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31)화 (330/366)



〈 33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부풀어오른 리파의 배가 눈으로 들어온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덜컥하고 내려앉는 게 느껴졌지만, 작게 심호흡을 해 놀란 마음을 추스렸다.


'그래..'

아직  아이라고 판명이 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리파가 나와 헤어질 때 보여주었던 절절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생각하면 그녀가 다른 남자를 품에 안는 모습은 솔직히  떠오르지 않긴 하지만, 사람 일이라는  원래 그렇듯 모르는 일이니까.

어쩌면 진작에 실연의 상처를 떨쳐내고 다른 남자와 혼인을 했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리파는 말이 대족장이지 사실상 유목민족의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 아니던가?

그리고 위에 군림하는자의 의무  하나는 바로 후계자 생산이다. 본인이 살아생전 드높은 업적을 이룩했으면 뭐하겠는가. 그걸 이어받아서 지켜줄 후계자가 없으면 아무 의미 없는 것을.


조금이라도 높은 사람이 혼인따윈 생각하지 않고 독수공방하면 측근이라 불리는 이들이 결혼해라 결혼해라 합창을 해대는 것도 사실 다 그 때문이다.


그러니 리파의 경우도 대충 비슷했겠지.


하룻밤 꿈만 선물해주고 덜렁 튀어버린, 그것도 같은 대초원 출신도 아닌 남자 따위를 오매불망 그리는 리파의 모습이 측근들에게는 상당히 못마땅해보였을 것이고, 그 꼴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측근들이 쉬지 않고 중매에 나섰을 거다.

그렇게 들이밀어진  부족의 남자들 중에 리파의 마음을 사로잡을만한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없었을까?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쩌면 정말  아이일지도 모르는데 그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커녕 어째 변명을 위한 변명만 찾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말 그대로 쓰레기같은 행동이랄까.

하지만 내게도 핑계거리 정도는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나도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누군가의 아빠가, 아버지가 될지도 모르는 이 상황 자체가 내게는 처음이었다.

누군가는 다섯 번이나 뒤지는 동안 대체 뭐한 거냐고 어이없어 할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까지는 여자와 딱히 연이 없었던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멀리했다.


그때 나는 어떻게든  개같은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엔딩을 보는 것 외에 다른 것에는 일절 관심조차 두질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결국  실패하긴 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생전 처음 접하는 이 상황이 내게는 퍽 당황스럽게 느껴졌다.

아니, 이게 당황이 맞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수 없었다.

이 감정은 대체 뭘까.

난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워버린 그 물음에 멍한 표정만 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무려 제국의 황녀이자 삼국동맹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이의 입까지 빌려가며 먼저 만남을 청한 이가  만나려고 했던 것인지 목적을 밝히기는 커녕  때리며 서 있기만 하니 의아했던 것일까.

"흐음..?"

소파에 몸을 포옥하고 묻은 편안하기 그지없는 자세로 날 올려다보고 있던 리파의 눈동자 속으로 의구심이라는 것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확히  다음이었다.

이러다가 괜한 오해라도 받는 건 아닐까 싶어서 서둘러 입을 떼려고 했는데 리파 쪽이 한  더 빨랐다.


"흐음.."


뭔가  것도 같다는 표정.


그런 표정을 한채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리파가 이내 얼굴 위로 싱긋하고 미소를 띄워보였다.


"혹시 그대는.. 내게 구혼하기 위해 온 것인가?"

그러더니 대체 어떤 사고의 흐름을 거치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건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너무나도 태연하게 입밖으로 뱉어버리더라.


안 그래도 당황스러워서 미칠 것 같은데 그런 리파의 뜬금없어도 한참 뜬금없는 발언은 나를   당황 속으로 밀어넣기에 충분했다.


'아니..'


대체 저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알게되었다.


당황이라는 게 사람이 감당할  있는 수준을 넘어버리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난 그래서 당황했던 것인데 그런 내 당황한 모습이 리파의 눈에는 정곡을 찔려서 그러는 것으로 비춰지기라도 했나 보다.


"저런.. 당황하는  보니 내가 정답을 맞춰버린 모양이구나."


