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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332)화 (331/366)



〈 33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대답 여하에 따라 널 어떻게 취급할지 결정하겠다.

그러니까 어줍잖은 생각은 버리고 신중하게 답해라.


함부로 내뱉지 마라 거기에 네 목숨이 달려있을 수도 있으니.


꼭 그리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는 리파의 모습은 포스가 넘쳤다. 그래서 감회가 새로웠다. 나와 헤어지기 싫다고 '여자'답지 않게 유약한 모습마저 보였던 그녀가 그야말로 대족장이라는 지위에 걸맞는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역시 대족장이라는 지위는 카드놀음으로 딴 게 아니라는 걸까.


덕분에 이제  것도 같았다.


그 전까지는 정말 그런 개소리도 없다고 생각했던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명언취급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확실히 지금 리파의 모습만 보면 그 말대로긴 했다.

본인의 분수에 걸맞지 않는 지위는 사람을 망가뜨린다. 원래는 사람의 발밑에 깔려야할 것이 머리 위로 기어올라 사람의 몸을 짓누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견뎌낼 수 있는 뚝심을 지닌 이라면.. 결국에는 그 압박감을 버텨내고 다시 그것의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지금 리파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본인임을 인증할 수단이 몸에 대고 바를 정자를 그리는 거라니.

대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됐나 싶어서 기분이 뭐라 이루말할  없을 정도로 복잡했지만 어쩌겠는가. 이또한 내가 쌓은 업보인 것을.

그러니 이것을 감당하는 것또한 내 의무일 터.


뭐, 그런 짓까지 했음에도 믿어주질 않는 게 아주 살짝 서글프긴 했지만, 그런 리파의 태도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아마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 리파의 안에서는 내가 진짜 '이안' 본인일 가능성과 어떤 식으로든 '이안'에게서 내가 방금한 짓에 대한 것을 듣고 '이안'인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아주 그냥 박 터지게 싸우고 있겠지.

그래, 그거면 되는 거다.

어차피 한 번에 믿어주는 건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이안에게 무슨 짓을 했지? 얼른 말하는 게 좋을 거다."

그래도 벌써부터 원수라도 진 것마냥 쳐다보는  아무리 나라도 좀 가슴이 아프긴 한데..

"이해해요. 당연히 믿기지 않을 테니까."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니었을텐데."

헛소리 하지 말라는 걸까. 아까보다 한결 더 날카롭게 변한 눈빛이 얼굴 쪽으로 날아와 푸욱하고 박혀들었다.  깊게 박혀든 그걸 느끼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기억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리파네 부족을 떠날 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어쩌면 기억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많이.. 강해진 것 같아서 보기 좋네요."


"...."


쓴웃음을 곁들여 내뱉은 내 말에 리파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대꾸를 바라고서 내뱉은 것도 아니었을 뿐더러 꾹 다물린 입을 대신해 다른 것이 내게 답을 해주고 있었으니까.

거칠게,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동치는 눈동자.

덕분에 알 수 있었다. 방금 내 발언으로 인해 그녀의 마음 속에 자리한 천칭이 내가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살짝이지만 기울어졌다는 것을.


"그래도.. 아직은 부족해요."

대족장이라는 위치.

"그 정도로는 안 돼요."


결코 낮은 지위는 아니다.

애초에 대초원에서 그런 호칭으로 불리우는 건 리파 한 명 뿐이니까.


뭐, 자칭하는 거야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다른 이들에게까지 그런 식으로 불리는 건 분명 그녀가 유일할 거다.


그 점을 고려하면 일개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에서 왕이라 불리울 수 있을만한 위치까지 자력으로 오른 셈이니 충분히 대단한 일을 해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그녀가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라 해도 그녀가 이끄는 집단은 일반적인 국가에 비해 손색이 많으니까.

만약 왕국이 작정하고 전력을 투사한다면?


결국에는 궤멸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하물며 뭐.. 제국쯤 되면 굳이 입 아프게 떠들 것도 없겠지.

물론, 그런 식의 매치업이 성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리파네 부족이 자리잡은 대초원과 제국 사이에는 왕국과 교국이라는 벽이 존재하니까.

제국으로서는 치고 싶어도  수가 없는 신세랄까.

뭐, 두 국가와 사교도 척결을 이유로 동맹을 체결했으니 조금 무리를 한다면 가벼운 잽 정도는 날려볼 수 있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리파의 입지가 압도적이지 못하다는 거다.

"아마 이미 눈치챘겠지만.."

슬쩍 바이올렛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을 했던 건 다름아닌 그걸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바이올렛이 작정하고 나서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


초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결국에는 날 다시 떠나보내지 않을  있겠느냐.

아마도 그 발언이 결정적이었던 모양이다.

리파의 눈동자가 위태로울 정도로 격렬하게 흔들렸다.

보아하니 방금 내 발언으로 인해 떠나는  붙잡지 못하고 내가 떠나는  무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순간이 떠오르기라도 한 모양.

"이안..? 정말.. 이안.. 이야..?"

그래서일까?


말투가 변했다.

