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허나 곧 자연스레 깨닫게 되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해도 지금은 뭐라도 해야되는 상황이라는 걸.
물론,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몇 가지 남아있긴 했다.
이를테면 저토록 뱃속의 아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리파가 만삭의 몸으로 여행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결정을 내리게된 동기같은 게 그랬다.
아직 물어보진 않았지만 분명 리파 본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위험한 결정인지를 말이다.
그럼에도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그게 뭘까.
어쩌면 민감한 질문일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니 돌아온 것은 쓴웃음이었다.
역시나 리파도 자기가 한 결정이 아이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얼마나 위험한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었던 모양.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럼에도 그녀는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부족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내게는 훨씬 더 위험하게 느껴졌거든."
"그 말은.."
"짐승이 가장 약해지는 때가 언젠줄 알아?"
그거야 당연히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지금 리파의 몸 상태에 빗대서 생각해보면 당연히 출산 직전과 직후를 말하는 것이겠지.
"많게는 3일에서 4일에 한 명, 적게는 일주일에 한 명씩이었어."
대충 그 속도로 죽어나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리파의 시중을 담당하는 이들이 말이다.
그리고 그 속도는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가 가까워질수록 점차 빨라졌다고 한다.
당연히 범인을 찾아보려고도 해봤단다.
허나 그럴 때마다 잡힌 건 몸통조차도 아닌 꼬리에 불과한 것들 뿐이었단다.
잡힌 년들을 심문해봐도 얻을 수 있었던 건 증오어린 눈빛밖에 없었다고 하고.
"불안했어."
당연히 그랬을 거다.
전부 다 미수에 그치긴 했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까.
덕분에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단다.
그리고 점점 초췌해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다못한 측근 중 하나가 제안을 했단다.
듣자하니 대초원 밖에서는 왕국하고 제국, 교국이 손을 잡고 삼국동맹이니 뭐니하는 걸 만들고 있다는데 거기에 가담하는 척 하며 그쪽에 잠시 몸을 의탁하는게 어떻겠냐는 식으로 말이다.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 제안이었고 그렇기에 리파는 고민 끝에 측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리파가 내 소식을 듣고 동맹 가담을 결정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건 말 그대로 내 착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녀가 '영웅 이안'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된 건 대초원을 나와 왕국을 가로지르던 와중이었단다.
"결과적으로 너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으니까.. 아이도 무사하고.."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과연 이게 맞는 선택이었을지 불안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잘 선택한 것 같다고 살포시 미소를 지어보이는 리파의 모습에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그.. 혹시.. 만져봐도 돼요?"
잠시간 그러고 있다가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고 하질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미소를 머금고 있어 환하던 리파의 얼굴이 이 이상 환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활짝 피어났다.
"응..! 당연하지!"
당연히 그래도 된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리파가 맞은 편에 앉아있는 내가 조금이라도 편하게 만질 수 있도록 앉은 자리에서 허둥지둥 하길래 손을 들어 만류했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옆자리로 옮겨앉았다.
"자."
리파가 날 맞이하듯 스스로의 배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어냈다.
그녀의 몸을 덮고 있던 모피로 된 망토가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팔을 따라 스르륵 걷혔다.
그와 함께 눈앞으로 등장한 것은 굉장히 편해보이는 옷으로 덮여있는 볼록한 배였다. 망토를 담요 삼아 덮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망토를 걷은 채로 확인해보니 과연 리파의 배는 예전의 모습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부풀어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입으면 펑퍼짐해서 흘러내릴게 분명한 것이 나름 팽팽하게 당겨져있는 모습이 내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안 만져봐?"
이윽고 귓가로 흘러들어온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레 그 위에다가 손을 올려보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두텁기 그지없는 망토로 덮여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안에 있는 또다른 생명의 온기가 리파의 체온에 더해졌기 때문일까.
따뜻했다.
사람 몸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읏..!"
