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시간은 더 흘러 결국 유목민족 연합체 측 사절단이 성도에 입성했다.
그들이 초래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과는 별개로 정체가 궁금한 건 사실이었기에 성녀를 간곡하게 졸라 몰래 구경을 나갔다.
물론, 혹시라도 눈에 띄어서 기껏 열심히 준비한 게 어그러지는 일이 없도록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 사이에 몸을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내 뒤를 지키고 있는 건 다름아닌 디아나였다.
"그.. 이안, 날씨가 많이 춥다. 이만 들어가는 게.."
유목민족 측 사절단이 도착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묘하게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뭔가를 걱정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디아나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상황상 그녀가 걱정할만한 건 딱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는 내가 유목민족 측 사절단을 보고서 과거의 기억 때문에 고통받을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몸 상태가 심각한데 거기에 심마 비슷한 것까지 온다?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이 동시에 병에 걸리는 꼴이니 그리되면 어떻게 될지야 솔직히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이리도 안절부절 못하는 거겠지.
"괜찮아요.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이안.."
"그냥 어떤 사람들일지 궁금했을 뿐이니까요. 어떻게 생겼는지만 확인하고 바로 들어가죠."
그리 말하면서 살짝 과장스럽게 몸을 부르르 떨어보이니 그제서야 나에 대한 걱정으로 어색하게 굳어있던 디아나의 표정이 살짝이나마 풀어졌다.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낸 그녀가 이내 몸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손으로 살짝 걷어 그 안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그.. 많이 추우면.. 들어와 있어도 된다만.."
양쪽 뺨을 추위가 아닌 다른 것으로 빨갛게 물들인 채 큼큼하고 헛기침을 해댔다.
방금 그랬던 것처럼 몸을 격하게 떨 정도가 아니라서 그렇지 추운 건 분명 사실이었기에 그런 그녀의 호의를 사양하지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아-"
그리 말하며 디아나가 내어준 품 안으로 입성하니 그녀가 망토 안에서 손을 움직여 내 어깨에다가 팔을 걸쳤다.
확실히 망토 안은 따뜻했다.
그렇게 디아나의 품 안에 폭 안긴 채 유목민족 쪽 사절단들이 모습을 드러내기만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사람 한 번 더럽게 많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구경하러 나온 거라니.
물론, 이중에는 교국이나 바이올렛 측에서 동원한 바람잡이들도 상당수 섞여있겠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많은 숫자였다.
나나 디아나의 모습을 충분히 숨겨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사람이 바글바글 함에도 유목민족 측 사절단들을 위해 특별히 비워놓은 대로가 이리도 잘보이는 건 다 미리미리 좋은 자리를 선점해둔 덕분이었다.
무슨 콩나물 시루마냥 바글거리는 주변의 모습을 눈으로 한 번 쭉 훑고 있으니 다들 나름대로 기대가 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목민족이라고 해봐야 결국 똑같은 사람일 뿐인데 대체 뭐가 그리도 신기하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이 세계 사람들 감성에는 신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름대로 교통 수단이 잘 발달되어있는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평생토록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지 않고 끝끝내 그곳에서 죽음까지 맞이하는 케이스가 꽤 흔하다 들었으니까.
특히나 땅떵어리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압도적으로 좁은 편인 교국은 그 경향이 심하다 들었다.
아무래도 교국이 점유하고 있는 영토 중에서 이곳 성도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보니 벌어진 일이랄까.
덕분에 오직 성도와 교국만이 자신이 아는 세상의 전부인 교국민들에게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드넓은 대초원을 떠도는 유목민족의 생활상이 낭만적으로 느껴진 것 아닐까?
현실에서 하루하루 삶에 치이며 살기 바쁜 이들이 캠핑족들의 브이로그나 시골에서의 느긋한 생활을 찍어둔 영상을 보고 그 모습을 동경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시야에 간신히 들어오는 저끝에서부터 웅성거림이 일기 시작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온 건가?'
구경 한 번 해보겠다고 나온 이들의 숫자가 하도 많다보니 아까부터 시끄럽긴 했지만 저건 지금까지 귀를 괴롭혔던 것들과는 결이 달랐다.
