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리파와의 이야기를 끝마치고 성역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곳을 빠져나오니 건물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내 앞으로 튀어나온 바이올렛의 수하가 날 바이올렛의 앞으로 안내하려 했다.
"황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정중하지만 한편으로는 선뜻 거부하기 힘들 정도로 위압적이고 단호한 목소리.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상대로 난색을 표했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는데.."
동시에 입밖으로 뱉은 말은 바이올렛의 초대를 피하려는 목적으로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니었다.
실제로 늦은, 아니 늦은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이르다'라는 말이 더 어울릴만한 시간대였으니까.
누군가는 한창 꿈나라를 헤매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시간.
아무리 바이올렛이라도 이 시간까지 날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 듯 해서 그리 말했던 것인데 안타깝게도 바이올렛이 보낸 시녀는 자기가 모시는 주인의 수면시간보다도 주인의 명령 쪽이 더 중요한 듯 했다.
"언제든 상관없으니 끝나는대로 바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가야지 뭐.
왠지 헛걸음만 하게될 가능성이 농후해서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으려니 이쪽을 향해 정중하게 몸을 숙이고 있던 바이올렛의 수하가 자세를 바로하고는 몸을 돌려 날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따라 걷고 또 걸은 끝에 마침내 바이올렛의 방 앞에 도달한 순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바이올렛이 언제든지 상관없으니 데려오기만 하라고 명령했던 이유를.
굳게 닫힌 문 아래에 자리한 얇은 틈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방의 주인이 단 한숨도 자지 않고 내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하이고야..'
덕분에 살짝이지만 골이 지끈거렸다.
저걸 미련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집착이 강하다고 해야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 기다리더라도 눈은 좀 붙이고 있을 것이지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란 말인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으로 떠오르기 무섭게 깨달았다.
리파와의 대화가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아마 리파와 대화를 나누기 전이었다면?
이런 생각도 안 했을 것이다.
그냥 어이없어하고 끝냈겠지.
그런데 지금은 살짝이지만 짜증이 났다. 그리고 그 짜증은 날 자꾸만 독점하려 하는 바이올렛의 행동으로 인한 것이 아닌 그녀의 미련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랬다.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나는 바이올렛의 몸을 걱정하고 있었다.
뭐, 바이올라를 간단히 찜쪄먹을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불가사의한 무력을 지닌 바이올라이니만큼 고작 하루 정도 밤을 샜다고 크게 탈이 나거나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더라.
이제 노크하고 들어가면 된다는, 날 여기까지 안내해준 여성의 말을 싸그리 다 무시하며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밀고 들어갔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그렇게 들어간 방 안에서 바이올렛은 업무용 책상에 앉아 손에 든 서류를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뭔 놈의 서류를 그리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처리가 끝난 것들만 모아놓은 듯한 서류의 탑이 적지 않은 높이를 자랑하고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날 기다리면서 동맹과 관련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던 모양.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내가 낸 소리에 반응해 슬쩍 고개를 들어올렸다.
바로 그 다음이었다.
많이 피곤한 듯 평소보다 한결 누그러진 선을 그리고 있던 그녀의 눈이 살짝 커졌다.
대체 내 무엇이 그녀를 그토록 놀라게 만든 것일까.
지금 내가 짓고 있는 표정? 아니면 평소와는 다르게 노크조차 하지 않고 몸부터 밀고 들어와서?
둘 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식으로 놀란 표정을 하고 있던 바이올렛이 이내 피식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에게 떠밀린 것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집무용 책상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창문 앞까지 쭉 밀려났다.
"아예 자고 올 줄 알았는데 그래도 돌아오긴 돌아왔네?"
"앉아요."
"그런데 참 이상하단 말이지.. 짜증을 내야하는 건 분명 난데 왜 네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그런 식으로 바이올렛은 내게 묻고 있었다.
네게 화를 낼 자격이 있는 것 같냐고.
물론, 가뿐하게 무시하고는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한숨도 안 잤죠?"
"보다시피 일이 좀 많아서."
"거짓말."
