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58)화 (357/366)



〈 35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하고 막힐 정도로 농도 짙은 신성이었다.

빌려온 것으로는 절대 낼 수 없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어깨를 짓눌러왔지만 진은 오히려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누군가 어깨를 꽉 움켜쥐고는 그대로 잡아누르고 있는 듯한  감각이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였으니까.


눈앞에 있는 존재는 더 이상 성녀가 아니었다.


성녀의 탈을 뒤집어 쓴 무언가였다.


"하···"


가볍게 내쉰 한숨소리에는 짜증이라는 감정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래서일까 전과는 비교할  없을 정도로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제 주인의 감정에 반응해 웅웅하고 사납게 진동했다.

 소리가  적을 향해 날아드는 벌떼 소리같다고 진은 생각했다.


신성력은 기본적으로 치료와 방어에 특화된 힘이지만 그렇다고 그걸 누군가를 공격하는데 써먹지 못한다는 건 분명 아니었다.


전투사제라는 직종이 괜히 있겠는가.

경지에 오른 전투사제가 펼치는 신성마법은 어지간한 마법사가 내는 화력을 가뿐하게 웃도는 편이다.


하물며 신성력을 다룸에 있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지녀야 앉을  있는 성녀의 자리에 올라있는 이의 몸을 이용해 여신이 직접 펼치는  어떻겠는가.


신에게 있어 신성력이란 수족과도 같다.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기에 만약 여신이 누군가를 해치우고자 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그녀의 몸에서부터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것은 순식간에 칼로 변해 여신의 적을 난도질하겠지.

그러니 여기서 조금이라도 말을 실수한다면 지금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수백 개의 비수로 변해 그대로 이 몸을 난도질해대고, 목을 꿰뚫어올 것이다.

생존에 대한 갈망은 생물체의 본능이니만큼 살아있다면 긴장이  될래야 안  수가 없는 상황.

그럼에도 진은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그건 절대 비웃음 따위가 아니었다.

진심 가득한 웃음.

그것이 진의 입가에 맴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하고 있었으니까.


금방이라도 달려들어서 목을 조르고 꺾고, 부숴버릴 것만 같은 농도 짙은 기운의 압박이 그녀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만 넘긴다면, 이 순간만 잘 넘긴다면 마침내 원하는 것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까지 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던가.


용사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음에도 본인의 의무를 저버리고 도망치길 택한 용사에게도, 그때 그녀를 팽하길 택했던 교단의 고루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들에게도 모두 그에 걸맞는 복수를 해주었으니 이제 남은 건 파르암 백작, 아니 이안 뿐이었다.

어떻게 복수하면 좋을지는 이미 생각해뒀다.

죽을 때마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이에게 과연 어떤 벌을 주어야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해결하는  결코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찌어찌해냈다.


그또한 주신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그 분께서는 새로운 세상에 가거든 다 잊고 행복한 삶을 살라 하셨지만 어찌 그러겠는가.

이미 겪은 것이 있고, 본 것이 있는데.


그리고 그 기억들은 영영 지워지지 않을 문신처럼 자신의 영혼 자체에 새겨져있었다.

이쪽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불쑥불쑥 떠올라 자꾸만 괴로움을 느끼게하는  질척질척한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그 남자가 절망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리하여 연합군이 무너졌던 그날 자신이 배에 든 것을 모두 쏟아내며 죽어있는 그 남자의 시체를 보며 떠올렸던 말을 그 남자가 떠올리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신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행복으로 향하는 길이라   있었다.


"···부르는  같아서 나와줬간만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지?"

"아, 죄송합니다. 설마 직접 나오실 줄은 몰랐기에··"


"그토록 대놓고 나오라고 요구해놓고는 나올 줄 몰랐다?"


뒤집어 쓰고 있던 베일이 답답하기라도 했는지 턱만을 살짝 남겨둔 채 길게 드리워져 있던 회색의 천을 성녀가, 아니 여신이 거칠게 쓸어올렸다.

그와 함께 드러난 그녀의 얼굴에는 순진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뚜름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그래, 뭐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디   들어나 보자꾸나."

비뚤게 말려올라간 것하고는 달리 눈만큼은 지독하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무감정했다.


아니, 무감정한 것을 뛰어넘어 저것이 살아있는 것이  수 있는 눈빛이 맞는지 의문조차 들 정도로 무기질적이었다.

그런 눈을 한채 물끄러미 진을 바라보던 여신이 이내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래서 대관절 네 정체가 무엇이더냐."

여신의 입매가 조금 더 비틀렸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존재할 리 없는 다른 신의 힘을 몸에 품고 있는 것이지?"


답을 구하는 여신의 목소리는 어찌보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같기도 했다.


"내 세계에 속한 피조물이 분명하거늘 들여다볼 수 없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흐음··'하고 흥미와 의문이 반씩 섞인 소리와 함께 내뱉어진 그 말에 진은 잠시 고민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는  좋을지 아니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고민을 하다보니 새삼 깨닫게 되었으니까.

한가하게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지금이야 시선이 모조리 이안 쪽으로 몰려있어서 그렇지 만에 하나 성역을 굳건히 지키고 있어야할 성녀가 자리에 없다는 사실을 누군가 눈치챈다면 그 소식이 그 남자의 귀로 들어가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일테니까.


전생에서 보여주던 위용은 대체 어디다가 팔아먹었는지 여자들 사이에서 놀아나기 바쁜 그 남자지만 그래도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딱 한 번 적이 되어보기도 했고, 그 뒤로  번이나 같이 싸워봤기에 알고 있었으니까.


