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교수대에 목 매달리기 전에 최후의 만찬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건네받은 사형수의 심정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하고 대충 비슷하지 않았을까.
정력에 좋다고 소문난 음식들로만 빼곡하게 채워져있는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들을 만들기 위해 희생된 동물들의 원념이 지금 이 순간 내 귀에 대고 원통하게 부르짖고 있는 듯했다.
너도 분명 우리들처럼 될 거라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버리겠다고.
덕분에 입맛이 똑 떨어짐과 동시에 뭐라도 들어가면 그대로 체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속이 거북해졌지만 결국 포크를 집어들 수밖에 없었다.
내어준 것들을 바닥이 보이도록 비워낼 때까지 계속 그러고 있을 거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쪽을 지그시 쳐다보는 시녀의 시선도 시선이었지만ㅡ
'이거라도 먹어야 된다.'
사실 그보다는 이렇게라도 방비를 해두지 않으면 진짜 뒤져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이 더 컸다.
갈 때 가더라도 복상사 엔딩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니지 이 경우에는 복하사인가..?'
뭐, 솔직히 말하자면 레이시아는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왕녀라는 고귀하기 그지없는 신분과는 달리 그녀의 보지는 굉장히 헤픈 보지였으니까.
그러니 처음에는 의욕에 가득 찬 상태로 달려들더라도 좋아하는 곳을 몇 번 콱콱 찔러주면 분명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헐떡이며 나가떨어질테지.
문제는 레이시아를 제외한 나머지 둘이었다.
디아나와 앨리스.
그래, 사실 그 둘이 가장 무서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신분이 신분이다보니 운동과는 영 연이 없는 레이시아와는 다르게 그 둘은 정통 무투파니까.
그만큼 누구랑은 다르게 체력과 지구력이 어마어마할텐데 그런 둘을 동시에 상대한다?
예전과 같은 몸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몸으로 그런 일이 가능키나 할런지 솔직히 좀 의문이었다.
시녀가 날라다 준 것들을 입 안으로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먹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
그 말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기계적으로 포크질을 반복하다보니 처음봤을 때는 이걸 어떻게 다 먹나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하던 것들이 어느새 수줍게 바닥을 드러내보이고 있었다.
덕분에 살짝이지만 볼록하게 튀어나온 배를 옷위로나마 어루만지고 있으니 내가 가져다 준 것들을 모두 비워냈다는 걸 확인한 시녀가 손수 테이블 위에 깔아놓았던 접시를 싸그리 수거해 사라졌다.
'설마 지금 바로 부르는 건 아니겠지..'
적어도 소화될 시간은, 아니 하다못해 30분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빈 접시를 들고 사라졌던 시녀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찻잔 하나를 쟁반으로 받쳐든채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배불러 뒤질 것 같은데 설마 또 먹어야 되는 건가 싶었으니까.
이러다가 기가 빨려서 뒤지는 게 아니라 배가 터져서 뒤지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 손을 들어올려 거절하려던 찰나였다.
"쭉 들이키시면 방금 먹은 것들을 소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렇다니 어쩌겠는가.
마셔야지.
해서 사양을 위해 들어올렸던 손을 그대로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쟁반 위에 올려져있던 찻잔을 조심스레 낚아챘다.
찻잔 안에는 우유를 생각나게 하는 액체가 넘실넘실 거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비쥬얼이었다.
그래서 선뜻 들이키기가 좀 그랬다.
이게 대체 뭘까.
하는 느낌으로 그것을 손수 날라다준 시녀를 향해 슬쩍 시선을 던져봤지만 그런 내 의문에 답해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혹시 뭐 레이시아한테 따로 언질같은 거라도 받은 것일까. 혹시 물어보더라도 답해주지 말라고?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양손으로 꼬옥하고 움켜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다시봐도 '소화제'는 아닌 듯 했지만, 이내 눈 딱 감고 들이켰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사람이 먹으면 안 되는 걸 내게 가져다 주도록 했을까 싶었으니까.
색이 우유빛이다보니 맛또한 거기에 어울리게 부드러운 맛일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가루약이라도 먹는 심정으로 최대한 혀에 닿지 않도록 유의하며 그대로 목구멍 안에다가 때려부었는데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들어가기 무섭게 화끈한 느낌이 확 올라왔으니까.
