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37)화 (336/366)



〈 33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산책할 생각에 벌써부터 아랫배가 욱씬욱씬 거리기라도 하는가 보다.

몸이 잔뜩 달은 레이시아는 그대로 회합장으로 향하려했다.


물론, 그러지 못하도록 만류했다.


오늘 일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느긋하게 산책을 즐기고 싶다라는 마음이야 나도 똑같았기에 그런 레이시아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으니까.


성역을 빠져나오기 전에 내 방에서 살짝 괴롭힘을 당한 탓에 지금 레이시아의 팬티는 살짝 젖은 상태였다.

헌데 이대로 회합장으로 향한다?

그곳에 바이올렛과 바이올라가 자리하고 있을 거라는 걸 뻔히 아는데?

다른 이들이야 레이시아의 팬티가 젖어있든 말든 그게 오줌만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테지만 그 둘은 아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레이시아가 회합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치챌테지.


그만큼 레이시아에게서 음탕하고 야한 냄새가 풀풀 풍길테니까.


그리되는 것만큼은 피할 필요가 있었다.

까딱 잘못하면 질투심에 눈이 살짝 돌아간 바이올렛이 내가 몸을  바쳐서 준비해놓은 판을 에라 모르겠다하고 엎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리 된다면  끝은 아마도.. 파국 뿐이겠지.

깔끔하게 칼빵맞고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최악의 경우는 어딘가에 감금되어 목숨줄이 삭아서 끊어질 때까지 생체딜도로 쓰이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누군가는 그런 꼴이 되더라도 레이시아같은 미녀들과 한 번이라도 관계를 맺을  있다면 그 신세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 누군가가 적어도 난 아니었다.

그게 어디 사람사는 꼴인가.


그건 물건이지 사람이라  수 없었다.

곧바로 회합장으로 향하려는 레이시아를 만류했던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구체적으로 지적할 필요는 없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다보니  수 있는게 슬쩍 언질을 주는 것 밖에 없었는데 그것만으로도 레이시아는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렸으니까.

"아, 회합장으로 향하기 전에 잠시 숙소에 들려야겠구나."

"예? 숙소에는 어쩐 일로ㅡ"


"생각해보니 놓고 온 게 있어서 말이야."

"그러면 사람을 보내 가져오라 하시지요."


"아니다. 어차피 시간도 남지 않았더냐. 산책하는 기분으로 느긋하게 들렸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리 말한 레이시아가 일찍 가봐야 정해진 자리에 앉아 지루하게 기다리는 것밖에 더하겠냐는 말을 스리슬쩍 덧붙였다.

다른 이도 아니고 레이시아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밑에 있는 이들은 그녀가 까라는 대로 까는 수밖에.

그렇게 숙소에 들린 레이시아가 질척하게 젖은 속옷을 갈아입는 동안  하나 불편한 점이 있다면ㅡ

'얼굴 뚫리겠네..'

다름아닌 우리  호위대장님의 눈빛이었다.


솔직히 보자마자 알  있었다.

그녀가 디아나의 어머니라는 것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녀의 모습 곳곳에서 디아나의 모습이 엿보였으니까.

다만, 딱 하나 인상만큼은 극명하게 달랐다. 디아나가 순둥순둥한 강아지같은 느낌이라면 어머니 쪽은 완고하기 그지없는 인상이었으니까.

쉽게 말해서 꼰대상이라고 해야할까.

지금은 꾹 다물어져 있는 저 입이 열리면 왠지 모르게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아까부터 왜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일까.

차라리 뭐라고 말이라도 하면 덜 불편했을텐데.

입을 열어 무어라고 말은 하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는 탓에 부담이 어마어마했다.


왠지 모르게 디아나를 생각나게 하는 눈으로부터 지그시 날아와 꽂히는 눈빛이 뭐랄까ㅡ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자 하는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검 말고 다른 건 잘 모르기도 하고, 관심도 없던 자신의 딸내미를 꾀어낸 불여우 놈을 노려보는  같기도 했다.

