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니 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부터 나왔다.
방금과 같은 장면을 보여줘놓고서 말은 참 잘 한다 싶었으니까.
방금 바이올렛이 한 행동은 누가봐도 경고였다. 그러니까 모처럼 기분 좋으니까 혹시라도 그걸 망칠 것 같거든 알아서 사려라 뭐 이런 뜻이었겠지.
행동은 그렇게 해놓고서는 말은 또 내가 말만 하면 그게 뭐든 다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하고 있으니 어찌 웃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뭐, 사실 못할 건 없긴 해.'
그녀가 내 약점이라 생각하고 있는 건 사실 내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잠시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물었다.
"그.. 동맹은 어떻게 되었나요?"
내가 묻고 싶었던 것, 그건 말할 것도 없이 사교도 척결을 위한 동맹에 관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었을 때까지는 그래도 아직 심사숙고하는 단계에 있던 유목민족 측의 제안이 받아들였는지 어쨌는지부터 시작해서 유목민족 연합체의 수장이라는 대족장에 관한 것까지.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바이올렛의 협박같지도 않은 협박에 응했던 건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다.
레이시아에게도 성녀에게도 짬이 날 때마다 동맹과 관련된 질문을 던져봤지만 레이시아는 껄끄럽다는 이유로, 성녀는 잘 모른다는 이유로 깔끔하게 답을 해주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바이올렛이라면?
분명 다를 거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녀의 초대에 응한 것이었다.
'은근 발이 넓으니까..'
제국의 촉수가 어디까지 퍼져있는지 나야 모른다.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지만 물어본다고 해서 알려줄 것 같지도 않고.
다만 확실한 건 바이올렛의 손을 거치는 정보의 양이 다른 이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내가 막 바이올라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에 대한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 말은 그녀 개인의 것인지 아니면 제국 황실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정보망이 적어도 왕국까지는 뻗쳐있단 소리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고.
그래서 물었던 것인데..
"유목민족 쪽이 신경쓰여서 그래?"
아직 그쪽과 관련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 이름을 꺼내드는 걸 보면 역시 바이올렛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네."
"뭐.. 나도 맘같아서는 거절하고 싶었지만 조금 더 효율적인 일처리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
그리 말하고는 그런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겠냐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묻길래 일단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요."
"고마워. 착하네."
한 팔로 내 몸을 꼬옥하고 끌어안으며 다른 손을 이용해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던 그녀가 이내 설명을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쪽 수장이 이곳으로 찾아오는 걸로 결론이 났단다.
그에 대한 호위는 대족장 휘하 친위대와 왕국의 근위기사단이 담당키로 했다고 하고.
"..괜찮을까요?"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대족장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빼박 왕국이 그 혐의를 뒤집어 쓰게 되리라는 걸 그쪽이라고 해서 모르지 않을테니까."
그러니 오히려 더 이를 악물고 지킬 거라는 바이올렛의 설명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대꾸했다.
그리고는.. 진짜로 궁금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그.. 어떤 사람인가요?"
"누구? 아, 대족장?"
"네."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진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을 것이다.
"흐응.."
가느다란 콧소리가 바이올렛에게서 흘러나오더니 날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변화.
덕분에 가늘게 변한 눈 사이로 살짝 드러난 호박빛 눈동자는 어느새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저걸 뭐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질투심?
아니면 독점욕?
어쩌면 둘다일지도 모르지.
확실한 건 상당히 위험해보인다는 점이었다.
'아니..'
대족장에 대해 물으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하긴 했는데 그냥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물은 것만으로도 저런 반응이라고?
바로 조금 전까지 몸에 두르고 있던 온화한 기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흉흉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를 뿜어내는 바이올렛을 보고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내 하복부 쪽까지 올라온 바이올라도 그 변화를 느꼈는지 열심히 핥짝거리던 것까지 멈추고 제 언니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으니까.
살을 에는 분위기란 분명 이런 걸 말하는 것이겠지.
슬쩍 팔쪽으로 시선을 던져보니 팔뚝을 따라 닭살이 오소소 올라와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피식하고 바람빠지는 소리와 함께 싸늘하게 굳어있던 바이올렛의 표정이 풀어졌다.
"건방지네에.. 이렇게 누나 품에 안겨있으면서 다른 여자한테 관심을 보이는 거야?"
"아니, 그런 건.."
내가 뭐 대족장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물은 것도 아니고 그냥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물었을 뿐인데 대체 무슨 관심을 보였다는 건지 원..
어처구니가 없어서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바이올렛이 양팔로 내 머리를 꼬옥하고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쪽쪽소리를 내며 뽀뽀세례를 퍼붓기 시작했다.
"농담이야. 농담. 아, 진짜아 왜 이렇게 귀엽지?"
글쎄 정말로 농담이었을까?