"..."

"뭐, 대초원 밖에서는 그런 경우도 왕왕 있다고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확실히 남자 쪽이 여자한테 구혼을 청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는 걸 어디선가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은 반반한데 능력도, 든든한 뒷배도 없는 이가 그나마 얼굴이 반반하다는 점을 이용해 괜찮은 능력이나 든든한 배경을 가진 여성에게 구혼이라는 형태로 몸을 의탁하는 식이랄까.

어찌보면 남자들이 그러는 것도 당연한 게 뭐 뒷배같은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가만히 앉아있다가 지위만 높은 늙은 여자와 결혼하게 되느니 차라리 한 살이라도 젊은 쪽을 자신의 손으로 선택하는  그들에게는 훨씬 나은 일일테니까.

리파가 방금 말한 건 그런 경우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녀에게 알려줘야 할까?


내가 정말 아무런 뒷배도 없었다면 제국의 황녀를 움직여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내지도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아니면 혹시.. 바이올렛이 직접 움직인 게 아닌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랐다. 최근 들어 다시 바빠진 그녀이니만큼 이런 것까지 손수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테니까. 적당한 이를 시켜서 이런 상황을 유도해낸 걸지도 모르지.

라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그런 내 표정을  어찌 해석한 것인지 리파가 짐짓 미안해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렸다.

"그대의 용기는 참으로 갸륵하지만 받아줄  없을 것 같구나."

그리 말하는 리파의 배는 볼록하니 부풀어오른 스스로의 배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더 없이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손을 놀리며 누군가를 추억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심장이 생전 느껴본 적 없는 이상한 박자로 뛰어대기 시작했다.


빠르게 뛰는 것 같기도 하면서 어찌보면 지독할 정도로 느린 것 같기도 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질 정도로 크게 뛰는 것 같으면서도 다시보니 다 죽어가는 사람의 그것마냥 미약한 것 같기도  그 박동은 내게 무어라고 형용키 어려운 기분을 선물해주었다.

"내게는 이미 사랑하는 이가 있어서 말이다."

"..혹시 어떤 사람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절대 네가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며 살폿 웃는 리파를 향해 충동적으로 질문을 내뱉었던 건 아마도 그 요상하기 짝이 없는 심장의 박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


참으로 다행히도 리파는 그런 내 질문을 기분 나빠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꺼워했다.


"글쎄."


그런 식으로라도 그 누군지 모를 남자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할  있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기쁨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참으로.. 신기한 사내지."

이내 그녀의 얼굴 위로 걸린 미소를 확인한 순간 내 머릿속으로 내려앉은 건 감히 확신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기 그지없는 직감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머리색이 똑같구나."

그리고 이어진 리파의 발언은 그런 내 확신을 한층 더 강력하게 만들어주었다.

머리색말고는 닮은 점이 하나도 없다는 발언도 그러했고.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이안의 몸은 마의 16~18세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건가 싶을 정도로 어린 모습하고 성인일 때의 모습이 극명하게 다르니까.


아무튼 리파의 발언으로 인해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내 아이라는 건 확실해진 상황.

그렇기에 고민했다.


추측에 불과했던 것들이 전부 들어맞았으니 이제는 미리 계획한대로 해야하는데  전에 그녀에게 내 정체를 어떻게 납득시키면 좋을지  수가 없었으니까.

원래 계획은 그냥 내 사정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었지만, 그 방법은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짓고 있는  표정을 봐라.


누가봐도 원래 버전의 나를 추억하고 있는 표정인데 여기서 내가 사실 그 '이안'입니다라고 하면 과연 그녀가 그런 내 말을 믿어주겠는가?

열과 성을 다해서 몸이 이렇게 변한 사정을 설명하더라도 사기꾼 취급 받으며 방 밖은 물론 건물 밖으로 쫓겨나게 될 가능성이 크겠지.

그것도 사실 내가 그녀가 무시하기 힘든 누군가를 뒷배로 두고 있기에  정도지 만약 그렇지 않고 뒷배고 뭐고 없어보였다면?


