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38)화 (337/366)



〈 33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쿠구궁-


그런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거대한 문이 좌우로 벌어지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반 정도 열렸을 때 그 사이로 리파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문이 채 다 열리지 않은 상태임을 고려하면 일견 성급하게 비춰질 수도 있는 행동.

그럼에도 리파는 당당했다.

나도 너희들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위치라고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이들을 상대로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허리를 곧게 편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뒤로 따라붙은 건 그녀를 호위하기 위해 대초원에서 한참 떨어진 이곳, 성도까지 따라온 초원의 전사들이었다.


유목민족이라고 하면 보통 자유분방한 이미지가 떠오르기 마련인데 리파를 따라 회합장 내로 들어서는 여성들의 모습은 질서정연하기 그지없었다.  모습이 꼭 철저하게 조련된 정예군을 보는 듯 했다.

'저래서..'


덕분에 알 것도 같았다.


리파네 부족이 불과 1년도  되는 시간 만에 주변에 있는 다른 부족들을 싸그리 자기들 밑으로 병합하고 대초원의 지배자나 다름없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는지를.

저러니까 다른 부족은 쨉도 안 되지.

안 그래도 강해보이던 이들이 저런 식으로 군기가 바짝 잡혀있다?

어지간한 부족은 제대로 대처조차 하지 못하고 쓸려나갔을 거다.

틀림없이 그랬겠지.

리파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이들에게서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았던  나뿐만이 아니었던 걸까.

"생각보다 꽤ㅡ"

"솔직히 좀 놀랍군요."

"대족장의 나이가 어린 편이라 들었는데 만만치 않은 인물인가 봅니다."


주변으로 웅성거림이 일었다.

주로 다시봤다는 식의 웅성거림이었다.

물론, 그것만 있었던  아니었다.


리파네 일행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도 분명 존재했으니까.

"상당히 건방지네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ㅡ"

"초원에서 대족장이라고 떠받들어주니 자신이 일국의 왕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걸까요."


그리 말하며 수근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말은 안 해도 떡하니 선두를 차지하고 있는 리파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가볍게 혀를 차는 이들도 존재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리파의 차림새 때문이었다.


성도로 입성할 때 입고 있었던 망토들을 벗어던지고 독특하기는 하지만 단정한 느낌을 풍기는 유목민족의 전통복장으로 갈아입은 수하들과는 다르게 선두에 선 그녀는 여전히 예의 그 흰 모피망토를 몸에 두르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그것 뿐만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소란스럽지는 않았을 거다.


겨울에도 따뜻한 대초원에서 온 이들이니만큼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추위를 더 심하게  수도 있는 거니까. 본인이 춥다는데 망토  두를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가 있다면 리파가 망토 뿐만이 아니라 거기에 달린 후드까지 푹 눌러쓴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러니 다들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동맹에 가담하겠다고 찾아온 년이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는 꼴이니 말이다.


리파라고 그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꿋꿋했다.


니들은 짖어라 난 계속 이러고 있을테니,  그리 말하는 듯한 태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리파가 마침내 우리의 앞에 섰다.

걸음으로 따지면 한 스무 걸음 정도?


그 정도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 멈춰선 리파가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레이시아와 바이올렛, 성녀를 순서대로 훑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내려앉게된 침묵을 깨뜨린  다름아닌 성녀였다.

삼국동맹의 수장은 그녀가 아니고 바이올렛이지만 그래도 이곳은 교국 아닌가. 그리고 어찌보면 리파는 교국을 찾은 손님이라   있었다.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교국의 수장된 자로써 다른 이들처럼 계속 입  닫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어서오세요. 교국은 초원에서 온 손님을 환영한답니다."


아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기까지 한 성녀가 리파를 향해 살짝 몸을 숙여보였다.

영향력 면에서만 보면 바이올렛이나 레이시아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성녀가 그런 식으로 정중하게 환대를 해주니 기싸움이라도 하듯 입을 꾹 다물고만 있던 리파도 차마 계속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일까.

