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60)화 (359/366)



〈 36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식은 땀이 등골을 따라 삐질삐질 흘러내리는 느낌이 기이할 정도로 선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쩌어기 바이올렛의 손 안에 갇혀있는 것의 모습이 어째 남일같지가 않았으니까.

지금이야 팔걸이만으로 만족하고 있는  했지만 솔직히 저게 언제  머리통으로 교체될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그나저나 뭔 놈의 힘이···'

꽈악하고 움켜쥐니까 의자 팔걸이에 금이  갔다.


말만 들어보면 굉장히 쉬워보이지만 저건 어지간한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우리가 잠시 신세를 지고 있는 의자는 말이 나무지 사실상 돌덩어리마냥 딱딱한 목제를 되어있었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나름 정통 무투파라 할  있는 바이올라나 디아나도 저런  불가능하지 않을까.

틀림없이 그럴 거다.

저런 건 단련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아니, 얻을 수 있긴 할 것이다.

어느 정도 강골을 타고 났다는 전제 하에 몇 년동안 악력을 늘리는데만 치중한다면 아마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무슨 의자가 사과도 아니고···'


고동색을 띄고 있는 팔걸이에 쩌적쩌적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을 생각나게 하는 실금이 생겨나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헛웃음이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어째 보면 볼수록 바이올렛의 손아귀 안에 잡혀있는  팔걸이가 아니라 내 머리통처럼 느껴졌으니까.


물론, 나도  말은 있었다.

따지고 보면 새치기를 한 건 바이올렛이 먼저 아니겠는가.

내게 죄가 있다면 새치기를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느낀 이들의 투정을 온몸으로 받아낸 죄밖에는 없었다.

 말을 한다고 바이올렛이 '그래, 그렇구나.'하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것같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것을.

아무튼 그렇게 남몰래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려니 죄없는 팔걸이를 상대로 화풀이를 하고 있었던 바이올렛이 왼편에 앉아있던 바이올라의 신호를 받고 몸을 살짝 흠칫했다.


"아, 이런··· 워낙 생각치도 못했던 말이라서 놀란 마음에 실수를 해버렸네요."


바로 조금 전까지 팔걸이를 작살내고 있었던 사람하고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운 바이올렛이 싱긋 웃으며 팔걸이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그런 그녀의 몸짓에 맞춰 팔걸이에 구멍을  기세로 힘이 바짝 들어가 있던 손가락 끝에 묻어있던 나무 부스러기들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의자가 좀 부실하네요."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것을 의자 탓으로 돌린 바이올렛이 이내 레이시아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안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셨지요?"

"예."


"실례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정도로 실력이 뛰어난 의사가 있다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해서라도 미리미리 안면을 터두고 싶어서요."


라고 말하며 레이시아를 향해 싱긋 웃는 바이올렛의 말을 번역해보자면···

'구라까고 앉았네. 너같으면 그 말을 믿겠냐? 어디서 개수작이야?'


쯤 되지 않을까.

물론, 레이시아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슬프네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리 말하며 보는 내가 다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로 처연하게 시선을 내리깐 레이시아가 바이올렛의 눈썹이 꿈틀꿈틀 경련하는 타이밍에 맞춰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 왕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같은 것인지라 하나하나 세세하게 밝히긴 힘들지만 저와 디아나의 뱃속에는 확실히 이안의 아이가 자리하고 있답니다."

이 타이밍에 가불기라니.


왕가에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법이라는데 그게 뭔지 오픈하라고 하면 얼마나 실례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어디 어떤 말을 지껄이나  번 보자는 식으로 레이시아의 얼굴을 지그시 노려보고 있던 바이올렛의 볼이 파르르 경련했다.


그것도 잠시, 뒤늦게 레이시아의 말이 뭔가 좀 이상하다는 걸 깨닫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얼굴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허나 바이올렛이 입을 여는 것보다 눈앞의 기싸움이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마냥 바이올렛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있던 리파의 입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왕녀여,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그대 뿐만이 아니라 그대의 옆에 앉아있는 기사또한 이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정확하게 들으셨네요."

그리하여 마침내 디아나의 임신사실또한 공개된 순간 바이올렛의 시선이 내쪽으로 홱 돌아왔다.

레이시아를 노려볼 때보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일단 이것부터 어떻게 한 다음에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기르던 강아지를 납치당한 킬러의 눈빛이 저러했을까.

아무리 그래도 설마 죽이기야 하겠냐만은 그 직전까지는 가게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살벌한 것이 얼굴을 난도질해댔다.


그렇게 바이올렛이 절찬리에  노려보고 있던 순간, 레이시아의 대답을 듣고는 '흐음···'하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고심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던 리파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 위로 미소를 띄워보였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연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호쾌한 미소였다.


"그것 참··· 경사로군."


이윽고 리파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간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다름아닌 물음표였다.

그야 그렇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화를 내도 모자랄 상황에 저렇게 기쁜  미소를 짓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았을테니까.

그래서 살짝 벙찐 표정을 하고 있는 둘을 상대로 리파가 크게 부풀어오른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동기가 벌써 셋이라니 이 아이가 외로움을 느낄 일은 없겠어."


그리 말하는 리파의 모습이 어땠냐하면··· 마치 이미 정실자리를 꿰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포용력있고 너그러운 정실이 첩들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너그럽게 미소를 짓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보아하니 리파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리파의 목소리에 반응에 그녀쪽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그에 비해 바이올렛은 어땠는가 하면···


'어?'


생각외로 잠잠했다.