단호하게 일갈하고는 이용해주는 사람 없이 홀로 방치된 침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는 그 끝에 걸터앉아 침대를 팡팡 소리가 나도록 두들겼다.
당연히 잔말말고 이리 오라는 뜻이었다.
평소에 내가 이랬다면 바이올렛은 후후하고 웃으며 흡족해하는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을 것이다. 겸사겸사 예의 그 탐스럽고 풍성한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어댔을 것이고.
허나 지금 그녀에게서 그런 모습은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신 눈을 가늘게 뜬채 날 지그시 바라보기만 할뿐.
그런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사실상 분노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기라고 해야할까.
"흐음.. 대체 거기서 무슨 짓을 했길래 오늘따라 이렇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걸까?"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지레 찔려서 이러는 거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뭐, 어느 정도는 사실이긴 했다.
찔리는 게 아예 없냐면 그렇지도 않았으니까.
허나 내가 지금 이러는 건 어디까지나 답지않게 피로에 푹 절어있는 바이올렛을 걱정해서였다.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날 기다렸을지, 무슨 생각들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을지 이제 알 것도 같았으니까.
"얼른."
해서 단호하게 그리 말하니 바이올렛이 흐음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일단 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잡아당겨 침대 위로 쓰러뜨리는 건 생각했던 것만큼 어렵지는 않았다.
저항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내가 잡아당기는대로 순순히 끌려왔고, 순순히 쓰러져주었으니까.
그렇게 침대 위로 풀썩 드러눕게된 바이올렛의 팔을 팔과 겨드랑이를 이용해 단단히 포박한 뒤 다른 손으로 이불을 끌어와 우리 둘의 몸 위로 덮었다.
"자죠."
설마하니 내가 말 그대로 잠을 자자고 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것일까.
아까부터 줄곧 가늘게 좁혀져있던 바이올렛의 눈이 아주 잠깐이지만 원래 크기에 가까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피곤할 거 아니에요."
"뭐야, 설마.. 걱정해주는 거야?"
"그럼, 다른 건줄 알았습니까?"
"응, 난 또 지레 찔려서 몸으로 때우려고 하는 줄 알았지."
"표식 때문에 이미 알고 있잖아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거."
"알지."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대답에 순간 어이가 없어졌다.
"아니, 그걸 아는 사람이.."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냐고?"
이 말 하려던 게 맞냐는 투로 던져진 바이올렛의 물음에 살짝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이올렛 쪽에서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렇게 포옥하고 한숨을 내쉰 그녀가 내게 포박당하지 않은 손을 이용해 내 볼을 살살살살 쓰다듬기 시작했다.
"네가 내 입장이었다고 해도 그랬을 걸."
"안 그랬을 걸요."
"아니, 분명 그랬을 거야. 지금까지 괜찮았다고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바이올렛이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꼭 명심히라는 듯 제법 엄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며 내 볼을 쓰다듬고 있던 손을 이용해 그것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더니 이내 '푸흐-!'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리더라.
"참 신기하단 말이지."
"또 뭐가요. 그런 말 할 시간 있으면 눈이나 감으시죠."
불퉁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내 말을 바이올렛은 착실하게 따랐다.
평소보다 살짝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륵 밑으로 내려가며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닮은 호박빛 눈동자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그녀가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짜증이 마구마구 치솟았는데 말이야.."
볼을 꼬집고 있던 손은 어느새 다시 볼 위를 노닐고 있었다.
"지금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흡족해."
별 것도 아닌 말 몇 마디 떄문에 이럴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며 바이올렛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은 바이올렛의 옆에 꼭 붙어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그런데 말이야."
잠들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연신 고른 숨소리를 내뱉고 있던 바이올렛이 방금 막 생각이 났다는 것처럼 입을 열었다.
거기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직감했다.
운명의 순간이 도래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 대족장하고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했던 거야?"
내심 가장 경계하고 있던 질문이 살짝 벌어진 연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 순간 가슴 안쪽에서 뭔가가 덜컥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었거든요."
"물어보고 싶은 거라니?"
