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39)화 (338/366)



〈 33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리파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내 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을  느꼈던 감정을 기억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그렇게 떠올린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 그대로 입밖으로 내뱉었다.

덕분에 내개 생각해도  그럴듯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런 내 발언 뒤로 내려앉은 건 아찔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었다.


그럴 수밖에.

동맹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이들이 죄다 입을  다물어버렸는데 다른 이들이 어떻게 감히 입을 열겠는가.

뒤늦게 우리 쪽으로 합류했던 디아나도, 그 옆에선 앨리스도,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레이시아도, 바이올렛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바이올라도 경악한듯 입을 살짝 벌린 채 침묵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의외였던 건 다름아닌 성녀의 반응이었다.


놀라는 것까지는 이해할  있었다. 생각치도 못한 상황인 건 그녀에게도 마찬가지일테니까.

헌데  표정은 대체 뭘까.


왜 새치기라도 당한 사람마냥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는 걸까.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건 이 세계의 멸망과 관련된 예언이었다. 예언의 남성과 동침하게 되면 장차 세계를 구원할 아이를 잉태할 수 있을 거라느니 어쩌느니 했던 그거 말이다.


'맞나?'

아무튼 그 예언의 남성이 나였다면?


그리고 성녀가 그 사실을 모종의 수단을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이라면 몰라도 성녀만큼은 그게 가능했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신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있는 존재가 바로 그녀 아니던가.


멸망에 관한 신탁을 내린 건 다름아닌 여신이다.

그러니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예언  남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만큼 성녀에게 확신을 심어주는 것또한 얼마든지 가능할 터.

문제는 확신만 심어주고 끝날 리 없다는 점이었다.

본인이 다스리는 세계가 느릿하긴 하지만 확실하게 멸망이라는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여신에게는 크나큰 위기로 비춰졌을 것이다.

어쩌면 마왕같은 놈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받았던 이전 회차의 신들보다 그녀가 느낀 위기감이 더 클지도 몰랐다.


마왕이 문제라면 때려잡으면 그만이다.


물론, 당연히 뒤지게 힘들겠지만 일단 성공하기만 한다면 세계를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원인이 제거된 셈이니 그 후에 재부흥을 시키든 복구를 하든  수 있을 것이고.

'한 번도 성공해본  없기는 하지만..'


아무튼 중요한  원인과 그걸 위한 해결법이 확실했던 이전 회차의 세계들과는 달리 이 세계는 자연스럽게 멸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만가는 남성의 출생율.

그리고 그 영향으로 덩달아 우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출생율까지.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남자 아이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게될지도 모르지.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가겠냐만은 마냥 안심하기도 힘든 것이 남자의 출생율은 분명 제로를 향해 수렴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러한 사실을 이 세계를 총괄하는 여신이 모를 리 없었고, 그러니 여신이 느낀 위기감은 분명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자신이 다스리는 세계가 멸망을 향해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그것을 지켜만 봐야하는 상황이 비참하기도 했을 것이고.


 와중에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이 눈앞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걸 보며 여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기회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원래라면 철저히 비주류로 남았어야할 사교가 럭키펀치라고는 하지만 여신교 면전에 대고 죽빵을 날릴 수 있을 정도로 세를 갖출 수 있었던 건 그만큼 여신교의 영향력이 줄어든 탓이 컸다.


암만 열심히 신에게 기도하면 뭐하겠는가.

그런다고 남편감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교도 놈들이 마케팅을 잘 하긴 했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여신교에서 그런 상황을 해결할  있을만한 존재가 뿅하고 튀어나온다면 위기를 해결함과 동시에 여신교도 다시 전과 같은 위상을 되찾게 될테지.


여신에게는 그만한 결과도  없을테니 여신이 그런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 제 수족이라  수 있는 성녀의 등을 떠밀어 내 품안에 안기도록 했다 하더라도 그리 이상할 건 없겠지.

성녀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 이유를 머릿속으로 추측해보면서 겉으로는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그게.. 무슨.."


그러다가 목소리를 쥐어짜내 더듬더듬 입밖으로 밀어냈다.