꼭 마치 엄청나게 도수가 높은 술을 희석시키지도 않고 원액 그대로 목에다가 때려부은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렇다고 막 뒤질 것 같은 느낌은 아니고 기분 좋은 화끈거림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음료까지도 전부 비워냈는데ㅡ
"한 잔 더 드시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찻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들려온 시녀의 질문에 나도 모르게 멈칫하고 있는 사이 총총 걸음을 옮겨 내 옆까지 도달한 시녀가 그대로 찻잔을 회수해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내 앞에는 눈 딱 감고 들이키기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한 찻잔이 아른아른거리고 있었다.
"드시지요."
그렇게 리필된 것마저 비워냈는데 왔다갔다하는 게 힘들지도 않는 지 똑같은 양을 또 가져다 주더라.
'허..'
그런 식으로 총 네 번 정도 비워냈을 때였다.
바로 조금전까지만 하더라도 빵빵하던 배가 이제는 후끈후끈거리는 걸 느끼고 있으려니 똑똑하고 문 두들기는 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에 묵묵히 그 앞을 지키고 있던 시녀가 반응을 보였다.
"잠시."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던 그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날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ㅡ
"가시지요."
그리 말하는 게 아닌가.
귓가로 울려퍼진 그 말을 들은 순간 직감했다.
올게 왔다고.
"..네, 가죠."
마음의 준비같은 거야 진작에 끝내놓은 상태였기에 즉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시녀를 따라 방을 빠져나가니 그녀가 날 레이시아의 집무실 겸 침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여기저기서 시선이 날아와 등으로 푹푹하고 박혀들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했다.
그런 것들까지 신경쓰기에는 지금 내가 너무 바빴으니까.
'어떻게 상대하는게 좋으려나..'
셋의 합의가 무사히 끝났다면 아마도 레이시아, 디아나, 앨리스 순으로 상대하게 될 가능성이 컸다.
아무래도 세 명의 신분이 각자 다르다보니 그리될 수밖에 없겠지.
머릿속으로 예상한 순서를 토대로 허술하게나마 전략을 세워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레이시아의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는 맨 꼭대기 층에 입성하기 무섭게 총총 걸음을 옮기며 날 안내하던 시녀가 우뚝하고 멈춰섰다.
그러더니 옆으로 슬쩍 비켜서며 날 향해 꾸벅하고 허리를 숙여보이는 게 꼭ㅡ
'아,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라고?'
그래 꼭 그리 말하는 것 같더라.
아무래도 지금부터 하려는 짓이 짓이다보니 방 근처로 오지 말라고 레이시아가 엄포라도 놓은 모양.
'어쩐지..'
평소라면 근위대 소속의 기사들로 물샐틈 없이 지켜지고 있어야할 꼭대기 층의 복도가 이렇게 서 있는 이라고는 한 명도 없이 한산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겠지.
알겠다는 뜻으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준뒤 복도 저 편에 자리하고 있는 레이시아의 집무실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다름아닌 그 와중이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 교국 측에서 숙소로 쓰라고 내준 곳은 방음이 더럽게 안 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레이시아가 사용하는 꼭대기 층이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원래는 들리지 않았어야할 소리들이 지금 이순간 속속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저, 전하 그 복장은 대체.."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다름아닌 디아나의 것이었고,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레이시아와 함께 있다는 걸.
"왜? 어울려?"
"고, 고귀하신 분께서 입을만한 복장이 아닙니다..! 어찌 그런 복장을.."
"그야 그냥 속옷만 덜렁 입고 있는 것보다는 이 편을 이안이 더 좋아할 것 같으니까지."
"아,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런 복장을.."
"솔직히 말하자면 부럽기도 했거든. 나도 한 번쯤은 갑옷이라는 걸 입어보고 싶었는데 다친다고 주변에서 자꾸만 말리더라."
"그, 그런 건.. 갑옷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가, 갑옷은 기사의 긍지를 나타내는 상징이자 얼굴일진데 어찌 그런 상스러운 것을.."
레이시아가 대체 뭘 주워입었길래 디아나가 이리도 치를 떨고 있는 걸까.
솔직히 둘이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데 들려오는 대화를 엿듣다보니 놀라움 대신 호기심이라는 것이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왜? 고대의 여전사들은 이런 것들을 입고 적과 싸웠다던데."