'허이구야..'

맘 같아서는 뭘 그렇게 열심히 쳐다보는 거냐고  마디 톡 쏘아붙여주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가 디아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내가 저지르고 쌓아온 각종 업보들을 전부까지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더라도 힘이 닿는 한 최대한 수습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은 이상 지금 열심히 날 노려보고 있는  여성은 언젠가는 내가 마주해야할 상대였으니까.


물론, 빌든 읍소를 하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문제긴 하지만 그래도 괜히 안 좋은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해서 내 딴에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을 십분 활용해 그녀가 아무리  노려봐도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지 않으려 노력했는데ㅡ


어째선지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시선이 전보다 더 무거워졌다.

그것도 모자라 미동조차 없었던 아까와는 달리 눈 부근이 꿈틀꿈틀대며 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볼 때나 보일 법한 반응이라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설마 알랑거리는 걸 혐오하는 스타일인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동시에 생각했다.


이 자리에 디아나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만약 그녀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디아나가 자신의 어머니를 많이 신경쓰는 성격이라는 것쯤은 평소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들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어려워했다. 어머니가 아니라 엄청나게 어려운 선배를 대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어머니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계속 안절부절 못했겠지. 다른  몰라도 그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아는 디아나니까.

대충 그걸 반복하다보면ㅡ


'눈치채는 거지.'

자신의 어머니가 나라는 존재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디아나는 과연 어떤 식으로 행동했을까.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대인 어머니를 상대로 내 편을 들어주려고 했을까.

아니면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였을까.

그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라면 당연히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자신감은 있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를 어느 정도로 어렵게 여기는지 까지는 알지 못했으니까.


뭐, 확실한 건 디아나가  중에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게 정답이 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다른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절대 양보할  없다는 다짐을 품고 난생처음으로 어머니와 맞서는 쪽을 택했다면?

지금도 충분히 사납게 느껴지는 눈빛이 철천지원수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겠지.

그렇다고 어머니의 눈치를 봤다면?

그녀의 어머니는 그건 그것대로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다. 여자답지 않게 남자를 손 안에 넣고 휘두르지는 못할 망정 남자 눈치나 본다고 생각했겠지.


거기에 그런 디아나의 선택을 두고 내가 느겼을 섭섭함은 덤이고.

그러니 디아나는 차라리  자리에 없는 게 나았다.


뭐, 그것도 회합장에 도착하는 순간 끝이겠지만.


말해 무엇하랴.


디아나는 회합장의 안전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한 발 앞서 그곳에 가 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이 일행이 회합장에 도달하는 순간 시어머니와 딸, 그리고 사윗감이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삼각관계가 시작될테지.


그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골이 지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리파와 입을 맞춘대로 연기를 할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골이 땡기는데 그런 것까지 신경써야 하다니.

'다 내 업보지 뭐 시발..'

지켜보는 눈이 있어 차마 겉으로까지 그러진 못하고 아쉬운대로 속으로나마 '푸흐..'하고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놓고온 것좀 챙겨오겠다며 방 안으로 들어갔던 레이시아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묘하게 불안해보이던 아까와는 다르게 이쪽을 향해 성큼 내딛어지는 걸음걸이에서 자신감이 느껴지는  보면 질척질척하던 것을 벗고 뽀송뽀송한 걸로 갈아입고 나온 모양.

"찾으시던 건ㅡ"

"아, 챙겼다. 그러면 가지."


보란듯이 주머니를 팡팡 두들겨댄 레이시아가 앞장 서라는 듯 디아나의 어머니를 향해 고개를 까딱거렸다.


딸뻘임을 고려하면 일견 시건방지게 비춰질 수도 있는 모습.

그럼에도 디아나의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살짝 숙여보이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숙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과 다시 합류해 오늘 회합이 예정되어있는 회합장소로 향했다.

