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미친 년.
신이라고 불리우는 존재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라 보기에는 너무나도 상스럽고 천박한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성녀의 몸을 빌려 잠시 지상으로 강신한 여신을 바라보는 진의 눈가가 꿈틀하고 경련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신의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했다.
그 말대로였으니까.
자신은 미쳤다.
언제부터 그리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사실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세상또한 미쳐버렸으니까.
마침내 대륙 전역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 마족에게 있어 살아남은 인간이란 노예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아니, 차라리 노예 취급이라도 받았다면 사정이 한결 나았을 것이다.
마족들에게 있어 살아남은 인간들은 장난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키는대로 가지고 놀다가 망가져버리면 쓰레기통에다가 휙 던져버리면 그만인 싸구려 장난감 말이다.
어미가 자식을 잡아먹고, 아비가 딸의 구멍을 범하는 광경은 그 세계에서는 일상에 불과했다.
마족이란 족속들의 욕망은 어딘가 잔뜩 뒤틀려있어서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절대 벌어지지 않았을 행위가 아무렇지도 않게 강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쳐버린 세상 속에서 기존에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던 이들은 가중처벌이라도 받듯 더 험한 꼴을 겪게 되었다.
고고했던 여왕은 숫퇘지의 반려가 되었으며, 자신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 몸을 불살랐던 기사들은 자신이 지키려 했던 이들에게 부인이나 딸, 혹은 연인같이 소중한 이들이 범해지는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런 행위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어졌으니 아무리 단단한 정신을 지니고 있다 한들 결국에는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이들이 어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 분께서도 마신이라는 작자에게 억지로 범해지며 피조물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치욕을 버티지 못하셨었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 남자'를 향한 복수에 이토록 집착하게 된 것도 그 영향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멈출 생각은 없었다.
이제와서 돌이키기는 늦었을 뿐더러 그런 것이라도 없다면 영영 멈춰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신께서 본인의 존재까지 희생해가며 수렁 속에서 건져주신 목숨이다.
그리 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움직일 것이다.
움직여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설령 그렇게 나아가게된 방향이 남들의 눈에는 잘못된 방향일지라도.
눈앞에 있는 존재의 말에 무어라고 대꾸하는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던 것은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어차피 그 세계에서 벌어졌던 참상에 대해 말을 한들 눈앞의 존재에게는 흥밋거리조차도 되지 못할 게 뻔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여신이 성녀의 특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흐음···'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이쪽을 힐끔힐끔대는 것이 꼭 자신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이쪽이 마음을 졸이기라도 바라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눈앞에 있는 저것을 끌어들이지 못하면 계획을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건 맞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의도대로 놀아나주긴 싫었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랬더니ㅡ
"쯧··· 재미없기는."
여신 쯤되는 존재의 행동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가볍게 혀를 찬 그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도와줄게. 보아하니 딱히 내게 손해가 될만한 것도 없는 것 같으니까."
그야 그렇겠지.
절대 그리 되도록 만들진 않을테지만 만에 하나 계획이 실패하게 되면 그에 대한 손실을 떠안게 되는 것은 다름아닌 이쪽의 둘이니까.
저쪽에게까지 영향이 갈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확실히 준비는 된 거야? 그게 말만큼 쉽지가 않을텐데."
"그 누구보다 뛰어난 제 동료가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녀의 실력에 대해선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애초에 비교할 대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이니까.
그리 보면 그녀를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죄책감으로 무너지지 않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그녀를 이쪽의 계획에 가담하게 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일 이후로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런 그녀를 꼬득여서 자신을 돕도록 했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자신이 부탁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것에 매진하고 있을테지.
그리 보면 그 남자의 곁에 여자들이 많은 게 참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적극적으로 달라붙어오는 이들을 신경쓰느라 바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자연스레 소홀해지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그리고 자신이 그 틈을 노려 찌르고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것이고 말이다.
"그럼, 얼추 이야기가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자리를 정리하시죠."
상대방의 허락도 받아냈겠다 더는 이 자리를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지금부터는 이 자리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위험했다.
혹시라도 누군가 성녀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기라도 하면 그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으니까.
"흐음, 그래···"
입술을 삐쭉 말아올리며 한 차례 웃은 여신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렸다.
그와 함께 방 안을 무겁게 채우고 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돌아갔구나.'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더이상 여신이 아니라 그녀를 모시는 성녀겠지.
"그러면 변동이 생기는대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뒤늦게 자기보다 훨씬 드높은 격을 지닌 이의 영혼을 몸에 받아들인 후폭풍이 몰려오기라도 한 것일까.
손으로 이마를 꾸욱하고 누른 채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고 있는 성녀를 뒤로한채 먼저 그곳을 빠져나왔다.
보아하니 진정이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 했으니까.
그렇게 은신처 겸 회합장소로 쓰기 위해 마련한 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아까 성녀에게 단장이라 불렸던 이와 딱 마주치게 됐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을 향해 눈을 부라리는 그녀의 옆을 지나쳐 골목을 향해 몸을 던졌다.
성녀, 아니 여신이 이쪽에 가담함으로써 필요한 조각들은 모두 모인 상황.
고로 이제 남은 건 혹시라도 들키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면서 계획을 실행하기에 적당한 때가 도래하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분명 그리 오래 이야기한 것같지도 않은데 일부러 애매한 시간대를 택해 상대방을 불러냈기 때문일까.
