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렛이 예고 없이 떨어뜨린 핵폭탄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덕분에 자리에 앉아있는 그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난 쓴웃음만 짓고 있었고.
'어쩐지..'
바이올렛치고는 굉장히 순순히 도와준다 싶더라니만..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래도 혹시나 했는데..'
역시는 역시였던 모양이다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자기가 툭 내뱉은 말 때문에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자리의 분위기가 박살이 나든 말든 여전히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고 있는 바이올렛에게서 시선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슬그머니 다른 쪽으로 돌려보니ㅡ
놀란 듯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박혀들어왔다.
디아나와, 앨리스, 그리고 레이시아의 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바이올라의 반응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었고.
다른 이라면 몰라도 동생인 바이올라한테는 임신 사실을 귓뜸 정도는 해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에게도 숨기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바이올라의 반응이 굉장히 찰졌다.
"아니, 그게 무슨.."
그렇게 내려앉아있던 침묵을 깨뜨린 건 다름아닌 바로 조금 전까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나가고 있던 리파였다.
황당함과 의심이 딱 반씩 섞여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고개가 지 마음대로 리파가 앉아있는 곳과는 반대방향으로 움직였던 건 분명 그녀의 얼굴을 확인할 자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겠지.
그렇게 내가 외면이라는 선택지를 골라 잠시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던 동안 바이올렛이 리파의 중얼거림에 응수했다.
"그쪽이 들은 그대로야."
그러니 더 설명할 이유도, 생각도 없다는 것처럼 바이올렛이 단호하기 짝이 없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이며 리파의 의문을 일축시켰다.
"허.. 그 말은 그대도 나처럼 이안의 아이를 품고 있다는 뜻인가?"
"정확히 이해한 것 같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아무래도 리파가 바이올렛의 배를 바라보았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이올렛이 저렇게 싱긋 웃으면서 보란듯이 자신의 배를 쓰다듬을 이유가 없으니까.
"아이가 들어선지 얼마 안 됐거든."
너처럼 배가 볼록하지 않은 건 어디까지나 임신 초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바이올렛의 설명에 리파가 '하..'하고 헛웃음을 흘리는 사이 바이올렛이 잽싸게 말을 덧붙였다.
"정 믿지 못하겠으면 의사를 불러서 확인시켜줄 수도 있어. 아, 의사도 믿기 힘드려나? 그러면 교국에다가 사제라도 청하는 게 좋을까?"
누굴 데려와 진찰을 보게 한들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 변치 않을 것이다.
꼭 그리 말하는 듯한 바이올렛의 목소리에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깃들어있었다.
그렇기에 믿지 않을 수가 없는 목소리기도 했다.
"이안."
그래서일까.
화살이 내쪽으로 날아들었다.
"그대가 정녕 이안이 맞다면 당장 내쪽을 보도록."
뭐라고 말을 하면 좋을까.
솔직히 변명할 거리야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런 상황에서는 쓸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미리 짜놓은 대본과는 사뭇 달라져버린 상황에 난감해하고 있으려니 바이올렛이 여상스러운 투로 날 감싸기 시작했다.
"너무 그를 탓하지는 마. 어쩔 수 없었던 것 뿐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라.."
"이미 들어서 알고 있잖아? 이안의 몸 상태가 어떤지?"
바이올렛의 발언에 리파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다름아닌 침음성이었다.
그럴 수밖에.
일전에 그녀와 말을 맞추러 갔을 때 몸상태에 관해서도 들려주긴 했지만, 임산부인 그녀에게 너무 커다란 걱정거리를 안겨줄 수는 없어서 그리 자세하게까지는 밝히지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이 자리가 시작되기 전까지 리파가 인지하고 있던 내 몸 상태는 장기간의 요양과 치료가 필요한 상태 정도였다.
헌데 이 자리에 참여함으로써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반응이 좋을 리 없겠지.
"헌데 그게 그대하고 무슨 상관이지? 이안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건 분명 교국의 성녀라 했던 것 같은데."
물론 그 와중에도 리파는 바이올렛의 발언 사이로 얼핏 드러난 헛점을 놓치지 않았다.
다만, 딱 하나 그녀가 간과한 점이 있다면 그게 일부러 드러낸 것이라는 것 정도.. 겠지.
아니나 다를까 리파의 입에서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무섭게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헛점을 찔려서 당황한 표정따위가 아닌 여유로움이 넘치는 미소였다. 마치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노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미소가 바이올렛의 입가를 점령했다.