말 그대로 대족장에게 어울리는 품위있는 것에서 그 여름날 그녀가 날 향해 사용했던 것으로.


"하지만 어떻게.. 그 모습은 대체.."


그럼에도 여전히 믿기 힘든가 보다.

그래서 리파를 향해 서글픈 표정을 지어보였다.

"듣고 싶어요?"

그런 내 표정을 확인하고는 움찔했던 것도 잠시, 리파가 입술을 살짝 깨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걸릴텐데 괜찮겠어요? 혹시 힘들거나 피곤하면.."

보란듯이 부풀어있는 그녀의 배에다가 시선을 고정한채 그리 말하니 리파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굳어졌다.

말은 안했지만 역시나 피곤하긴 한 모양.

'하긴..'

 피곤할 수가 없겠지.


가만히 있어도 몸이 무겁게 느껴질텐데 하물며 그녀는 나름 긴 여정을 치룬 직후일 뿐더러 이런저런 행사까지 소화한 몸 아니던가.

거기에 원래 굉장히 활동적인 성격이었다는 점또한 그녀를 피로하게 만드는데 크게 한몫했을 것이다.


평생을 그런 성격으로 살아왔을텐데 갑자기 몸을 마음대로 놀리질 못하니 분명 불편하고 짜증나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테지.


나야 평생을 남자로 살아왔기에 나 말고 또다른 생명이 내 몸안에 자리하고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몸이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욱하고 치고 올라오는 짜증과 피로가 어느 정도인지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이었다.

하물며 원래는 잘만 움직이다가 갑자기 한순간에 그리된 거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굳이 과거의 기억까지 뒤적거릴 필요없이 지금 내 몸이 그런 상태 아니던가.


해서 그리 물었던 것인데 그런  물음에 리파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조심스레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아마.. 이 아이도 듣고 싶어할테니까."


그리 말하더라.

그런 리파의 모습은 뭐랄까.. 아까 보여주었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하고는 조금 다른 의미로 거역하기 힘든 마력이 있었다.

막 바이올렛이나 레이시아처럼 위압감 넘치는 느낌은 아닌데 그럼에도 결국에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도록 만든달까.


아무튼 본인의 의견이 그렇다니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  같았다.


어디서부터 시작하는  좋을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최대한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기는 하겠지만 그러자니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좀 꺼려졌다.

완전히 사실대로 가려면 내가 카트린느의 약을 잘못 먹고 몸이 어려진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만 했으니까. 그게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이니 이야기를 하는 동안 쓰잘데기 없고 관련없는 것들을 최대한 쳐낸다 하더라도 이야기가 얼마나 길어지겠는가.

리파가 만전의 상태였다면 그런 고민조차 하지 않았을테지만 그렇지가 않으니까.

본인은 나름대로 의연한 척을 한다고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눈에는 피로의 기색이 아주 또렷하게 보였다.

 모습을 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가 어색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올린 채로.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지 솔직히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는 리파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겪었던 일들을 최대한 간략하게 줄여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상당히 긴 시간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제국의 황녀를 구하려다가 결국에는 몸이 망가져버리고 말았다는 말로 끝이 났다.


"역시.. 그랬구나. 네가 그 '이안'이었구나.."


리파도 나와 관련된 소문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 모양이다.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아무튼..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에요."

그러니 이제는 리파의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였다.


그 전에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게 하나 있었기에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볼록하게 부풀어 있는 리파의 배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 상태로 질문을 던지려하니 목에 뭐라도 걸린 것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망설이고 있는 건가?'


왜?


어느새 망설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질문을 던져봤지만 역시나 답이 돌아오는 일은 없었다.

난  망설이고 있는 걸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건데..

입술을 살짝 벌리고 혀를 몇 번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 대체 뭐가 그리 어렵다고.


이미  짓 못 할 짓은 다 해놓고서 이제와서 양심에 켕기기라도 하는 건가?

이제와서?

주제도 모르고 감상에 퐁당 빠져버린 스스로를 비웃으며 서로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입술을 억지로 비틀어 열었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물었다.


"..제 아이죠?"


 뱃속에 있는 그 아이가 내 아이가 맞느냐고.


당연히 상처받은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애써 괜찮은 척을 할지도 모르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금 내 발언은 리파의 마음을 의심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뱃속에 있는 아이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직해왔을지도 모르는 것을 말이다.

그러니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ㅡ


"응."

아니었다.

둘 모두 아니었다.

내 물음에 리파는 상처받은 사람마냥 얼굴을 찡그리지도, 그걸 숨기기 위해서 애써 괜찮은 모습을 연기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맞아."


웃었다.

내가 여태껏 살며 봐왔던 모든 미소를  합쳐도 지금 그녀가 짓고 있는 것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찬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얼굴 위에 띄워올린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네 아이야."


스스로의 배를 조심스레 어루만지면서.

그 모습이 눈동자 속으로 박혀든 순간 비로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도 결국 감정이라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리고 백 년이 넘는 세월을 구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알맹이는 현생을 살아가던 모습에서 조금도 성장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도.

그렇게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있는 리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딱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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