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56)화 (355/366)



〈 35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 뒤로도 앞뒤를 가리지 않고 몇  더 해댄 이안과 앨리스가 서로 꼭 끌어안은  여운을 만끽하고 있던 그 시각.


누군가는 자신에게 전달된 은밀하기 그지없는 초대에 응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열심히 발을 놀리고 있었다.


점점 더 은밀하고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서 나아가는 선두의 움직임에 그 뒤를 따르던 둘 중에서 살짝 앞으로 나와있던 이가 그 자리에 우뚝하고 멈춰섰다.

덕분에 여성의 몸을 감싸고 있던 로브의 후드 부분이 슬며시 뒤로 젖혀지며 제법 찬란한 금발이 슬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드러난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대체 어디까지  생각이지?"

참다참다 못해 말을 꺼낸 사람마냥 여성이 살짝 노기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목소리를 내어 그새 살짝 멀어진 선두를 향해 내뱉었다.


그제서야 제 뒤를 따르던 이들이 멈춰섰다는 걸 깨달았는지 복잡한 골목을 따라 바지런히 발을 놀리던 선두의 움직임이 우뚝하고 멈추었다.


그리고는  말을 내뱉은 여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사이로 기묘한 대치구도가 형성된 순간 그것을 깨뜨린 것은 다름아닌 일행  맨 뒤를 차지하고 있던 또다른 여성이었다.


"경."

 말과 함께 후미의 여성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올려 그녀를 지키듯  있던 금발 여성의 어깨 위에다가 올렸다.

"그만하세요."


그와 함께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던 로브가 스윽하고 흘러내리며 회색빛 천으로 감싸여있는 가느다란 판이 슬그머니 얼굴을 내비췄다.


"하오나ㅡ!"


"대체 무엇이 그리도 걱정인지 모르겠군요. 이곳이 어디인지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요?"

그리 말하는 여성, 아니 성녀의 얼굴에는 그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을  같은 절대적인 자신감이 맴돌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대륙 어느 곳보다 그 분의 힘이 강력하게 내리쬐는 곳이 바로 이곳 성도였으니까.


그렇기에 성도 안에 있으면  어떤 것도 그녀를 침범할 수 없었다.

성녀는 그분의 대리자이며 그분께서 자신의 대리자가 무도하기 그지없는 것에 해를 입는  가만히 두 손 놓고 지켜만 보실 리 만무하니까.


일전에 허신을 모시는 사교도들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성도를 범했을 때도 덕분에 무사하지 않았던가.


만약 그분의 돌보심이 없었다면 각국에서 찾아온 귀빈들과 함께 그대로 한줌의 잿더미로 화했을 것이다.


허나 그분께서 내려주신 가호는 휘몰아치는 불꽃의 폭풍 속에서도 건재했고, 그렇기에  폭발 속에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호흡하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더불어 같이 자리하고 있던 이들의 목숨도 구할  있었고.

그분께서 자신을 그토록 어여삐 여기시는게 대체 뭐가 그리 걱정이란 말인가.


'이래서 데려오지 않으려 했던 것이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자신의 유일한 시녀이자 성역지키미인 사라에게 언질이라도 받은 것인지 몰래 성역을 빠져나가려하기 무섭게 귀신같이 따라붙어서 절대 혼자 보내드릴 수는 없다고 떼를 써대는 통에 그냥 두고 올 수가 없었으니까.

"..날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부디 경거망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수하의 돌발행동을 다그친 성녀가 성기사단장을 향해 내던지고 있던 시선을 떼어내어  맞은 편을 향해 던졌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것은 골목에 내려앉은 어둠 속에 그대로 녹아들어 사라지더라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새까만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누군가였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몰골.


그럼에도 저쪽의 초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여신께서 원하셨고 솔직히 자신도 궁금하긴 했으니까.


처음봤을 때보다 한결 약해지긴 했어도 지금도 여전히 또렷하게 느껴지는 저 신성력의 출처는 대체 어디일까.

확실한  그분의 힘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도 그분의 힘을 가장 많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이었기에  사실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저건 대체 어디에서 기인한 힘인가.

성녀 후보자라는 직함을 달고 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한때는 존재했으나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은 멸신들의 이름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들의 것일리는 없었다.

신성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닌 그분의 베품을 통해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게 신과 사제, 그리고 신성력의 상관관계였고, 그렇기에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성력또한 존재할 리 없었다.


베풀어줄 신이 존재하질 않는데 어떻게 신성력을 내려받는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진리건만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저것은 대체 뭘까.

-아무리 봐도 희한하단 말이야.


비슷한 의문을 느끼고 계신 것은 그분께서도 매한가지인지 '흐음..'하고 고민의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그때 봤던  떠올려보면 분명 어중이떠중이가 내려줄 수 있는 수준은 절대 아니었는데 말이지..

지나가듯 중얼거리는 그분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 나 정도는 되어야..


그도 그럴 것이 그 사이에 섞인  마디를 쉬이 흘려넘길 수가 없었으니까.

유일하시기에  무엇보다도 위대하신 그분과 맞먹는 강력한 힘을 지닌 신이라니.

그런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었다.


혹시 누군가 진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기라도 한 것일까.


정말로 그런 거라면 여신께서는 알고 계셔야 했다.


헌데 여신께서도 모르신다는 말만 반복하실 뿐이니..

'대체..?'


저것은 뭐란 말인가.