그렇게 볼록하게 부풀어오른 배에 손을 올려놓고 있으니 편하게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리파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지더니 그녀가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아, 아파요?"
"아니, 그런 거 아냐."
미소 한 방으로 내 우려를 불식시킨 리파가 싱긋 웃으며 애매한 곳에 머물러있던 내 손 위에다가 자신의 손을 포갰다.
그러더니 그것을 그대로 중앙을 향해 이끌었다.
그러자 손바닥으로 착하고 감겨든 것은 아까보다 한결 진해진 것같은 온기와..
그 안에 하나의 생명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일러주기라도 하는 것같은 태동이었다.
"아빠를 알아봤나봐. 여태껏 잠잠하더니 갑자기 이러네."
정말, 정말 그런 걸까.
"어때? 대단하지? 분명 자라서 대초원의 모든 부족을 이끄는 위대한 족장이 될 거야."
확실히.. 순간적으로 손바닥으로 착하고 감겨들었던 힘이 대단하긴 했다.
아직 세상에 나오지도 않은 아이가 낸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름은.."
"정해놨는데 들어볼래?"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니 리파가 싱긋 웃으며 생각해둔 아이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이린."
"여자.. 아이인가요?"
"응, 주술사의 말에 따르면 그렇대."
아이의 성별까지 알게 되니 기분이 더욱 복잡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는 것 같기도 하며, 이상할 정도로 초조하다고 해야할까.
그게 내 얼굴에도 그대로 드러났던 것일까.
줄곧 밝은 모습만 보이던 리파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흐려졌다. 동시에 그녀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찬물이라도 뒤집어 쓴 것마냥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생각하는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그런 표정 하지마요."
지금 리파가 저런 표정을 한채 내 눈치를 보는 이유야 뻔했다.
혹시라도 내가 아이를 부담스럽게 여기면 어쩌나 걱정이 되서 그런 거겠지.
물론, 그렇게 여겼던 적도 있긴 했다. 멀리갈 필요 없이 바로 얼마 전까지는 그랬으니까.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또한 내가 감당해야할 일이라면 기꺼이 책임질 생각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시급하게 해야할 일들이 몇 개 있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리파에게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고.
"잘 들어요. 리파."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이번만큼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실대로 나가기로 했다.
그렇게 목이 갈증으로 쩍쩍 갈라질 정도로 기나긴 이야기를 리파를 상대로 털어놓았다. 그런 내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리파의 표정또한 시시각각 변해갔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한 적도 있었고,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지은 적도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한숨을 포옥하고 내쉬더라.
"뭐..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놀랍지는 않네."
정말일까.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믿기 힘들어서 그런 시선을 그녀를 향해 던지고 있으니 리파가 피식하고 웃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네가 평범한 남자들하고 다르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
"세상 천지 어느 남자가.. 자기 몸에다가 그런 짓을 하겠어? 그것도 스스로 말이야."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내가 그녀를 떠나던 순간 선보였던 바를 정자 퍼포먼스가 꽤나 인상깊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무튼 이대로 있으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거지?"
"네, 아니.. 응."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데? 생각해놓은 계획이라도 있어?"
당연히 있다.
다만 그걸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몇 가지 확인하고 넘어가야할 것들이 몇 개 있긴 했지만.
"그.. 혹시 부족들을 병합하는 과정에서 멸족시킨 곳도 있어?"
임산부, 그것도 만삭의 임산부에게 그런 질문을 하려니 뭔가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싶긴 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밀고 나갔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리스트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있기야 있는데.. 그건 왜?"
역시나 이런 류의 질문은 지금의 그녀에게는 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리파가 살짝 굳은 얼굴을 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멸족시킨 이유에 대해 물어도 될까?"
"..저항이 너무 심했거든."
안 그래도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니 주변 부족들에게 거역하면 어찌될지 알려줄 겸 그곳을 본보기로 삼았다고 한다.
그 말 덕분에 결정할 수 있었다.
누구를 악당으로 삼을 건지를.