그런 내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비춰졌을까.


당황한 나머지 잘 나오지 않으려 하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낸 것처럼 보이진 않았을까.


내가 그 말을 입에 담을 때까지도 리파는 팔짱을 낀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다들 왜 그런 반응인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러다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쩔  없이 맺은 관계라고는 하지만 후회하진 않아."

그리 말하는 리파의 얼굴에는 어느새 옅은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한채 그녀가 몸의 실루엣을 가려주고 있던 망토를 슬쩍 걷어 볼록하게 부풀어오른 스스로의 배를 드러내보였다. 그리고는 그것을 조심스레 쓰다듬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소중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한 리파의 표정과 행동에 안 그래도 무겁게 느껴지던 침묵이 한층 더 묵직해졌다.

자신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시선의 존재들을 모르지 않을텐데도 리파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마치 그녀의 주위만 현실에서 유리된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을 풍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들에게 보란듯이 느긋하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던 리파가 이내 레이시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입술이 벌어진  그 직후였다.


"원래는  더 정식으로 청할 생각이었지만ㅡ"

갑작스레 날아와 꽂힌 시선에 레이시아가 흠칫하는 동안, 리파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레이시아의 얼굴에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채로.

올곧게 날아와 꽂히는 그 시선에 옥좌 위에 자리하고 있던 레이시아는 그것을 외면하지도 몸을 돌려 피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앉아있는 옥좌가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대초원의 오랜 이웃인 왕국의 딸이여ㅡ"

정중하기 그지없는 어조.

리파의 입에서부터 흘러나온 것이 레이시아를 향해 날아가 푹푹하고 박혀들었다.


"초원의 딸로 태어난 리파가 그대에게 청합니다."


정중할리 없는 상대가 무려 스스로를 낮추기까지 해가며 정중하게 나오고 있는 상황.

 기묘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왕국에 적을 두고 있는 이들이 꽤나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개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진  레이시아와 디아나의 반응이었다.


단순히 놀라기만한 다른 이들과는 달리 둘의 얼굴은 묘한 불안감에 젖어있었고, 그렇기에 다른 이들보다도 더 훨씬 눈에 띄었다.

"그대 휘하의 기사 '이안'을 내 아이의 아비이자 내 부군으로 맞이하고자 합니다."

"..."


"그는 초원과 왕국을 잇는 화합의 상징이자 가교가  것입니다. 부디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또박또박 이어진 목소리에 레이시아가 보인 반응은 간단했다.

침묵.

그것 외에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그녀에게는 정말 생각치도 못한 상황이었을테니까.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머릿속이 어떻게든 오늘 일을 후딱 해치워버리고 나랑 산책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을텐데 설마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생길 거라고 생각이나 해봤겠는가.


그렇게 당황이라는 늪속으로 퐁당 빠져버린 레이시아를 대신하여 수습에 나선 건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아무래도 동맹과 관련된 이야기는 잠시 미뤄야할 것 같군요."


나와 리파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이 상황을 둘러싼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제 막 그녀의 뱃속에 자리를 잡은 상태일 아이가 그녀에게 '확신'이라 부를만한 것을 심어주기라도 한 것일까.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고자 전면으로 나선 바이올렛의 목소리는 느긋하고 여유로웠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삼국동맹의 수장 자리에 앉아있는 이가 그리 말하니 거기에 대고 반대를 외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이 자리는 일단 해산토록 하겠습니다. 다음 일정은.. 일단  문제가 해결되는 대로 공지해드리도록 하죠."


예의 그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며 자리를 마무리지은 바이올렛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나와 레이시아, 그리고 리파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럼, 저희도 자리를 옮기도록 할까요? 어찌보면 저하고도 관련이 아예 없는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들어봐야 겠네요."

그렇게 유목민족 연합 측에서 온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자리는 흐지부지 되어버렸고, 제국 측 숙소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계속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레이시아가 정신을 차린  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난 후였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레이시아가 가장 먼저  행동은 내쪽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것이었다.

"이안."