"별거 아니에요. 애초에 이제 그럴 필요도 없어졌고."
말을 얼버무리는 척을 하니 열심히 볼을 쓰다듬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별거 아닌게 뭔데."
"..꼭 알아야 겠어요?"
"응."
"하.."
슬쩍 한숨까지 내쉬었음에도 바이올렛은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내게는 나름대로 긍정적인 신호였다.
"내가.. 유목민족한테 포로로 잡힌 적이 있는 건 알고 있죠?"
설마 그럴 이야기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걸까. 벌어져있던 바이올렛의 입술이 살짝이지만 굳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도와줬던 사람이 있어요. 아니, 사람들이라고 해야하나.."
그렇게 운을 떼고서는 리파와 열심히 입을 맞춘 이야기를 바이올렛의 귓속으로 흘려넣기 시작했다.
물론, 리파가 내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는 사실만큼은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그건 아직 밝힐 타이밍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리고 그게 바이올렛이 내 이야기를 모두 듣고는 내뱉은 말이었다.
"말했잖아요. 그때 날 붙잡고 있던 부족을 공격해 날 그곳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해준 사람과 대족장이 동일인물이었다고."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에 모르는 척 의문어린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이니 어느새 슬그머니 밑으로 내려온 바이올렛의 손이 내 물건을 움켜쥐었다.
"대체 뭘 숨기고 있길래."
"..."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대본을 읊어대는 걸까? 응?"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예상했던대로 바이올렛에게는 통하질 않는 모양이다.
뭐, 솔직히 놀랍지도 않았다.
이 정도야 충분히 예상범위 내였으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내가 해야할 대응은..
"저한테 아이가 있다네요."
정면돌파였다.
그리고 그걸 택한 덕분에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바이올렛이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말이다.
아무리 그녀라 해도 설마 거기까지는 예상 못했던 것일까.
무슨 일이 있어도 뜨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바이올렛의 두 눈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에 번쩍하고 뜨였다.
그 아래 감춰져있던 호박빛 눈동자 속에는 이미 흉흉하기 짝이 없는 빛이 맴돌고 있는 상태였고.
"농담하는 거면 재미없는데."
물론, 말은 그리 했지만 바이올렛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농담으로 그런 말을 했을 리 없다는 걸.
그러니까 이건 협박이었다.
방금 내뱉은 말을 없었던 걸로 하라는 협박.
그것이 사납게 변한 바이올렛의 눈빛과 함께 얼굴로 푸욱하고 날아와 박혔다.
그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선을 슬쩍 내리깔았다. 최대한 서글프게 보일 수 있도록.
그런 내 모습에 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그래서 뭐? 놓아달라고? 아이도 있으니까?"
아까 그토록 흡족해하던 사람과 동일인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버석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바이올렛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게 억지로 쥐어짜낸 것처럼 느껴졌던 건.. 꼭 기분 탓만은 아니었겠지.
"설마 놓아줄 거라고 생각했어?"
어느새 내 팔을 떨쳐낸 바이올렛이 내게서 몸을 떨어뜨리더니 그대로 몸을 일으켜 내 몸 위로 올라탔다.
"내가?"
어느새 가슴팍을 짚은 그녀의 두 손이 입고 있던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너를?"
찌이이이익-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마침 잘 됐네."
툭ㅡ
바이올렛의 손에 잡혀있던 천쪼가리같은 것이 저 뒤로 날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그래도 그동안 그토록 해댔는데 영 소식이 없는 게 걱정이었거든."
어느새 바이올렛의 입꼬리는 위를 향해 말려올라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가 있다는 건 정상이란 소리잖아?"
내게 보란듯이 딱 한쪽만.
"이미 첫째도 있으니까.. 하나 쯤 더 생겨도 문제 없겠네?"
날카로운 미소.
그 미소와 함께 입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벗어던진 그녀가 그대로 내 물건을 제 안으로 밀어넣었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엉덩이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삐걱삐걱하고 우리 둘을 받치고 있던 침대가 비명을 질러댔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가 다시금 가라앉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