희생당한 것도 모자라 명예까지 깎이게 될 이들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산 사람부터 살고봐야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 전에..
"그러고 보니까 날 풀어주는 대가로 왕국으로부터 받았던 물자는 어떤 식으로 회수했어?"
"장소를 정해놓고 그곳에 물자를 두고 가게 한 다음에 수하들을 시켜서 회수해오긴 했는데.."
"그 와중에 왕국 측 병사나 기사하고 마주친 적은?"
"없을 거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꼼꼼하게 확인하고 회수해왔다 그랬으니까."
그렇다고 하니 더욱 거칠 게 없어졌다.
악당을 맡아줄 이들은 정해진 상황.
그렇기에 남은 건 리파와 그녀가 이끄는 부족에게 부여할 역할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구원자.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리파에게 부여하고자 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다른 부족에 포로로 잡혀있던 널 구한 척을 하라고?"
살짝 설명이 부족했나 보다.
해서 스스로 맡을 배역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보이는 리파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어디까지나 덤이었던거지."
내가 대략적으로 나마 짠 시나리오는 이러했다.
난 리파네 부족이 아니라 리파의 손에 의해 멸족당한 부족에 포로로 잡혀있었고, 자꾸만 주변에서 얼쩡대는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리파가 수하들을 이끌고 해당 부족을 급습하는 과정 중에 우연찮게 날 구출한 거다.
그러니까 미약에 잔뜩 절여져있던 날 말이다.
리파는 내가 초원의 사람이 아닌 왕국민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곧바로 돌려보내려 했지만 내 상태가 워낙 심각해 그러질 못했고, 결국 시시각각 나빠지는 날 돕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와 관계를 맺은 것이고.
"그리고 내게 해당 부족에게 왕국의 물자가 들어갔다는 정보를 전해 듣게 된 네가 그 물자를 빼앗기 위해 해당 부족을 공격, 결국 그 부족은 항전 끝에 멸망해버리고 만 거지."
그런 식으로 그녀가 확실하게 머리속에 새기고 있어야할 사실들을 들려주니 리파의 표정이 어딘가 오묘하게 변했다.
일단 필요한 일이라고 하니 기억해두긴 하겠는데 과연 사람들이 이걸 믿어주긴 할지 의심하는 듯한 그런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형편좋은 이야기니까.
"걱정하지마. 믿기 힘든 이야기라도 믿게 만들면 그만이니까."
이게 최선이다.
그러니까 일전의 납치사태 같은 파국을 또다시 보지 않기 위해서는 말이다.
"그냥 리파 너는.. 내가 널 알아본 척을 하면 적당히 거기에 맞춰주기만 하면 돼."
그리 말하고는 그 정도는 할 수 있겠냐고 물으니 리파가 그 정도야 충분히 가능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렇게 되면 리파하고 말 맞추는 작업은 사실상 끝났고..
이 와중에 딱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그건 역시 바이올렛이었다.
내가 리파와 미리 접촉했다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녀는 내가 리파와 미리 접촉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고로 다른 이들은 어찌어찌 속여넘길 수 있어도 그녀만큼은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주지 않을 거다.
어쩌면 거기서 그치지 않고 훼방을 놓으려고 할지도 모르지.
리파가 내 아이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는 순간 그 독점욕의 화신이 가만히 두 손 놓고만 있을 리 없으니까..
그런고로 리파와 말 맞추는 작업이 얼추 끝이난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시급하게 처리해야할 건 역시..
'협상을 해야해..'
바이올렛이라는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그것의 뇌관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다.
옆에 앉아 내가 들려준 것들을 머릿속에 새기려는 듯 아까 했던 말들을 중얼중얼거리고 있는 리파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며 곰곰히 생각해봤다.
내 손에 들려있는 카드패들 중에서 어떤 카드를 내밀어야 바이올렛의 폭주를 최소화시킬 수 있을 지를.
그렇게 밤과 함께 고민이 깊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