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28)화 (327/366)



〈 32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가 남들보다 확실하게 낫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일 것이다.


그걸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이들도 있다고 듣긴 했는데 적어도 난 그렇지 않았다.

내건 후천적으로, 학습을 통해 확립된 것이니까.

한 세 번 정도 뒤져보니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게 영혼에 탑재되더라.


다만 그렇게까지 편리한 능력은 아니었다. 그걸  마음대로 컨트롤  수 있었다면 그것만큼 편리한 능력도  없었겠지만 그게 불가능했으니까.

그것이 반응을 보이는 순간은 굉장히 한정적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무엇보다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런 것이 지금 이 순간 내게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쎄하단 말이지..'

얼핏 일리가 있어보이는 바이올라의 추측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어느새 몸을 타고 올라와서 등골을 오싹오싹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내 귀에 대고 자꾸만 속삭였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고.


다른 케이스일 경우도 생각해봐야하는 거 아니냐고.

라는 식으로 말이다.


부상도, 병도 아니지만 여성이 장기간 외부활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그 조건에 딱 들어맞는 것을 나는 딱 하나 알고 있었다.

'임신.'

그래 그것 말이다.

그 단어가 머릿속으로 떠오른 순간, 등골의 오싹거림이 한층 더 심해졌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그 대족장이라는 여성이 내가 아는  리파라면?

그리고 대초원을 누비며 주변 부족을 싸그리 정벌하고 다녔던 그녀가 대뜸 칩거를 시작한 이유가 나와 헤어지기 직전에 나누었던 정사 때문이라면?

정말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몇 번이나 했었지?'

솔직히 말하면 잘 기억은  난다.

그런 걸 따로 세는 성격도 아닐 뿐더러 그때는 정말 뒤가 없는 사람처럼 해댔으니까. 레이시아나 앨리스, 디아나 같은 이들을 상대로 순진한 척을 한답시고 억지로 쌓아놨던 것을 리파에게 전부 푸는 느낌으로다가 해댔으니 뭐..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되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내심 이 몸이 불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생으로 해댄 적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데 여태껏 그로 인한 소식이 들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어쩌면 여성 쪽에서 뭔가 조치를 취했을지도 모르지만, 솔직히 그랬을 것 같지는 않았다.


디아나도 그렇고 앨리스도 그렇고 레이시아도 그렇고 다들 하나같이 독점욕이 어마어마한 이들 아니던가?


그런 그녀들에게 있어서 나라는 존재를 보다 확실하게 묶어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임신일텐데 그 가능성을  손으로 직접 지워버린다?

그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고, 그게 내가 이 몸이 불능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이유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지금 또다른 가능성이 제기된단 말인가?

남들은 가지고 싶어도 운이 따라주질 않으면 평생 못 가질 수도 있는 게 아이라지만 솔직히 기쁘다기 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다.

그렇기에 실감했다.

'대책이 필요해.'


어쩌면 헛수고가 될지도 모른다.


대족장이 리파가 아닐 가능성도 얼마든지 존재하니까.

그리 되면 대책을 세운답시고 들인 노력이 다 물거품으로 변해버릴테지.

그 가능성까지 고려하더라도 해야했다.


그것만 믿고 버티다가 진짜 좆됄 수도 있으니까.

깔끔하게 칼빵맞고 뒤지면 차라리 다행이지 어딘가에 가둬놓고 죽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기라도 하는 날에는 다음 회차고 뭐고 이 몸의 생이 다할 때까지  세계에 갇히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문제는..'

대책을 세운다고 세워보려고 해도 거짓말을 너무 씨게 쳐놓은 탓에 쉽지가 않다는  정도?


'후..'


해서 바이올렛의 부축을 받아 성역으로 돌아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쉬지않고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그러니까 대족장이 리파고, 리파가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걸 기본 조건을 깔아놓고서 말이다.

'최선은 역시..'

다른 이들보다 리파와 한 발 앞서 접촉해서 그녀의 미리 말을 맞춰놓는 것이겠지.


솔직히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없을 것 같긴 했다.