"그대의 말이 맞아. 대족장."
"난 내 말이 맞냐고 물은 것이 아니라 그대가 임신한 것하고 이안의 몸 상태하고 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 지 물은 것이다만."
"흠, 혹시 제국의 건국신화에 대해 알고 있어?"
"들어는 보았다. 제국의 초대황제가 굉장한 인물이었다지."
레이시아라나 뭐 다른 이들이라면 모를까 설마 대초원에서 온 리파가 제국의 건국신화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는 아무리 바이올렛이라도 예상치 못했던 것일까.
바이올렛이 얼굴 위에 눌러쓰고 있던 여유로움이라는 가면 위로 약간이지만 놀라움이라는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면 숲에 버려져있던 초대황제를 길러준 사람이 나와 같은 랑인족이라는 건?"
"처음듣는 소리다만..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지?"
"당연히 상관이 있지. 랑인족 여성의 초유는 인간에게 있어 엄청난 영약이나 다름없거든."
"그 말은.."
"언제까지고 치료를 이유로 교국에 갇혀지낼 수는 없지 않겠어? 그래서 이안은 선택했을 뿐이야."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날 탓할 생각은 하지마라.
바이올렛은 그런 식으로 날 변호해주고 있었다.
"마침 내게는 그에게 갚아야할 은혜가 있었거든. 어리석은 동생이 이안에게 목숨빚을 졌지 뭐야."
바이올렛의 그 말이 상당히 뼈아팠던 것일까. 입을 떡 벌린 채 금방이라도 놀라서 자빠질 것만 같은 모습을 하고 있던 바이올라가 금세 시무룩하게 변했다.
"그러니 언니인 나라도 대신 갚아줘야하지 않을까 싶더라고, 겸사겸사 이안이라면 내 반려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기도 했고."
"..."
"사교도 척결을 기치로 내세운 동맹의 맹주와 사교도 사태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영웅의 결합이라. 그대가 생각하기에도 그림이 꽤 괜찮지 않아?"
"고작.. 그런 이유로.."
"고작이라니. 섭섭한 걸. 이게 내가 그를 사랑하는 방식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른 것 아니겠냐며 바이올렛이 슬쩍 덧붙인 말에 리파 쪽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큭.."
"아, 그리고 대족장 그대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그대가 이안과 결합하겠다는 걸 반대할 생각은 없어."
"무, 뭣?!"
"그대의 말에 반박했던 건 어디까지나 그대가 이안을 독점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 뿐이야."
독점하는 것만 아니면 나도 반대할 생각은 없다.
라고 말하며 스리슬쩍 리파를 향해 손을 내미는 솜씨가 참으로 교묘하기 그지없었다.
바이올라야 이미 바이올렛에게 완벽하게 길들여진지 오래이니만큼 무슨 일이 있어도 둘은 같은 편이라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둘 만만으로는 쪽 수에서 밀린다는 점이었다.
지금도 봐라.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주장이라도 하는 것처럼 왕국 출신의 여성들이 똘똘 뭉쳐 자리하고 있는 반면 나머지는 두 명과 한 명으로 나뉘어져있지 않나.
그런데 여기서 바이올렛이 리파를 포섭하는데 성공한다면?
머릿수에서 동수를 이룰 수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우위까지 점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그토록 열심히 해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렇다할 소식조차 없는 왕국 3인방과는 달리 그녀와 리파는 내 아이를 임신한 상태니까.
'아니, 시발 뭔 놈의 치정싸움 스케일이 삼국지 급이냐고..'
그리고 졸지에 촉오 연합군과 맞서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위나라의 조조, 아니 레이시아또한 상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 정도는 느꼈던 모양이다.
"..새로이 알게된 사실이 너무나도 많아서 머릿속이 좀 혼잡하군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녀가 처음으로 전면에 나서자마자 한 일은 자리를 파해버리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은 판단이라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리파가 레이시아에게 나와 혼인할 수 있겠냐고 청한 이상 칼자루는 그녀의 손에 쥐어져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레이시아는 제 손안에 쥐어져있는 것을 휘두름에 있어 쓸데없이 망설이는 성격은 아니었다.
덕분에 첫 비밀회합은 그 어떤 합의도 이끌어내지 못한채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그만큼 레이시아의 태도가 강경했기 때문이었다.
"이안? 일단 숙소로 가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레이시아가 그리 말한 순간, 급에서 밀려 그녀의 뒤를 자처할 수밖에 없었던 디아나와 앨리스가 잽싸게 내 양 옆자리를 꿰찼다.