회합장소로 써먹기 위해 바이올렛이 교국 측에게 대관을 요청한 곳은 화려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거대한 홀이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연상케하는 알록달록한 창문을 통해 쏟아져내려오는 가지각색의 빛들이 홀 안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그리고 길게 쭉 뻗은 홀의 끝에는 옥좌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의자가 정확히 세  놓여져있었다.


"흠, 나름 느긋하게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좀 일렀던 모양이야."

 개의 옥좌는 아직  하나밖에 채워져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있는 이는 다름아닌 성녀였다.


아무래도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공적인 자리다보니 성녀는 평소 날 치료해줄 때와는 달리 처음 봤던  날처럼 회색의 천으로 온몸을 칭칭 동여매고 있었다.

물론, 당연히 베일까지 푹 눌러쓰고 있어서 그녀가 지금 이 순간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시선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아무래도 그녀는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왠지 모르게 눈이 마주쳤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무섭게 거대해도 너무 거대한 옥좌가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라도 한 건지 묘하게 몸을 꼼지락대고 있던 성녀가 흠칫하고 몸을 떨었다.

대체 왜 저러나 싶어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니 잠시 멈춰서서  안의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고 있던 레이시아의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일단 가서 앉지.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야."

뒤를 따르고 있던 이들에게 잘 들으라는 것처럼 말한 그녀가 이내 옥좌가 자리하고 있는 홀의 끝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각자 어디에 앉을지 미리 얘기가 끝난 상태였던 걸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레이시아가 맨 왼쪽에 자리하고 있던 것 위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더니 그녀의 뒤를 따라 움직이던 이들이 그 옥좌 주변으로 자리를 잡는 사이 날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계속 서 있기 힘들테니 의자라도 하나 놓아주마."


물론,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면 힘들 것 같긴 했으니까.

그렇게 마련된 곳에 내가 엉덩이를 붙이고 나서야 마지막 옥좌의 주인이 홀 안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동생인 바이올라를 옆에 대동한채 나타난 바이올렛의 움직임은 오늘따라 굉장히 조신했다.

마치, 이제 막 배 안에 자리를 잡은 무언가를 엄청나게 신경쓰는 듯한 움직임이라고 해야할까.


아직 배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만삭의 임산부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물론, 밖으로 내지 않고 새어나오려고 하는 족족 다시  안으로 삼키긴 했지만.

보는 내가 다 답답할 정도로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던 바이올렛이 마침내 우리 앞으로 도착했다.


그런 그녀를 맞이하기 위해 미리 자리를 잡고 앉아있던 둘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어서와요. 바이올렛 양."


아무렇지도 않은 투로 내뱉어진 것은 다름아닌 레이시아의 것이었고, 아주 살짝 망설이다가 입을  것은 다름아닌 성녀였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착각 속에 빠져있는 것일까.


아무튼 자신을 향해 건네진 인사에 바이올렛이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그녀의 얼굴 위로 정체모를 도취감이 맴돌았다.


"두 분도 안녕하신가요."


어떤 느낌이냐면 한참 앞서나간 이가 뒤조차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으스대는 듯한 느낌?


그걸 숨길 생각도 안 하고 한 발 앞서 도착한 둘과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던 그녀가 이내 내쪽으로 시선을 던져왔다.

그래서 분명 내게 말을  거라 생각했는데ㅡ


그게 끝이었다.


딱 한 번, 내게 시선을 던진 바이올렛이 몸을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바이올라가 그런 바이올렛의 옆에 자리를 잡은 순간ㅡ

홀의 입구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들이 우렁차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리파가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홀을 따라 메아리치는 그녀들의 목소리에 티나지 않게 입 안쪽의 살을 짓씹었다.

그렇게 통증을 이용해 정신을 각성시키고는 속으로 되뇌었다.


'자아..'


연기할 시간이다.


라고.


마침내.

종장일지도 모르는 것의 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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