그리 되면 내게는 절체절명의 위기나 다름없는 리파와의 재회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까지도 가능할테니까. 물론, 그리 되려면 그것을 위한 시나리오를 굉장히 디테일하게 짜놔야 할테지만.


'아니면은..'

모르는 척 해버려?


속으로 그리 되뇌인 순간 진작에 뒈져버린 줄 알았던 양심이라는 것이 꿈틀하고 최후의 몸부림을 선보이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솔직히 좀 땡기긴 했다.


통하기만 한다면 그것만큼 편한 해결책도 또 없을테니까.

물론, 알고 있다.


편한만큼 먹히지 않을 가능성도 크고,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또한 엄청나다는 것 정도는.

사실 나 하나 모르는 척 잡아뗀다고 먹히겠는가.

리파가 아는 '이안'은 건장했던 시절의 모습이니 처음에는 내가 눈앞에서 알짱거려도 내가  '이안'이라는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할 거다.

사방에서 내 이름을 불러댈텐데 그걸 듣고도 모르면 바보일테니까.


해서 순간적으로 머릿속으로 떠올랐던 것을 그대로 꼬깃꼬깃하게 구겨서 보이지 않는 곳에다가 쑤셔박았다.

그렇게 사실상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그것이 다시는 눈에 띄는 일이 없도록 만든 다음..


바이올렛의 얼굴을 힐끔거렸다.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라도 리파와 따로 독대해 미리 말을 맞춰놓는 작업은 사실상 필수라 할 수 있는데 그걸 가능케하기 위해서는 동맹과 관련해서 적지 않은 권한을 지닌 이의 협조가 필요했으니까.


그러니까 못해도 각국의 수장 정도는 되는 이의 조력이 필요한데  조건에 부합하는 이가 사실상 바이올렛 밖에 없었다.


미쳤다고 레이시아에게 그런 걸 부탁하겠는가?

부탁하는 순간 뭐 때문에 그러냐고 물어볼 게 틀림없는데?

내게 꽉 잡혀있는 상태임을 고려하면 군말않고 들어줄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게 더 위험했다.

틀림없이 따로  이유를 알아보려 할테니까.

그러니  중에서 내가 가장 편하게 부탁할 수 있는 상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제외할 수밖에 없는 거다.

그렇게 레이시아의 이름을 제하고 나면 남은 건 바이올렛 아니면 성녀 뿐인데 솔직히 성녀에게 부탁을 하기도  그랬다.


내가 뭐 그녀하고 특별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엇을 빌미로 삼아서 부탁의 말을 꺼내야할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감이 잡히질 않았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껄끄럽단 말이지..'


적어도 당장은 그랬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게 분명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바이올렛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꿍꿍이 속을 알 수 없는 성녀보다는 차라리  부탁을 받고 토라진 바이올렛을 온몸을 이용해 달래는 편이 몸은 힘들지언정 마음은 편할 듯 했으니까.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벌써 헤어질 시간이네?"

아쉬움이라는 감정을 고봉밥마냥 꾹꾹 눌러서 담아놓은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그에 몸에 힘이 하도 없어서 반쯤은 바이올렛에게 업히다시피 하고 있던 자세를 풀고 주위를 확인해보니 눈으로 들어온 것은 어둠 속에 퐁당 빠진 익숙한 풍경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미리 기별을 넣어놓기라도 했던 걸까.

잠깐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에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가까워진 성역의 입구 앞에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뭐, 틀림없이 사라겠지만.

"그러면 들어가 봐."

말 그대로 하루종일 실컷 해댄 만큼 미련같은  딱히 없는 것일까.


그녀의 성정을 고려하면 틀림없이 헤어지기 싫다고 찡찡댈 거라 생각했는데 바이올렛은 내심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꽤나 순순하게  놓아주었다.


덕분에 뭔가 기분이  오묘했다.

분명 질척댈 거라 생각했던 이가 질척대질 않으니 '이게 잡은 고기한테는 밥을 안 준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로질렀으니까.


'뭔 쓸데없는 생각을..'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헛웃음을 흘리면서 그대로 바이올렛으로부터 돌아섰다.