짤막하기 그지없는  마디.

그렇기에 그 안에는 엄청나게 많은 것들이 농축되다시피 한채로 담겨져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물어봐도 되겠느냐."

조심스럽게 그지없는 목소리.


 물음에 입술을 살짝 깨문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의 면면을 눈으로 쭉 훑었다.

레이시아, 디아나, 앨리스.


리파.


바이올렛과 바이올라.

그리고 자리에 없기는 하지만 클레어와 카트린느까지.

한  한  나열하고 보니 느낌이 색달랐다. 진짜 많이고 꼬리치고 다녔다 싶었으니까.


이번 회차만큼은 엔딩을 봐야한다는 목표에 목을 매지 않고 즐기다가 가기로 했다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 건드리고 다닌 걸까.


'진짜 미친 놈인가..'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어느새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숨을 슬그머니 입밖으로 밀어냈다.


마치 할 말을 고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다가ㅡ


"음,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저번에 리파와 머리를 맞대고 짜낸대로였다. 다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 어색할  같다 싶은 부분은 내 선에서 알아서 수정했으니까.


덕분에 리파는 악독하기 짝이 없는 부족에 포로로 잡혀있던 날 우연찮게 구출해낸 건 물론 치사량을 훌쩍 넘는 미약을 복용하고 사경을 헤매고 있던 내 목숨을 구해낸 은인으로 둔갑해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리고 그게 내 설명이 끝난 순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파가 입밖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그리 말하는 리파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에 걸맞는 표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살짝 찡그려진  눈이 말하고 있었다.


 말을 믿을 수 없다고.

"그대가 정말 그 이안이란 말인가?"


"..예."

 대답을 들은 리파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레이시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내 말만으로는 믿기 힘드니 왕녀인 그녀의 보증을 요구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에 덩달아 레이시아를 향해 시선을 던지니 순간 눈으로 들어온 건 갈등이라는 것이 레이시아의 눈동자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광경이었다.

지금  순간 그녀는 고민하고 있었다.

내 신원에 대한 보증을 요구하는 리파의 행동에 어떤 식으로 대응할지를 두고 말이다.


인정하고 긍정할 것인가.


아니면 잡아뗄 것인가.

아마도 그 두 개일 가능성이 큰 선택지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것도 잠시, 결국 레이시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설령 여기서 자신이 잡아뗀다 하더라도 이미 내 존재가 리파에게 드러난 이상 언젠가는 탄로가 날 거라고 판단한 모양.

"허.."


그에 리파가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니 의자에 기대어 앉아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바이올렛이 리파와 레이시아 사이로 끼어들었다.

"대족장."

"무슨 일이지 제국의 황녀여."


"그에게 혼인을 청한 건 뱃속의 아이 때문인가?"

바이올렛의 질문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날 사랑하기에 혼인을 청한 건지 아니면 단순히 뱃속의 아이를 아비도 없는 사생아로 만들지 않기 위해 혼인을 청한 건지를 묻고 있었으니까.


"난 내 딸을 아비도 없는 사생아로 만들 생각따위 없다."

"그러면 적당한 상대를 골라 혼인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대 정도 되는 위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하는데."


"눈에 차는 남자가 없더군. 이안 외에는 말이야."

"흐음, 뭐.. 그건 참 공감되는 말이긴 한데.."

그 말과 함께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떠오른  다름아닌 쓴웃음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는 듯한 그런 종류의 쓴웃음을 선보인 바이올렛이ㅡ


"어쩌지? 허락해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곤란하다는 투로 그리 말했다.


그에 리파의 얼굴 위로 '니가 뭔데 허락하고 말고를 정하는 거냐 너한테 그럴 권한이 있냐'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 떠오른 순간 바이올렛이 리파를 향해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대의 사정이 참으로 딱해. 딱하긴 한데ㅡ"

여전히 느긋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렇다고 내 아이를 불쌍한 신세로 만들 수는 없는  아니겠어?"


그런 목소리로 된 폭탄이 우리가 앉아있는 자리 위로 떨어졌다.


핵폭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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