그녀의 얼굴 위에는 예상했던 분노도, 어이없어하는 반응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태연한 얼굴로 제 앞에 놓여져있는 찻잔을 집어들어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을 호록하고 들이키고 있을 뿐.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원래라면 절대 손을 잡을 리 없는 둘이 어찌하여 같은 편이   있었던 건지를.


'그걸··· 양보했다고?'


정실자리를?


남녀의 정조관념이 뒤바뀐 세계인지라 정실이니 뭐니하는 이야기는 오직 남자에게만 통용되는 이야기긴 했지만, 그래도 서열상 어느 쪽이 우위라는 문제는 상당히 민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앉은 이들의 신분이 하나같이 어디가서 빠지지 않는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랬다.


하물며 바이올렛은 내게 어마어마한 독점욕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우선순위를 리파한테 양보할 줄이야.

생각치도 못한 결단이었고, 그렇기에 더 얼떨떨했다.

뭐, 리파가 바이올렛의 손을 잡게 된 건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과 더불어 바이올렛의 간곡한 설득이 있지 않았을까.

보나마나 지들끼리 똘똘 뭉칠게 분명한 왕국 출신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왕국 출신이 아닌 이들끼리 손을 잡고 왕국 출신들에게 대항할 필요가 있다고 리파를 설득하지 않았을까.


리파로서도 그런 바이올렛의 제안을 사양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내가 초원에 적을 두고 있는 유목민족들과 몇백 년에 걸쳐 투닥투닥해왔던 왕국 출신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을텐데 그런 상황에서 제국의 황녀씩이나 되는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인정해주겠다고 말하며 손을 잡자고 먼저 제안을 해온 격이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쉬이 허락해주지 않을 게 분명한 이들에게서 허락을 따내기 위해서라도 손을 잡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겠지.

'그랬구만··· 그래서···'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얼굴 가득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내비치고 있던 레이시아가 이내 '하···'하고 한숨인지 코웃음인지  수 없는 것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꼭 마치 이미 이안하고 결혼한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그런가? 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한다만."

"무, 뭐라구요?"

"초원에서는 첫째를 낳은 여자가 우선권을 가지지. 그리고 이는 초원 밖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은 것 같더군."


다른  몰라도 그 말만큼은 팩트였다.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길래 대체 어떤 구조로 돌아가나 싶어서 알아봤을 때 봤던 것에 따르면 첫째를 낳은 여자가 그 남자에 대한 최우선권을 갖게 되는 게 보편적이라 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첫째를 낳게 되면?


그때부터는 남자의 이런저런 요소에 간섭할 자격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남자가 또다른 여성과 교접하는데 간섭할 수 있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귀족 여성들은 누군가와 혼인했을 때 첫째를 낳는  가장 중요시 여기곤 했다.


그래야 혼인한 남성을 이용해 귀족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맥'을 넓힐 수가 있으니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보편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남자가 자신의 첫째를 낳아준 부인보다 훨씬 지체높은 이와 엮이게 되면  우선순위가 뒤집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기에 그게  절대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되었건 보편적으로 그런 건 맞았기에 레이시아는 자신의 권리에 대해 주장하는 리파를 상대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옆을 지키고 있던 디아나또한 마찬가지였다.

입술을 꼬옥하고 깨물고 있는 둘과는 달리 지금 오가는 이야기는 자기하고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차를 홀짝거리는 바이올렛의 모습은 확실하게 대비가 되었다.


'그래도 서열 2위는 확보했다 이건가···?'


아니, 꼭 서열 2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 식으로 여유롭게 앉아있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 우선순위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지켜질까하는 생각이.

동생에게서 날 빼앗기 위해 단 하나뿐인 동생을 굴복시키기까지 했던 사람이 바로 바이올렛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가 이토록 쉽게 최우선이라는 자리를 포기한다고?

솔직히 말이 되질 않았다.

그러니 분명 뭔가 다른 꿍꿍이 속이 있는  분명했다.

이를테면 일단 결혼부터 해서 빼도박도 못하게 기정사실을 만들어버린 다음에 바로 그때 어떤 방법을 써서 우선순위라는  뒤집어버린다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있을수록 말조심을 해야하는 법이니 스스로가 내뱉은 약조같은 걸 어지간하면 지키는 게 정상이지만 상대가 그 바이올렛이다보니 왠지 모르게 그 가능성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뭔가 꿍꿍이속이 있어보이는 바이올렛의 모습을 힐끔거리고 있으려니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레이시아의 입에서 한숨 비스무리한 게 새어나왔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직감했다.

레이시아가 일단은  발자국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는 것을.


'하긴··'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신한지 얼마 안 된 그녀와는 달리 리파는 누가봐도 출산이 임박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러니 더더욱 명분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을 터.


"그래서 당신의 청을 허락한다 치면  다음에는 어떻게  생각입니까?"

"그야, 당연히 이안과 결혼부터 해야겠지.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왕국은 이안을 다른 곳으로 보낼 생각따위 없습니다."

역시나 그 점을 가장 우려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리파가 무어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일단 쐐기부터 박아버리는 걸 보면.


그리 말하는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단호함  자체였기 때문일까.

말을 하다 말고 순간 흠칫했던 것도 잠시, 리파가 레이시아를 향해 살폿 웃었다.

"왕녀여."

"말씀하시죠."


"아무래도 그대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는 것이다만··· 애초에 난 이안을 대초원으로 데려갈 생각따위 해본 적 없다만."


쓴웃음과 함께 내뱉어진 그 한마디에ㅡ


"···네?"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꼭 마치 그건 또 뭔 소리냐고 되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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