"처음 뵙겠습니다. 성녀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몰골과는 달리 사뭇 정중한 리파의 어조에 성녀가 싱긋하고 미소를 지었다.

"준비해드렸던 숙소는 어떻게 불편하진 않으셨을지 모르겠네요."


"덕분에 편히 쉴 수 있엇습니다."


"그러시다니 이제  마음이 놓이네요."


다시 한 번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인 성녀가 리파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어찌보면 뜬금없다 할 수도 있는 발언이었지만  말을 들은 리파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감사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아니요. 사교도 척결이라는 대의에 이렇게 선뜻 손을 보태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걸요."

"손을 보태게 될지 어떻게 될지는 지금부터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의지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부디 좋은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네요."


"제 바람도 그렇습니다."

리파의 입에서 그런 발언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불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성녀와 리파 사이를 가로질렀다.

"정말로 그러길 바란다면 그 수상쩍은 몰골부터 좀 어떻게 해야하는 거 아닌가?"


불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

그에 안 그래도 조용하던 회합장 안으로 쥐라도 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단 한 순간에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


허나  누구도 그 사태를 촉발시킨 장본인을 탓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게 자리에 있는 이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으니까.


뭐, 그것도 그거지만 그런 발언을  장본인의 지위 탓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 방금과 같은 발언을 입밖으로 낸 이보다 높은 지위에 있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이는 딱 한 명 뿐이었으니까.


그랬다.


불퉁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를 낸 건 다름아닌 바이올렛의 옆을 지키고 있던 바이올라였다.


그렇기에 그녀를 확실하게 제지할 수 있는 것도 바이올렛 뿐이었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옅은 미소를 얼굴 위에다가 띄워놓은 채 방관자의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동맹에 가담하겠다고 찾아와 놓고서는 그렇게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으면 믿어주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아무래도 사교도 놈들한테 데인 게 있다보니 리파를 향해 그리 말하는 바이올라의 모습은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어쩌면 이것도 그 간악하기 짝이 없는 사교도 놈들의 수작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뭐, 그런 바이올라의 모습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그녀가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기도  뿐더러 사실 저게 맞는 태도였으니까.


자기도 동맹에 참가할 수 있겠냐고 찾아온 년이 계속 얼굴을 꽁꽁 싸매고 있다?

나라도 의심부터 하고 봤을 거다.


물론, 리파는 딱봐도 높아보이는 바이올라의 지적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하기는 커녕 오히려 태연하기까지 했다.

"아, 이런 긴장한 나머지 제가 결례를 저지르고 말았군요."


원래는 들어오자마자 후드를 벗을 생각이었는데 그걸 잠시 깜빡 잊고 있었던 사람마냥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낸 리파가 망토 안에 숨기고 있던 손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그것을 들어올려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 쪽으로 향했다.

만약 뭔가 일을 벌인다면 이만한 타이밍도 또 없는 상황.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각국 대표의 곁을 지키고 있던 호위책임자들이 자세를 살짝 낮추며 몸을 긴장시켰다.


혹시라도 리파가 수상한 행동을 보이기라도 하면 그대로 뛰쳐나가 그녀를 제압하기라도 할 것처럼.

무슨 의미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는 그 노골적인 몸짓에 반응한 것일까.


리파의 뒤로 시립해있던 그녀의 수하들이 질 수 없다는 듯 투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태연하게 자리할 수 있었던 건 딱 셋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던 나.

그런 나와 합의한대로 행동하고 있는 리파.

그리고 마지막으로ㅡ

-흐음,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렇게까지 거창하게 일을 벌이는 걸까?

이 모든  전부 의도된 상황에 불과하다는 걸 진작에 눈치챈 상태인 바이올렛까지.

그렇게 딱 세 명만이 그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도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표정까지 태연한 둘과는 다르게 난 겉으로만큼은 바짝 긴장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긴 했지만.