그리고는 성역 입구 앞에 서서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이에게로 향하려고 했는데..

"아, 잠깐만."

팔을 홱하고 잡아채는 손길과 함께 기껏 돌려놓았던 몸이 다시금 바이올렛 쪽을 향했다.

 다음은 뭐..


말할 것도 없이 진득한 키스가 이어졌다.


꿈 속에서도 자기 생각밖에 못하도록 만들겠다는 것처럼 바이올렛이 내 얼굴을 양손으로 꼬옥하고 붙잡은 채 미친듯이   안을 헤집어댔다.

뒤에서 사라가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 게 뻔한데 바이올렛하고 딱 붙어서 그러고 있으려니 왠지 모르게 등 뒤가 따끔따끔거리는 듯 했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바이올렛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훔쳐볼테면 봐라.


내가 키스하겠다는데 네가 뭐 어쩔 거냐.

꼭 이리 말하는 듯한 느낌?

그런 식으로 나와 입을 맞추는데 푹 빠져있던 그녀가 정신을 차린 건 슬슬 부족해지기 시작한 호흡 탓에 의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아득한 곳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아..!"


입을 맞춘다고 호흡이 부족했던 건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던 걸까.


내 입술 위에다가 꾸욱하고 눌러붙이고 있던 것을 떼어낸 바이올렛에게서 잔뜩 거칠어진 숨결이 후욱하고 뿜어져나왔다.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달콤하게 느껴지는 그것이 콧속으로 밀려들어오는 걸 느끼고 있으려니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바이올렛이 이내 씩 웃으며  입술을 엄지를 이용해 문질문질거렸다.

"그럼 들어가 봐."

그러더니 그대로 돌아서더라.

이제 정말 미련같은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 바이올렛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도 그녀를 따라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성역으로 통하는 입구로 향하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라가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성녀님?"


그랬다.


성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시녀인 사라가 아니라 그녀의 주인인 성녀였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지만 성역 안이 아닌 바깥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맨얼굴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어차피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벗을  뻔하니 그냥 안 걸치고 나온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둘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가만히 날 내려다보는 성녀의 눈속에 깃든 감정이었다.

뭔가  말이 많은 것 같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눈빛.

그런 눈빛을 한채 성녀가 내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게 꼭 뭐 할 말은 없냐고 날 압박하기라도 하는  했다.

대체 내게 무슨 말이 듣고 싶길래 생전  하던 짓을 하는 것일까.


혹시 뭐 내가 바이올렛의 협박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길 바라는 걸까.

그렇지만 왜?

내가 교국의 은인이라서?


이런 식으로라도 그 은혜를 갈음하고자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후자 쪽이  더 가능성이 높아보이긴 했다.


아무리 그녀가 올곧고, 성녀라는 직함에 걸맞는 성정을 지녔다 할지라도 아닌 건 아닌 거니까.


고작 은혜하나 갚겠다고 동맹의 수장 자리에 오른 바이올렛과 척을 지는 것을 감수한다?


그런 꼴을 안 그런 척, 고상한  하면서도 속으로는 제 잇속만 생각하기 바쁜 신이라는 존재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손해에 민감한 것이 바로 신이라는 작자들이니까.


그리고 여신은 사교도 놈들이 저지른 테러 때문에 신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위신에 금이 간 상태였다.

그걸 조금이라도 복구하기 위해서는?

사교도 놈들을 잡아다가 철저하게 족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함부로 거슬러선 안 되는 존재라는 이미지를 쭉 유지할  있을테니 말이다.

작금의 상황이 그러함에도 자신의 화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성녀가 사교도 척결에 도움이 되기는 커녕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가만히 내버려둔다?

그 말은 즉, 지금과 같은 상황을 여신이 용인했다는 거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건 말이 되질 않았다.


다만 여기서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다면..


'무슨 근거로?'

여신이 그런 판단을 내렸냐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대체 뭐지?'

여신은 대체 내게서   걸까.


뭘 봤길래 동맹 대신 한 명의 개인의 손을 들어준다는, 상식적으로 말도  되는 결정을 내린 걸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뚫어져라 응시하는 성녀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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