건물 밖이 아니라 이승 밖으로 쫓겨났을 거다.

딱봐도 리파의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역린이나 다름없는 듯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누군가 함부로 건드린다?

나같아도 뒷일 생각  하고 일단 찢어죽이든 목을 베어죽이든 했을 거다.


'이걸 어쩐다..'


어떻게 해야할까.

어떻게 하면 리파가 내가  '이안'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믿게 만들 수 있을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결코 쉽지는 않을 듯 했다.


최선은 역시 사람의 몸이 늘어났다가 줄어드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인데  방법은 사용이 불가능했으니까.

당장 중화제도 없을 뿐더러 이미 한 번 크게 데인 적 없는 카트린느가 내가 부탁한다고 한들 그걸 만들어줄리도 없으니 말이다.

'뭐 없나?'

그래서 한 번 곰곰히 생각해봤다.


오직 나와 리파만이 알고 있을만한 사실이 뭐 없을까 하고.

당연히 쉽지는 않았다.

그녀와의 추억이라고 해봐야 납치당한 척을 했던 며칠이 고작이니까.

혹자는 그 얼마 안 되는 시간동안에도 대단한 추억을 쌓아올리곤 하지만 당시 내가 리파와 했던 일이라고는 그녀가 내어준 천막 안에 쳐박혀 먹고, 자고, 싸고, 떡치고 한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기억에 남을만한 추억이 있을 리가 있..


정확히 그리 되뇌인 순간일 것이다.

 하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나 떠오르는 게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이안'이라는 걸 증명해줄 수 있는 수단이 머릿속으로 떠올랐다.

문제는 이게 내 생각대로 통하냐는 건데.. 아무래도 그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그 분을 많이 사랑하시나 보군요."

리파를 향해 그리 물었던 건 다름아닌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리파는 이번에도 화를 내긴 커녕 기껍다는 듯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어찌보면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임에도 그랬다.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좀 대답이 될까 모르겠군."


"..그렇습니까."

"내게는 세상에서 두 번째로 소중한 사람이지."

원래는 분명 첫 번째였을 나를 대신해 그 자리를 차지한 이가 누구일지야 솔직히 뻔했다.

가능성이 있는  딱   뿐이었으니까.

'..한  맞겠지?


아무튼 리파가 화내지 않고 착실하게 답을 해준 덕분에 분위기는 얼추 갖춰진 상황.

"그토록 그 분을 사랑하신다면 당연히 이것도 알아보시겠군요."

"갑자기 그게 무슨.."


"리파."

여태껏 얼굴 위로 뒤집어 쓰고 있던 정중함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잽싸게 손을 움직여 전과 비교하면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변해버린 복부를 드러냈다.


어떻게  납득하고 돌아가나 싶더니만 뜬금없이 맨살을 드러내 보이는 내 행동에 리파의 얼굴 위로 불쾌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혹시 이 상황이 유목민족 연합의 동맹입성을 반대하는 누군가가 파놓은 함정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것일까.


리파의 입이 빠르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저대로 내버려둔다면?


그 안에서는 고함이 터져나올 것이고, 그것에 반응한 그녀의 호위들이 방 안으로 뛰어들어와  제압하겠지.

필시 그렇게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크게 벌어진 리파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나온 것보다 내가 머릿속에만 있던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쪽이 한 발 더 빨랐으니까.


그녀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배에 길쭉하고 곧게 세운 손가락을 가져다 댄채 그곳에 대고 뭔가를 슥슥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때 사용했던 것처럼 검은색 물감같은 거라도 있었다면  완벽했겠지만 당장은 구할 방법이 없으니까.


아쉬운대로 몸짓이라도 분명하게 해보였는데..

"알아보겠어?"

"이게 대체.. 어떻게.."

다행히도 효과가 아에 없지는 않은 듯 했다.

적어도 지금 리파가 짓고 있는 표정만 보면 그랬다.

다만 완벽하지는 않은 듯 했다.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흔들리던 눈동자가 순식간에 가늘어지더니..

"..그대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지?"

리파가 날카롭기 짝이 없는 눈빛으로 날 노려보기 시작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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