적으로 그려놓은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세세한 것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은 아닌 것 같은데 저건 또 어디서 구해온 것일까.

아니나 다를까 나와 비슷한 감상을 받았던 모양인지 바이올렛이 테이블 위로 지도를 펼치기 무섭게 레이시아의 표정이 살짝 불편하게 변했다. 옆에 앉은 디아나는  했다. 아직까지는 학원 소속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반쯤은 군부에 몸을 담고 있는 상태다보니 자연스레 이런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

그에 비해 앨리스의 반응은 어땠는가 하면 여태껏 고수하고 있던 자기와는 상관없는 문제라는 태도를 집어치우고 제법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바이올렛이 꺼내든 지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그려진 내용물이  민감한 것이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종이 한 장으로 셋에게 각자 다른 반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한 바이올렛도 그런 셋의 반응을 확인한 것일까.

"너무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 이 정도야 조금만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구할  있는 물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부정을 해버리면 왕국이 가진 첩보력이 형편없는 수준이라고 시인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만큼 결국 레이시아는 떨떠름한 표정을 한채 바이올레스이 발언에 동조했다.

그렇게 떨떠름해하는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반응을 물리친 바이올렛이 싱긋 웃으며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아무튼 여기, 이곳을 한 번 봐주시겠습니까?"

그런 바이올렛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에는 평야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그림과 낯선 지명이 적혀있었다.

특기할만한 점이 있다면 왕국 영토임에도 교국하고 굉장히 가까운 편이라는 것이었고.

교국에 진입할 때 들렸던 국경도시만큼은 아니지만 거기서 대충 한 3일내지 4일 정도 되는 거리에 있는 곳이라고 해야할까.


지도라서 확신하긴 힘들었지만 느낌상 그랬다.

"제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평야는 왕실 소유로 되어있더군요. 맞습니까?"

확인차 던져진 바이올렛의 질문에 레이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혹시 실례가  된다면 지금 어떤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용도라고 해도··· 근처에 있는 마을 주민들에게 소작을 주고 있을 뿐이에요."

"그 말은  땅과 관련해서 따로 계획같은 게 없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일단은요."


"좋네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바이올렛이 옆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바이올라가 그렇게 내밀어진 손바닥 위에다가 깃펜 하나를 올려놓았다.


저건 또 어디서 꺼내든 걸까.

깃펜에 이어 잉크가 가득 담긴 통까지 테이블 위에 세팅을 끝마친 바이올라가 몸을 뒤로 물리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손에 쥔 깃펜의 끝부분을 잉크통 안에다가 밀어넣고 그 안에 담긴 것을 콕콕 찍었고ㅡ

지이이이익ㅡ!


그렇게 새카만 것을 잔뜩 머금은 것을 지도 위에 올린 바이올렛이 그것을 이용해 선을 쭉 그었다.


펜 끝에서부터 피어난 검은색 선이 왕국의 영토라 표기되어있는 부분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모습이 왠지 모르게 익숙했다.


그것하고 비슷한 걸 어디서 본 것도 같달까.


'내가 저걸 어디서 봤더라···'

눈을 가늘게 뜨기 무섭게 그에 대한 해답이 바이올렛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왕국을 가로지르는 철도의 위치가 대충 이쯤이었죠."


대초원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남부의 한 도시서부터 교국으로 통하는 국경지대와 살짝 떨어진 곳에 자리한 국경도시에 이르기까지.

대충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린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올곧게 뻗어있는 검은색 선의 모습은 왕국을 가로지르는 철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었다.


그렇게 그어진 선을 천천히 눈으로 쫓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있었다.

아까 바이올렛이 손수 가리켰던 평야가 그 검은색 선하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설마···'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바이올렛이 다시 잉크통 안에다가 밀어넣고 있던 깃펜을 꺼내 쭉 그어져있는 검은색 선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걸 이런 식으로 잇는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일자로 쭉 뻗어있던 것에 가지가 자리났다.

"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서 이걸 이렇게···"


그렇게 생겨난 것이 쭉쭉 자라나더니 이내 왕국과 교국의 국경지대를 통과해 지금 우리가 자리하고 있는 성도까지 그 마수를 뻗쳤다.


"여기까지 잇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왕국에서 교국으로 직행하는 가상의 철도 라인을 하나 추가한 바이올렛이 이번에는 남부 쪽으로 뻗어있는 철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쪽도···"


전처럼 새로운 가지가 생겨나거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거의 국경과 맞닿을 기세로 쭉 뻗어있는 북쪽 철도하고는 달리 애매한 곳에서 끊어져있던 남부 철도가 쭉쭉 자라나기 시작하더니 그대로 대초원 안으로 진입했다.

"여기까지 이어주는 겁니다."


그렇게 펜 하나로 철도 연장 작업을 끝마친 바이올렛이 손에 꾹 쥐고 있던 것을 놓고는 레이시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모습이  '내 생각은 이런데  생각은 어때?'라고 묻는 듯했다.

철도 연장이라는 말만큼 쉽지 않은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거론해대는 바이올렛의 태도에 골이 지끈거리기라도 했던 것일까.

처음 생겨났을 때보다 더 다채롭고 길게 변한 선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레이시아의 얼굴 위로 쓴웃음이 내걸렸다.

"어디서부터··· 지적하면 좋을 지 모르겠네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몇 번이고 헛웃음을 흘리길 반복하던 레이시아가 지도를 향해 내던지고 있던 시선을 슬그머니 들어올려 바이올렛을 향해 내던졌다.


"다른 문제야 그렇다 치더라도··· 허가는 받으셨나요?"

"대초원 쪽으로 통하는 건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황입니다. 교국 쪽으로 통하는 건··· 아직 기회가 없어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지만 충분히 설득할 자신이 있고요."

그냥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저토록 자신있게 말하는  보면 어떻게든 교국을 설득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겠지.

'하긴···'


생각해보면 교국 측에서 거절할 이유가 없긴 했다.


왕국에도 여신교의 신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만큼 직행 철도가 뚫리게 되면 그만큼 교국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테니까.

그리고 그건 차지하고 있는 땅덩어리가 좁아 순례자들이 뿌리고 가는 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교국의 사정을 한결 나아지게 만들어줄테지.

각 교구에서 걷히는 헌금이 그대로 교국의 재정으로 치환된다고는 하지만 원래 돈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법이니 말이다.


"···비용은요? 이렇게 지도로 보면 얼마 안 되는  같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대공사가 될텐데요."


그래 결국 가장 중요한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철도를 연장하는데 들어가는 비용.

분명 적지않은 돈이 들어갈테니 나름 사정이 풍족한 편인 왕국으로서도 쉬이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일 터.


그런 의미로 던져진 레이시아의 물음에 바이올렛이 내놓은 대답은 간단했다.

"제국이, 아니 제가 내죠."

까짓거 내가 내면 되는  아니냐.


"대신 이 평야를 향후 100년동안 동맹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차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국이 아니라 동맹이란 말이죠?"


"네, 이 정도면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제안 아닌가요?"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딱히 쓸데도 없어서 소작이나 주고 있는 평야를 빌려주는 대신 교국으로, 대초원으로 직행할 수 있는 철도를 얻게 되는 셈이니까.

사이가 나쁘다면 직행하는 철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겠지만 리파가 있는 한 초원쪽하고는 이제 더는 치고 박고 싸울 일이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철도를 뚫어놓게 되면 그건 왕국에게 적지않은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줄게 될 터.

그래서일까.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한  생각해보죠."


어딘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레이시아는 생각 이상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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