그 남자의 위기감지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리고 적이라고 단정지은 이를 상대할  얼마나 집요하고 잔혹하게 변하는 지를.


애초에 잔혹함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족들조차도 그 남자를 상대할 때면 그 집요함과 잔혹함에 몸서리를 쳐대지 않았던가.


그러니 방심해서는 안 됐다.


발톱하고 이빨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맹수가 맹수가 아닌 건 아니니까.

설령 발톱하고 이빨이 전부 빠진 상태라고 해도 그렇다.

그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서 생을 영위할 정도라면 발톱하고 이빨 없이도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터득했다는 소리니까.

"□■어."


금기나 다름없는 그 이름을 입에 담았던 것은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눈앞에 있는 여신에게 제대로 닿을  있도록 힘을 줘서 또박또박 말했건만 그럼에도 입밖으로 흘러나온 것은 분명 스스로 말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하기 그지없는 소리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효과가 있었다.

어딘가 심드렁해보이던 성녀, 아니 여신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리는 걸 볼 수 있었으니까.


"···네가 어떻게  이름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던 것도 잠시, 여신의 표정이 대번 사나워졌다.

그 모습이 꼭 역린을 자극당한 드래곤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죽고 싶거든 혼자 죽을 것이지 지금 감히 누굴···!"

연기가 아니었다.

그런 여신의 감정에 부응하듯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사납게 일어나 목을 졸라오기 시작했으니까.


"컥···!"


마치 수십명이 동시에 목을 조르는 듯한 감각에 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목졸린 소리를 냈다.

"자격도 없는 주제에 감히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그럼에도 목을 조르는 손길은 약해지기는 커녕 강해지기만 했다.


이대로 숨통을 끊어버리고 말겠다고 속삭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을 꽈악하고 조여오는 그 손길에 진은 다급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자격, 있···!"


목이 졸리고 있는 탓에 제대로 된 말은 내뱉을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콰악하고 목을 졸라오던 것이 살짝이지만 느슨해졌으니까.


"컥컥··!"

그러더니 이내 완전히 흩어졌고, 그와 함께 목구멍 안으로 훅 빨려들어온 공기에 진은 시야가 핑 도는 걸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자격이 있다? 네게?"

이쪽의 사정따위는 상관없다는 듯 곧바로 던져진 질문에 쓴웃음부터 나왔지만 목을 손으로 살짝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낱 필멸자에 불과한 네게?"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지 않은 게 그 무엇보다도 뚜렷한 증거 아니겠습니까."

"하··"

"저는 제가 모시던 신께 '자격'을 위임받았습니다."


"그래, 이제 알겠네."


이제서야 품고 있던 의문이 해결되었다는  여신이 입꼬리를 쓱 말아올렸다.

"왜 들여다볼  없나 했더니·· 너 찌꺼기였구나?"

 말을 들은 순간 배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왔지만 진은 조심스레 그것을 내리눌렀다.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으니까.


"어쩐지·· 순도가 높은  치고는 품고 있는 양이 형편없을 정도로 적더라니··"


흥미로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다시  번 사람을 울컥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참았다.


"하긴 신앙을 받쳐줄 신도가 없을테니까 당연한 일이려나?"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찌꺼기야."

빙글빙글 웃는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다는 욕망을 꾹 참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당신께서는 당신의 딸과 이안이라는 사내가 맺어지길 원하시지요."


"맞아. 정확히 말하면 필요한 건 임신하는데 쓸 씨 뿐이지만."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가축으로 보는 듯한 태도가 자신이 모시던 분하고는 사뭇 달라서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또 한 번 꾹 참고 말을 이었다.


"예언 때문인가요?"


"잘 아네. 그래도 이 세계에  하나뿐인 신을 모시는 종교인데 지금처럼 골골거려서야 되겠어? 구원자를 배출하면 분명 예전과 같은 성세를 자랑할 수 있겠지."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겠죠.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대가는?"


곧바로 훅 치고 들어온 질문에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라는 작자가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대가에 대해 물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그런 자신의 반응이 우습기라도 했던 것일까.


쿡쿡하고 웃는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니? 아니면 혹시 무료로 봉사라도 하려고 그랬니?"


"그리 말씀하시니 말하겠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 도움? 흐음··"

"딱 한 번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신 정도 되는 존재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래,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니만큼 앉은 자리에서 세계의 모든 것을 굽어볼 수 있을테니까.


그러니 그거 하나 붙잡아서 건네주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겠지.


"일단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도록 할까?"

눈앞에 있는 존재를 신용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득이 우선인  했으니까.

그렇기에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을 경우 여신이 성녀의 입을 빌려 이쪽의 계획을 이안 쪽에다가 밀고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차마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의 속내를 읽기라도  것일까?

"왜? 못 말하겠니? 내가 이 아이의 입을 빌려 네 계획이라는 걸 저쪽에가서 쪼르르 털어놓기라도 할까봐?"


이쪽의 본심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말이 성녀, 아니 여신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그렇다고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침묵하고 있었더니ㅡ


"신의 이름으로 맹세할게. 설령 일이 틀어진다 해도 오늘 들은 건 어디가서 발설하지 않도록 하지. 아, 물론 이 아이에게도 입단속을 시킬 거고."


"····"


"자, 됐지? 그럼 어디 한  들려줘봐. 그 계획이라는 거."

눈앞의 존재가 대체 어떤 부분에서 흥미를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ㅡ


신이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했는데 굳이 사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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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거기까지가 저희의 목표입니다."

몇 가지 부분만 제외한채 '계획'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러자 여신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너·· 생긴 거하고 다르게 제대로 미친 년이었구나?"

사실상 헛웃음에 가까운 실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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