"그, 그건.."
"그나저나 어울릴 거라 생각해서 고르긴 했는데 역시 잘 어울리네.. 몸매가 좋아서 그런가?"
"흣, 자, 잠.. 저, 전하.."
레이시아가 디아나의 몸을 어루만지기라도 한 모양이다.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복도 벽을 타고 전해져왔다.
"부러운 걸.. 어때? 오랜만에 드레스를 입은 소감이?"
"부, 불편할 뿐입니다. 차라리 속옷만 입고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부끄러워서 그래? 하긴, 이안한테도 아직 보여준 적 없던가?"
듣고 보니 그랬다.
다른 건 몰라도 디아나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은 본적 없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게 디아나는 기본적으로 꾸미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입고 다니는 옷이라고 해봐야 수련복, 학원의 제복, 기사용 정복이 고작이었다.
그런 디아나의 드레스차림이라니.
살짝 상상해본 것만으로도 참을 수가 없어져서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는 굳게 닫혀있는 문을 온몸으로 떠밀면서 레이시아가 집무실 겸 침실로 사용하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렇게 방 안으로 들어선 순간 볼 수 있었다.
갑옷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속옷에 가까운, 흔히 비키니 아머라 불리우는 것을 몸에 걸친 채 가슴하고 음부를 제외하고는 뽀얀 살결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는 레이시아와ㅡ
"이, 이안?!"
말 그대로 옷 전체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흰색의 레이스로 된 드레스로 몸을 감싸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말이다.
'앨리스는 어디간 거지?'
그 와중에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보이질 않아서 잠시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남자라면 미칠 수밖에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둘 때문이었다.
둘의 반응은 서로 달랐다.
모처럼 입은 드레스가 속옷보다도 더 민망하게 생겨먹은 물건이라는 사실이 그리도 부끄러웠는지 디아나가 얼굴은 물론 목덜미와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양팔로 제 몸을 가리고 있는 반면 그런 디아나보다도 더 부끄러운 복장을 하고 있는 레이시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당당한 것도 모자라 이쪽을 유혹이라도 하듯 다리 사이를 가려주고 있는 길다란 천을 손으로 잡고 슬며시 흔들어대고 있기까지 했다.
"표정을 보니 우리가 왜 그대를 부른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하구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귀찮았는데 마침 잘 됐다고 말하는 것처럼 싱긋 웃은 레이시아가 다리 사이로 드리워진 천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걷어보이며 날 향해 물었다.
"어떠느냐. 이안. 어울리느냐? 그대가 좋아할 것 같아서 특별히 만들어본 것이다만."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지금 이 순간 그 누구보다도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게 바로 레이시아였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대체 디아나를 어떻게 구슬린 건지는 모르겠다만 노출벽이라는 특이한 취향을 지닌 그녀에게는 나는 물론이거니와 소꿉친구라 할 수 있는 디아나의 앞에서 합법적으로 자신의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게 기껍기 그지없을테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저 천 너머는 벌써부터 질척질척하게 젖어있지 않을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걸 보니 마음에 드는 모양이구나. 잘 됐군. 우리는 그대를 제국이나 유목민족 쪽에 넘겨줄 생각따위 없거든. 그러니 지금 당장ㅡ"
더는 못 참겠다.
"..레이시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던 디아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설마 내가 다른 이도 아니고 레이시아를 이름으로 부를 줄은 몰랐을테니까.
그에 비해 레이시아의 반응은 달랐다.
디아나처럼 놀라긴 했어도 이쪽은 순수한 반응이라 할 수 없었으니까.
산책을 할 때마다 주로 들려주곤 했던 낮게 깔린 목소리에 반응한 것일까.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는 꼴을 하고 있던 레이시아의 육체가 흠칫하고 떨렸다.
"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본 왕녀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함부로.."
"내가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
"하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하라고 했지?"
그 말에 레이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소꿉친구라 할 수 있는 디아나의 앞에서 평소 산책을 시작할 때 하곤 했던 행동을 그대로 반복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상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일까.
연분홍빛 입술 사이로 잔뜩 달아오른 숨결이 새어나왔다.
그런 걸 허공에 대고 흩뿌리며 그대로 내 앞까지 천천히 걸어온 그녀가ㅡ
스윽-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치 노예라도 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