그런 둘의 행동이 말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도망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어차피 도망 못 치는데..'
바이올렛에 이어 정통 무투파라 할 수 있는 바이올라의 것까지 나눠받고 있는 덕분에 몸 상태는 깨어난지 얼마 안 됐던 시절에 비하면 말 그대로 양호하다 할 수 있었다.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일상생활 기준일뿐 고작 그것 가지고 디아나나 앨리스하고 비벼볼 수는 없었다.
"..네."
그렇기에 굳이 저항하지 않고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변한 날 데리고 바이올렛이 급히 마련한 장소에서 빠져나온 레이시아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 중 한 명을 불려 그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이는 것이었다.
"..예?"
문제는 그렇게 속닥거린 게 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대체 시녀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을 했길래 상전의 말에 반문하거나 의문을 표하는 게 아랫것으로서 절대 하지 말아야할 행동이라는 걸 뻔히 알고 있을 시녀가 저런 식으로 기겁을 해대는 걸까.
"쓸데없는 소리나 할 생각이면 잔말말고 얼른 가서 말이나 전하고 오도록."
아니나 다를까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시녀의 위로 엄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된 칼날이 떨어져내렸다.
"예, 예.."
덕분에 바짝 쫄아버린 시녀가 그대로 어딘가를 향해 호다닥 뛰어갔고, 그렇게 시녀를 상대로 뭔가를 지시하는 걸 끝마친 레이시아가 여전히 내 양옆을 지키고 있던 디아나와 앨리스를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숙소에 도착하거든 따로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그런 레이시아의 발언에 디아나는 올게 왔구나하는 표정과 함께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앨리스의 표정은 어딘가 미묘했다.
마치 레이시아가 말한 '이야기'가 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느낌?
"그러면 돌아갈까. 시간도 별로 없으니."
대체 돌아가서 뭘 할 생각이길래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
솔직히 예상되는 게 없냐면 거짓말이겠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저런 표정을 하고 있을 때마다 레이시아는 정말 생각치도 못한 일을 저지르곤 했으니까.
부디 아무 일 없이 이 한 몸 무사히 끝나면 좋을텐데..
'그럴 리는 없겠지..'
죽지만 말자.
죽지만.
그 말을 속으로 되뇌이면서 어느덧 숙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 일행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제국 측 숙소에서 왕국 측 숙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 10분 정도?
그렇게 참으로 오랜만에 방문하는 듯한 곳에 도착하자마자 그 새삼스러운 느낌을 만끽할 새도 없이 원래 내가 사용하던 방 안에 갇히게 되었다.
디아나와 앨리스를 데리고 사라지기 전에 레이시아가 남긴 한 마디 때문이었다.
"이안, 너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따지고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그 말 한 마디 덕분에 무려 세 명이나 되는 인원이 바깥으로 통하는 문의 앞뒤를 지키고 있었다.
세 명 중 두 명은 디아나의 어머니가 직접 지정한 여기사였고, 한 명은 레이시아의 사저에 머물 때 몇 번 본적이 있는 시녀였다.
덕분에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깨달았다.
진짜 창문으로라도 뛰어내리지 않는 한 레이시아가 날 호출하기 전까지 방 밖으로 나가긴 힘들 거라는 걸.
어떻게 화장실이라도 밖에 있었다면 그 핑계라도 댈 수 있었겠지만 애석하게도 다 방에 딸려있는 상태였고.
'뭐,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지만..'
이또한 결국 내 업보 아니겠는가.
난장판이 나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행동할 때는 언제고 그 말을 속으로 되뇌이고 있으려니가 해탈한 척이라도 하고 있는 것만 같아 쓴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뭐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 것을.
'그나저나 대체 언제..'
그 이야기인지 뭔지가 마무리 되려나.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딜 좀 다녀오겠다며 잠시 자리를 비웠던 레이시아의 시녀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품 안에 뭔가를 한 가득 안아든 채로.
맛있는 냄새를 풀풀 피워올리는 그것들은 다름아닌 만든지 얼마 안 된 음식들이었다.
문제가 있다면ㅡ
"생각보다 오래 걸릴 듯 하니 그동안 식사부터 하고 계시라고 하셨습니다."
만드는 데 들어간 재료들이 죄다 정력에 좋기로 소문난 것들 뿐이라는 것 정도?
덕분에 직감했다.
'좆됐네 시발..'
오늘도 애가 들어설 때까지 짜이게 될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