바로 조금 전까지는 다들 기다리는 게 지루해서 떠드는 느낌이었다면 저건 뭔가를 발견하고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어깨를 들썩들썩하는 느낌에 가까웠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쪽에 시선을 고정시켜놓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리도 많은 이들을 기다리게 만든 장본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목민족이라고 해봐야 리파네 부족밖에 본 적 없긴 하지만 여름에 본 그들과 겨울의 그들은 그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때 숲 속에서 봤던 리파네 부족원들은 날씨가 날씨인지라 하나같이 과감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그건 그들 중 제일 높은 사람이라 할 수 있는 리파또한 마찬가지였다.
헌데 지금은 어떤가?
대로 끝에서부터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유목민족 연합체 측의 사절단들은 하나같이 모피로 만든 두터운 망토로 스스로의 몸을 꽁꽁 감싸고 있었다.
살갗 하나 드러내선 안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뭐,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도 사람 아닌가?
당연히 똑같이 추위를 느낄텐데 여름에 봤던 것처럼 헐벗다시피 하고 다닐 순 없었겠지.
아니, 어쩌면 추위를 더 타는 편일지도 몰랐다.
대초원의 겨울이 다른 곳에 비해 따뜻하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본 것도 같으니까.
분명 대초원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무슨무슨 산맥의 영향이라 했던 것 같은데 거기까지는 기억이 안 났다.
아무튼 그런 곳에서 왔으니 왕국하고 비교하면 따뜻한 편이라 할 수 있는 교국의 겨울도 대초원 출신인 그들에게는 엄동설한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LA사람들이 기온이 십 몇도만 돼도 추위를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 점을 고려하면 저들이 저렇게 두꺼운 망토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녀들일 확률이 높은 유목민족 측 사절들이 걸치고 있는 망토는 평범한 망토와는 달리 후드까지 달린 물건이었다.
그리고 유목민족 측은 곁가지마냥 달려있는 그 기능을 아주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었다.
후드를 푹 눌러쓰는 식으로 말이다.
뭐, 한두 명만 그러고 있었으면 나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헌데 어째 후드를 쓰지 않은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가봐도 저들끼리 미리 짰다는 걸 알 수 있는 광경이었고, 덕분에 대로를 둘러싸듯 서있던 이들 사이로 웅성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손님이랍시고 찾아온 것들이 얼굴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채 누가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몰골을 하고 있는 상황이니까.
평범한 상황에서 그랬어도 말이 나왔을 것인데 하물며 교국민들은 사교의 테러라는 일생에 한 번 경험할까 말까한 대사건을 겪은 직후가 아니던가?
그런 이들 사이로 사교도 코스프레라도 하는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 기어들어왔으니..
"뭐야.."
"우릴 농락하려는 건가?"
구경을 위해 몰려나와있던 교국민들이 신경질적인 반응을 내보이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뭐, 물론 내 생각은 달랐다.
저들이 성도에 입성하기 전에 호위라는 명분으로 성기사단이 저들과 한 발 먼저 접촉을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성기사단이 과연 저들에게 저 후드와 관련된 부탁을 안 했을까?
'했겠지.'
그럼에도 저 상태로 성도에 입성했다는 건?
성기사단이 그걸 납득했다는 거겠지.
물론, 결코 쉽지는 않았을 거다.
어지간한 이유로는 기본적으로 굉장히 꼬장꼬장한 편인 성기사단을 납득시킬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게 대체 뭘까.
유목민족 측에서 어떤 핑계를 댔길래 만년 과장마냥 꼬장꼬장하기 짝이 없는 성기사단이 납득하고 넘어가는 걸 택한 걸까.
궁금했다.
허나 그것에 집중할만한 시간은 없었다.
'누가 대표지?'
그걸 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빴으니까.
말 그대로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대열을 따라서 길게 포진한 성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대로를 가로지르는 이들의 모습을 눈으로 하나하나 훑었다.
그런 식으로 한 명 한 명 꼼꼼히 확인하면서 사절단의 중심을 향해 나아갔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대표라 할 수 있는 인물이 중앙을 지키는 게 국룰이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중간에 도달하니 과연 그때부터 망토를 이루고 있는 모피의 질이 확연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체 어떤 짐승의 모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외곽 쪽에 서 있는 이들의 망토가 더럽혀지는 상황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느낌이 다분하다면 중앙에 자리한 채 누군가를 지키듯 서 있는 이들의 것은 그런 것 따위는 개나 주라는 것처럼 실용성보다는 멋쪽에 좀 더 저울이 기울어있는 느낌이 강했으니까.
