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ㅡ"
언제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냐는 듯 처음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처럼 얼굴을 무표정하게 고친 진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 세계에서는 본인의 이름보다 성녀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여자.
이쪽을 경계하듯 딱딱하기 그지없는 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때가 그리 묻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순수한 여자.
한때 자신도 저랬더랬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긴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할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같은 느낌 때문일까.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상념이 머릿속으로 휘몰아쳤다.
그 탓에 말꼬리를 늘어뜨리고 있던 것도 잠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비웃음에 가까운 것을 얼굴 위로 띄워올린 진이 하던 말을 이어나갔다.
"죄송하지만 좀 협조해주시겠습니까? 저는 앞으로 나누게 될 이야기를 성녀님과 성녀님이 모시는 그분 외에는 알지 못했으면 해서요."
소리가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해줄 수 있겠느냐.
조심스레 전해진 진의 부탁에 베일 아래에서 눈살을 살짝 찌푸리고 있던 것도 잠시, 성녀가 허공에 대고 슬그머니 손을 휘저었다.
그런 그녀의 손짓에 부응하듯 성녀의 몸으로부터 말간 빛이 꾸물텅 흘러나왔다.
그렇게 흘러나온 것들이 집안 곳곳으로 스며드는 모습을 보며 진은 내심 감탄했다.
그래도 성녀라는 직함을 내걸고 있는 만큼 분명 기본 이상은 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니 멀리서 얼핏 느꼈던 것하고는 궤를 달리하는 신성이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몸에 깃들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을까.
저 정도면 단순히 연락책 수준이 아니라 여차할 때 직접 지상으로 강신할 수 있는 화신체 수준이었다.
그 사실이 진은 너무나도 기꺼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모처럼 기쁨을 느꼈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능력이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계획의 성공률또한 높아질테니까.
"귀찮으실텐데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쁘게 보여서 좋을 게 없었기에 솔직하게 감사를 전했건만 눈앞의 성녀는 기껏 건넨 감사인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팔짱을 끼어 펑퍼짐한 법복 위로도 확실하게 도드라져 있던 두 개의 풍만한 언덕을 꾸욱하고 누른 성녀가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할 말이라는게 뭐죠? 제안은 또 뭐고요."
관심은 없지만 일단은 들어는 보겠다고 말하는 것치고 성녀의 표정은 상당히 관심이 많아보였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자신이 모시는 신이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이안, 아니 '그 남자'와 동침을 해야할텐데 옆에 쟁쟁하기 그지없는 여자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그런 일이 쉬울 리 없으니까.
제국의 황녀 자매에다가 왕국의 왕녀, 그리고 초원의 대족장, 거기에 디아나와 앨리스까지.
자신에게 협조하기로 한 이들을 빼더라도 여섯 명이었다.
이미 남자 한 명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숫자인데 거기서 경쟁자가 더 늘어나는 상황을 '그 남자'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여성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까.
'깨끗한 척, 관심없는 척 하더니.'
과거, 그러니까 좀 많이 이상한 이 세계로 탈출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 진은 다시 한 번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피식하고 웃었다.
눈앞에 있는 성녀를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만큼 우스웠으니까.
아주 가끔 성욕을 풀기 위해 창녀를 안을 때 빼고는 여자한테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남자가 설마 여덟이나 되는 여성들과 그토록 긴밀한 관계를 맺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과거의 그를, 아니 전생의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믿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꽉 막히고 맹목적인 남자였으니까.
오죽하면 사람들이 그를 용사라는 얼도당토 않은 호칭으로 불리웠던 놈팽이와 엮기까지 했겠는가.
물론, 그건 그에 대해 잘 모르기에 지껄일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그 남자'가 '그 놈'을 바라볼 때 그런 눈빛을 할 리가 없으니까.
딱 거기까지 생각하니 자연스레 '그 남자'에 대한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아르투르 파르암.
파르암 백작가 출신.
삼남이었으나 장남과 차남의 급사로 백작위를 잇게 된 남자.
그가 파르암 백작위를 잇게 되었을 때 많은 이들이 우려를 표했다.
어렸을 적부터 뛰어난 무재를 지닌 걸로 이름을 날렸던 제 형들과 달리 그는 성질도, 몸도 유약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반푼이라고 불렀겠는가.
그렇기에 마대륙과의 국경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파르암 백작가가 무너지도록 내버려두느니 황실 측에서 그곳을 관리하길 청하는 상소가 날마다 줄을 이을 정도였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파르암 백작령과 맞닿아있는 영지의 영주들이 보낸 것들이었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방파제 역할을 해주던 파르암 백작가가 무너지는 순간 다음 차례는 자신들이 되리라는 걸 그들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테니까.
그런 사람들의 우려에 부응하기라도 하듯 영역다툼에서 밀려난 마대륙의 종자들이 파르암 백작령으로 들이닥쳤고ㅡ
'다 죽여버렸지..'
그것도 그냥 승리한 게 아니었다.
단신으로 마졸들로 이루어진 군세를 돌파한 다음 적장을 단번에 찔러죽였다고 했으니 그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다.
상급 마졸만 되어도 어지간한 기사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무위라는 말보다는 신위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활약이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비관적인 예측을 단번에 뒤집으며 스스로의 이름을 알린 '그 남자'는 그 때부터 마족들이 쳐들어오는 족족 직접 군을 이끌고 나가 모조리 쳐죽이곤 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마대륙의 영역까지 파고 들어가 국경 너머에 자리하고 있던 마족의 부락을 싸그리 불태워버리기도 했다.