느릿하게 움직이던 리파의 손이 멈추었다.

그렇게 손을 멈춘 그녀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제 수하들을 단속하는 것이었다.

"그만."

주어도 동사도 전부 생략된 짤막하기 그지없는  마디.


그 한 마디는 절대적이었다.


그게 홀 안으로 울려퍼진 순간 천적을 앞에 둔 늑대들마냥 사납기 그지없는 기세를 흩뿌리고 있던 그녀의 수하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세를 바로했으니까.

"바이올라 너도 그쯤하렴."

그런 리파에게 호응하듯 바이올렛이 바이올라를 제지하고 나섰다.


물론, 바이올렛의 말또한 절대적이었다.

바이올라는 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게된지 오래니까.

"동생의 무례에 대해 사죄드리고 싶군요. 하지만 그대도 이해해주길 바래요. 우리가 사교도 놈들한테 이래저래 쌓인 게  많거든요."

"괜찮습니다. 어찌보면 제가 실수한 탓도 있으니까요."


"혹시 얼굴을 숨겨야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ㅡ"


스륵-

보드랍고 가느다란 털들로 이루어진 무언가가 그만큼 보드라운 무언가를 스치는 소리가  안으로 울려퍼졌다.

리파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가 뒤로 젖혀지며 난 소리였다.

"제 측근이 몇 번이나 당부하더군요. 홀몸도 아니니 되도록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말이죠."

여러모로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발언과 함께 리파의 후드가 완전히 걷힌 순간, 그리하여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순간ㅡ


'지금.'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정말 놀란 사람처럼 신세를 지고 있던 의자를 발뛰꿈치로 떠밀기까지 하면서.


효과는 확실했다.

내 몸에 떠밀리고, 내 발과 부딪히기까지 한 의자가 쿠당탕탕하고 요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바닥을 나뒹굴었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난 아랑곳하지 않고 아까 전부터 속으로 열심히 되뇌이고 있던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리파..님?"


크게 놀란 나머지 의자 넘어지는 소리마저 듣지 못한 사람마냥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얼굴 위에다가 띄운 채 눈을 살짝 떨어보였다.

"..이안?"

그런 내 모습을 보고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다름아닌 옥좌에 앉아 내 옆을 지키고 있던 레이시아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내가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니 당혹스러웠던 것일까.


 이름을 부르는 레이시아의 목소리 안에는 당혹감이라는 감정이 그득하게 담겨있었다.

레이시아가 그 정도인데 다른 이들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 바이올렛만 빼고 다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지 않을까. 그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다시 한 번 리파의 이름을 불렀다.


"리파 님 맞으시죠?"


"음..? 그대는 대체.."

"접니다..! 이안! 그때 잡혀있던 절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그대가 이안이라고? 내가 아는 이안은 그대처럼 어리지 않다만."


리파의 연기는 생각외로 뛰어났다.

날 보며 표정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게 누가봐도 사칭범을 바라보는 사람의 그것이었으니까.


"그, 그건.. 사정이.."

"헛소리."


그렇게 내 말을 일축한 리파가 얼굴을 확 구겼다.


그러더니 숫제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표정하고 목소리만 보면 정말 엄청난 모욕이라도 당한  같은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이안을 사칭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좋은 말로 이쯤에서 멈추지 그래."


"사칭이 아닙니다..! 그때 분명 미약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던 절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내가 아는 이안은 그대처럼 유약한 사내가 아니야.  아이의 아비를 사칭하는 건 그쯤하도록."

"..네?"

싸늘하기 그지없는 리파의 발언에 안 그래도 싸늘하던 회합장 안의 분위기가 더욱 싸늘해졌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그 분위기를 만끽하면서 억울함에 호소하는 듯한 표정을 얼굴에서 지우고 대신 아까처럼 당황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꼭 마치 생각치도 못한 말을 전해듣기라도 한 것처럼.

"지, 지금 아이라고 하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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