쉬이 풀릴  같지 않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와중에도 딱 하나 확실한 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상대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기운이 결코 사악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여신께서도 보증해주신 것이니만큼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문제는 그래서 더 의아하다는 것이었지만.

아까부터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상대방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다고 의문이 해소될 리 없다는 것 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답답한  참을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자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은  했냐는  이쪽을 향해 돌아서있던 그녀가 슥 몸을 돌려 골목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왕국 출신인데다가 교국에 방문한 것은 분명 이번이 처음인 걸로 아는데 어떻게 저렇게 능숙하게 움직일 수가 있는 걸까.

움직이는 모습만보면 꼭 이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토박이를 보는 듯 했다.


아니, 이건 그 이상이었다.

성녀가 되고 나서부터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성역 밖으로 나오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전에는 나름대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녔던 편인 자신도 성도에 이런 곳이 존재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혹시 성기사단장은 뭔가 좀 알까 싶어서 흘깃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봤지만 어디로 가는  몰라 답답해하고 있는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성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도 모르는 장소라니.

점점 더 수상해지는 걸 느끼며 그새 훌쩍 멀어진 선두를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은 끝에 눈앞으로 나타난 건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나무로 지어져있어 그리 특별할 것 같지는 않은 장소였다.

기껏 데리고 온 곳이 이런 곳이라니.

살짝이지만 긴장하고 있던   식어버리는 느낌에 성녀는 허탈하다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알  없는 심정을 속으로 곱씹었다.

그 사이 혹시 모르니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확인해보겠다며 도착하자마자 안으로 쏙 들어간 초대자이자 안내자를 따라 그 안으로 들어갔던 기사단장이 낡은 문을 열고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어땠나요?"


"..특별히 문제가 될만한 부분은 없긴 했습니다만."

뭔가 탐탁치 않아하는 눈치였지만 못본  하며 그대로 그녀의 옆을 지나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의 모습은 외관만큼인 평범했다.

바깥에서 보이던 것만큼 허름했으며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먼지 묵은 냄새가 났다.

"그래서  보자고 한 용건이 뭐죠?"

안 그래도 예언 때문에 머리가 복잡한 상황이었기에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고 생각하며 이곳까지 따라오게 만든 장본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작게 웃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에 순간적으로나마 울컥한 순간, 웃음소리 뒤로 따라붙은 것은 그냥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많이 급하신가 보네요. 예언 때문인가요?"

마치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듯한  발언에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흠칫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긴 당연히 그러실 수밖에 없겠죠. 목표의 옆에 경쟁자들이 그렇게나 많으니.."

그쯤되니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리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에는 강렬하기 그지없는 확신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이안이 신탁 속에 등장하는 남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자신 뿐이어야만 했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것까지는 가능하더라도 확신하고 있는  오직 자신 뿐이어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여신께서 다른 이들에게까지 그 사실을 알렸을 리 만무하니까.


지금도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중인데 뭣하러 경쟁자를 스스로 늘리는 행동을 하신단 말인가.


그러니 마땅히 그래야만 함에도 눈앞의 여성, 아니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국 출신의 기사는 여신께 직접 확답을 받은 자신만큼이나, 아니 그보다도 더 강렬한 확신을 속 안에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의아해하고 있으려니ㅡ


"도와드릴까요?"

그냥 흘려듣기 힘든 말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에 살짝 밑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번쩍 치켜든 순간 목소리가 이어졌다.


"꼭 완수해야할 사명이 하나 있지 않으십니까?"

"..."


"저라면 도와드릴  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렇기에 허풍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자신과 그분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할 것을 눈앞의 여자가 어찌 알고 있냐는 것이었다.


눈을 가늘게 뜬채 쓰고 있는 베일 너머로 일렁거리는 실루엣을 응시했던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그러 자신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보아하니 이제서야  대화할 마음이 드셨나 보군요."

왠지 모르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빙그레 웃는 듯한 표정이 생각나게 하는 목소리가 낡아빠지고 허름한 벽을 타고 튕겨나와 그대로 귓속으로 쏙 빨려들어왔다.

그와 함께 이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던 시선이 살짝 옆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 전부터 오고가던 대화의 맥락을 따라잡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는 성기사단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화를 할 생각이거든 방해가 될만한 것부터 치우라는 의미가 노골적으로 담겨있는 그 몸집에 잠시 고민하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사단장을 건물 밖으로 물러나게 했다.


물론, 순순히 따라주지는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지켜야할 분을 놔두고 어찌 그럴 수 있겠냐고 말하길래 결국 그분의 이름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먼저 그분의 힘이 일어나 절 지켜주실 겁니다."

"하오나.."


"아니면.. 그대는 그분을 의심하는 건가요?"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런 참람한 짓을..!"


"그러면 물러나세요."

그렇게 실랑이까지 해가며 기사단장을 건물 밖으로 물러나게 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벽에 난 구멍 사이로 바깥의 빛이 흘러들어왔고, 그것이 우연찮게 대화를 제안해온 상대방의 얼굴을 비췄다.


어둠이라는 베일을 얼굴 위에 드리우고 있던 상대방의 얼굴이 순간적으로나마 드러났던  그래서였다.

그렇게 드러난 얼굴에는ㅡ

"..좋네요. 그럼 대화를 시작해볼까요. 제가 그렇듯 성녀님께서도 제게 할 말이 참 많으실테니."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없는 아련함이 진하게 맺혀있었다.

 마치 이쪽을 보며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반추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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