그때 그와 함께 출정했던 병사들이 돌아와서 퍼뜨린 소문 때문에 한때는 그가 형제들을 모두 잃은 슬픔으로 미쳐버렸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마족들을 쳐죽이며 유명세를 확보한 그 남자는 '그 새끼'가 신탁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전까지 고수하던 태도를 집어던지고 이례적으로 후견인을 자처하기도 했다.
과거에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런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남자도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
그래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새끼가 자신을 덮치려다가 실패해서 재판에 회부되었을 때도 어쩔 수 없었을 거다.
용사는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꼭 필요한 조각이었을테니까.
그게 없으면 지금까지 열심히 퍼즐을 맞춘 이유가 없어질테니 챙길 수밖에는 없었겠지.
이해한다.
이해하지만ㅡ
용서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챙겼던 것이 바닥에 떨어졌다는 이유만으로 그토록 쉽게 나머지 모든 것들을 포기해버린 그 남자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실상 희망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용사가 전선에서 도망친 시점에서 연합군의 붕괴는 필연이나 다름없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순식간에 무너질만한 집단은 절대 아니었다.
총사령관 자리에 앉아있던 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이 병사들 사이로 들불처럼 퍼져나가지만 않았어도 다들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는 일은 없었겠지.
만약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대신 동요하는 군대를 다독이며 전선을 뒤로 물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것이, 심지어는 자신이 모시던 그 분의 존재마저도 전부 끝나버린 지금 그런 가정을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연합군이 무너진 후의 세계는 그만큼 끔찍했으니까.
마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생명체들은 그들의 노예가 되었으며 심지어는 자신이 모시던 그 분마저도 스스로를 마신이라 칭한 괴물의 노리개로 전락해버리고만 세상은 정말로..
끔찍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려하는 것만으로도 의식이 아득해질 정도로.
그렇게 영원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치욕 속에서 헤매던 자신을 구원한 건 다름아닌 그분이었다.
그때 자신을 감싸주지 못했던 게 한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희생하신 그 분 덕분에 끔찍하게 변해버린 세계를 탈출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생각치도 못했던 진실까지 전해듣게 되었다.
그렇기에 복수하길 원했고, 그래서 그 남자를 따라 이 세계로 왔다.
고로 자신에게 있어 복수는 선택따위가 아닌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하는 의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것의 완성을 도와줄 마지막 조각이 눈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할 수 있을까.'
무사히 저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마지막 조각이지만 다른 조각들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실패해선 안 됐다.
가장 중요한 부분이 텅 비어버린 것을 완성된 것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할 수..'
다시 한 번 되뇌이던 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할 수 있을까가 아니라 해내야만 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야만 했다.
이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저쪽 입장에서는 혹할 수밖에 없는 것 몇 개가 자신의 손 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한 개는 성녀의 뒤에 흑막처럼 버티고 있을 누군가라면 당연히 반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언제까지 서 있게 할 생각인가요?"
"아, 죄송합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고 말한 뒤 몸을 푸욱하고 담구고 있던 어둠 속에서 걸어나와 성녀를 마주보고 섰다.
"성녀님께서는 이안의 아이를 낳길 원하시죠."
이유야 뭐 안 봐도 뻔했다.
보나마나 여신이라는 이 세계의 주신이 시킨 것이겠지.
일전의 사건으로 인해 교국의 이름값이 땅에 처박혀버린 상황에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뿐이니까.
예언 속에 예비된 구원자를 배출하는 것, 그래 그것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입밖으로 내뱉기 무섭게 펑퍼짐한 법복으로 감싸여있던 성녀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가,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제 말이 틀렸습니까? 분명.."
살짝 말끝을 흐리면서 손가락으로 천장을 가리키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볼 수 있었다.
베일 아래로 살짝 드러나있던 턱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모습을.
"..지시가 내려왔을텐데요."
"방금 당신이 한 말이 그 분에 대한 모욕이 될 수 있다는 건 알고서 내뱉은 건가요?"
화를 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신실하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하지만 사제에게 있어 신이라는 존재는 부모 그 이상의 존재니까.
하물며 성녀 쯤 된다면?
신실함이야 이미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방금 그 발언은 사실상 면전에 대고 부모욕을 해댄 것 이상이겠지.
그러니 화가 날 수밖에.
그렇다고 말을 멈출 생각은 없었지만.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라면 그렇겠지요."
"하.."
"부정은 안 하시는군요."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리도 은밀하게 움직이나 했더니만."
고작 그 따위 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따라오게 만든 거였냐며 화를 내며 돌아서려 하는 성녀를 불러세웠다.
"그게 아니라 궁금해서 따라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그에 반쯤 돌아가있던 성녀의 몸이 그대로 멈칫했다.
"이를테면.. 제 정체같은 게 말이죠."
알고 싶지 않느냐.
딱 그리 말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성녀에게 변화가 일어났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농도 짙은 신성이 성녀의 몸으로부터 뿜어져나왔다.
한낱 인간이 품기에는 너무나도 크고 강렬한 존재감.
그렇기에 직감할 수 있었다.
노리고 있었던 이가 드디어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