어둠 속에 푹 잠겨있던 골목을 빠져나오니 어느새 바깥에는 동이 트고 있었다.
밤이 되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드는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숙소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 식으로 지난 밤동안 수상하기 그지없는 회합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이안은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자신을 기준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눠앉은 이들의 모습을 살피기 바빴다.
왼쪽은 말할 것도 없이 레이시아와 디아나를 필두로 한 왕국 출신들이었고, 오른쪽은 예상했던대로 바이올렛과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손을 잡는 걸 택한 리파를 포함한 제국, 초원 연합이었다.
'음..'
째릿하고 상대방을 노려보는 양측의 분위기가 자뭇 살벌했다.
덕분에 졸지에 둘 사이에 끼게된 나로서는 그저 난감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ㅡ
"그럼, 어제에 이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할까요?"
먼저 포문을 열어젖힌 건 의외로 레이시아였다.
"어제 뭐라고 하셨었죠?"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바이올렛도 만만치는 않았다.
레이시아의 물음에 입술을 삐죽 말아올린 채 그리 말하는 것이 꼭 '진짜 기억이 안 나는 거냐. 아니면 그냥 기억하기가 싫은 거냐.'라고 비꼬는 듯 했으니까.
"저와 대족장이 왕녀'님'께 이안과의 혼인을 허하달라 청했던 것 같은데요."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 직접 말해주겠다는 것처럼 바이올렛이 입술을 삐뚜름하게 말아올린 채 그리 말했다.
리파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기 때문일까.
그런 그녀의 태도는 전보다 더 거침이 없었다.
하긴, 그녀 입장에서는 쫄릴 이유 자체가 없겠지.
바이올렛 입장에서는 어찌보면 그 무엇보다도 위협적인 상대를 같은 편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셈이니 말이다.
그에 비해 나와 비교적 오래 전부터 알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 소식조차 없는 레이시아나 디아나같은 이들은 그녀에게 위협조차도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상황이 그녀가 아는 그대로였다면 말이다.
자신처럼 특수한 능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레이시아나 디아나가 고작 하룻밤만에 상황을 바꾸긴 어려울 거라 판단했던 모양인데ㅡ
얼마든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게 보통이니까.
레이시아가 어디선가 배란유도제 비스무리한 것을 테이크아웃 해오지만 않았다면 필시 그렇게 되었겠지.
그래서일까.
상황이 어제와 같았다면 분명 고운 눈썹을 꿈틀꿈틀 거리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을 게 분명한 레이시아가 오늘따라 유난히 잠잠했다.
그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기라도 한 것일까.
레이시아의 것을 대신해 바이올렛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 그랬죠. 분명 혼인을 청했던 까닭이 뱃속의 아이를 아비도 없는 아이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던가요?"
여유로울 수가 없는 상대방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
그에 대한 의구심을 차마 지울 수가 없었던 모양인지 다시 한 번 눈썹을 꿈틀하고 떤 바이올렛이 이내 내쪽으로 시선을 휙 던져왔다.
그것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레이시아 쪽으로 눈을 돌린 그녀가 비뚜름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정확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 말대로입니다. 그러니ㅡ"
"어제는 그리 공감하지 못했는데 확실히··· 다시 들어보니 공감이 되는군요."
"···?"
'이렇게 순순하게 인정할 리가 없는데?'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떠오른 순간,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이기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레이시아가 슬그머니 자신의 배에 손을 올렸다.
그러더니 그 안에 있는 무언가의 안위를 살피기라도 하듯 조심조심 스스로의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자애롭기 그지없는 표정은 덤이었다.
솔직히 그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표정을 한채 스스로의 배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레 그곳을 쓰다듬는 레이시아의 모습은 누가봐도 아이를 품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허나 바이올렛으로서는 그 사실을 쉬이 믿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기사···'
하루를 꽉 채운 것도 아니고 그래봐야 한나절 정도인데 고작 그 시간만에 그 전까지는 아무리 해대도 소식조차 없었던 아이가 덜컥 들어섰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을테니까.
뿐만아니라 그 사실을 확인할 수단도 마땅치 않다고 생각했겠지.
그녀야 몸에 흐르는 피 덕분에 임신하자마자 그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지만 레이시아는 그런 것도 아니니 말이다.
당연히 믿기 힘들었을 것이고, 연기라고 판단한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겠지.
그래서일까.
삐쭉하고 말려올라간 입꼬리가 자뭇 살벌했다.
"···그 말씀은 꼭 왕녀님께서도 이안의 아이를 가진 것처럼 들리는군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말아올린 바이올렛은 '고작 몇 시간만에 그게 가당키나 하느냐?'라고 말하는 느낌으로 레이시아를 비웃고 있었다.
그럼에도 레이시아는 울컥하지 않았다.
울컥하지 않고ㅡ
"어머, 어떻게 아셨나요?"
오히려 미소로 맞받아쳤다.
진심으로 놀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기까지 해가면서.
그 표정에 열이 확 뻗쳤던 것일까.
빠직ㅡ
'어우···'
바이올렛의 손을 떠받치고 있던 의자의 팔걸이 부분에 거미줄같은 실금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