대미는 역시 그들 사이에서도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이였다.
저건 대체 어떤 놈의 가죽을 벗긴 걸까.
유목민족 연합체의 대족장으로 추정되는 이는 딱봐도 엄청나게 탐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모피로 만들어진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그런 대족장의 실루엣을 이제는 어렴풋한 모습으로 밖에는 남아있지 않은 리파의 것과 비교해봤다.
'쓰읍..'
쉽지는 않았다.
거리가 뭐 가까운 것도 아니고 최소 100미터는 되어보일 뿐더러 몸에 두르고 있는 망토가 굉장히 펑퍼짐한 스타일이라서 실루엣조차도 제대로 된 게 맞는 지 확신이 서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키라도 비교해보려 했는데 그러자니 그녀의 주변을 지키듯 서 있는 이들이 또 문제였다.
괜히 족장 친위대로 뽑힌 게 아닌지 다들 하나같이 피지컬이 월등해서 그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대족장의 키가 작은 지 큰 지 제대로 구분이 되질 않았으니까.
'쯧..'
텄구만 텄어.
대로를 가로지르던 유목민족 측 사절단이 그 끝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녀와, 바이올렛, 그리고 레이시아를 필두로 한 삼국동맹 측 인사들의 앞에 도착하는 걸 확인하고는 주변을 향해 경계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던 디아나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더 있고자 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긴 했지만, 제대로 확인하기도 힘든데 이 추운 날씨에 굳이 바깥에서 덜덜 떨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어차피 바이올렛이 따로 자리를 마련해주겠다고 했으니 그때 가서 확인해보면 될 일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이만 들어가죠. 바람이 차네요."
"..그래."
어찌보면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존재나 다름없는 유목민족 측 인원들의 모습을 보고서도 내가 평소같은 상태를 유지하니 내심 안심이 되었던 것일까.
주변을 향해서 던지고 있던 시선을 거두어 날 내려다보는 디아나의 눈빛에는 안도의 기색이 짙게 머물러있었다.
그런 디아나와 함께 성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사라의 안내를 받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언제 쯤 돌아오실 예정입니까?"
"음, 몇 시간 걸리지 않을 거에요."
상대가 리파가 아니라면 적당히 둘러대고 그대로 자리를 파할 생각이지만 만약 리파라면 그 자리가 얼마나 이어질지 솔직히 확신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댔더니 사라가 그러면 돌아오기 전에 미리 기별을 달라는 말을 툭 던지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성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성역을 뒤로한채 그것과 이어져있는 길을 따라 걷고 있으니?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혹시라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어둠 속에 교묘하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던 바이올렛의 수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같지는 않고 시녀일 것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녀를 따라서 걸음을 옮기니 이내 눈앞으로 나타난 것은 유목민족 측 사절단 앞으로 배정된 숙소였다.
공교롭게도 왕국 연합 측이 그 사고를 치기 전까지 사용하던 곳이었다.
'하필 여기냐..'
쓴웃음을 짓던 것도 잠시, 한 발 앞서 움직여 잠겨있던 후문을 딴 바이올렛의 수하가 날 건물 안으로 안내했고, 이내 유목민족 측 사람에게 자신의 역할을 인계했다.
"그럼, 전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하고는 묵묵히 서서 날 기다리고 있던 이와 합류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대족장이 머물고 있는 방으로 입성하게 된 순간ㅡ
'맞았네 씨바..'
가장 먼저 나온 건 헛웃음이었다.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그대인가?"
막 방 안으로 들어선 날 맞이한 건 낮에도 봤던 망토로 몸을 감싼 채 소파 위에 편한 자세로 앉아있던 리파였다.
"날 만나보고 싶다 했던 이가?"
그리 말하는 리파의 배는.. 자세 때문에 그런 거라고 치부하고 넘기기 힘들 정도로 분명하게 부풀어있었다.
그래, 꼭 임신이라도 한 사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