뭐, 본인은 그리 말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날 자기 품 안에다가 가둬놓은 채 몸을 버둥버둥하며 방정맞기 짝이없는 모습을 선보이던 바이올렛이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번에는 또 왜 한숨인 걸까.
"진짜아.. 이렇게 귀여워서는.."
분명 칭찬인데 그리 기쁘지 않은 건 애취급하는 느낌이 다분하기 때문이겠지.
"맘 같아서는 나만 볼 수 있게 가둬두고 싶은데.."
'..미친 년이?'
"그러질 못한다는 게 아쉽네."
다른 건 몰라도 방금 내뱉은 말만큼은 결코 농담같지 않았다. 그만큼 농도짙은 진심이 듬뿍 담겨있었으니까. 그게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말이다.
설마 몸이 허약해졌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렇다고 기뻐하기도 애매해서 속으로 헛웃음만 흘리고 있으니 부지런히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바이올렛이 이내 입을 열어 대족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까 내가 말했듯 대족장은 여자야."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왕국이나 제국보다 훨씬 험난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유목민족이다.
뇌에 약육강식이라는 법칙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있을텐데 여자보다 하등한 존재인 남자를 자기들 수장으로 모신다?
그럴 리 없었다.
남자가 칭키즈칸급 지도력에 척준경급 무력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이야기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기에 대족장이라는 사람은 여성일 수밖에 없다고 이미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확신하고 있던 것과는 별개로 여자라고 오피셜이 딱 나오니 내심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로써 그 대족장이라는 존재가 내가 아는 어떤 여자하고 동일인일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으니까.
'씁..'
아니겠지?
그래, 아닐 거다.
헤어진지 몇 개월이나 지났다고 일개 족장따리에 불과했던 리파가 벌써 전직을 했겠는가.
어림도 없지.
그냥 다른 부족에서 백마 탄 초인이 등장한 걸 거다.
암 그렇고 말고.
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기에는 불안요소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걸 차례대로 나열해보자면.. 우선 리파가 이끌던 부족의 규모는 꽤 컸다.
다른 부족들의 규모가 어찌되는지야 나야 본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본적인 머릿수라는 게 있지 않은가. 리파네 부족은 한 군데 정작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유목민족치고는 그게 상당히 많아보였다.
머릿수만으로도 어지간한 소규모 부족은 압살할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랄까.
'거기에..'
당시 리파를 보좌하던, 왕국에서는 족장친위대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이들의 기량또한 범상치 않아보였다.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그랬다.
특히나 리파 옆에 딱 붙어다니던 그 장신의 여자는..
'최소 클레어.'
어쩌면 그 이상일 수도 있었고.
클레어가 내 앞에만 서면 영 맥을 못 춰서 그렇지 그녀는 결코 만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설마 왕국에서 약해빠진 이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내려줬겠는가.
아마 모르긴 몰라도 클레어와 바이올라가 서로 맞붙게되면 클레어가 압도적으로 찍어누를 거다.
몇 년 뒤에 붙는다면 결과가 좀 달라질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경험의 차이라는 게 있으니까.
솔직히 황녀인 바이올라가 여태껏 실전이라 부를 수 있는 상황을 몇 번이나 겪어봤겠는가?
그에 비해 클레어는 하루가 멀다하고 국지전이 벌어지는 국경지대에서 적들을 밥 먹듯이 썰어제낀 공으로 영웅 칭호를 따낸 여자다.
그야말로 살육의 스페셜리스트라고 해야할까.
그러니 당연히 경험의 차이가 날 수밖에.
바이올렛하고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예상 자체가 되질 않았다.
그녀의 무력은 어딘가 미스테리한 면이 있으니까.
분명 바이올라처럼 미친듯이 단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바이올라를 아무렇지도 않게 압도할 수 있을 정도라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걸까.
바이올렛을 향한 호기심을 활활 불태우고 있으려니 머릿속에 욱여넣어뒀던 것을 억지로 끄집어내듯 '으음..'하는 소리를 뱉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바이올렛이 이내 고개를 갸우뚱해보였다.
"그리고.. 음, 그 외에는 딱히 아는 게 없네."
"..네?"
아니 기껏 어렵게 질문을 던졌는데 정보같지도 않은 정보 하나 듣고 끝이라고?
황당한 마음에 그것을 그대로 눈빛 속에 담아 바이올렛을 바라보니 내 시선 속에 담긴 것을 알아차린 그녀가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야. 어떤 여자인지 궁금해서 나름대로 알아본다고 알아봤는데 너도 알겠지만 대초원이라는 곳이 워낙 특수한 곳이다보니까.."
쓸만한 정보를 건지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단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대초원은 오롯이 유목민족의 영역이다.
그렇기에 그곳으로 잠입해 정보를 수집한다던지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누가봐도 외부인이라는 게 눈에 보이는데 잠입이 될 리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쪽의 정보를 건지려면 잠입대신 내부인을 꾀어내어 정보를 전달받는 식으로 해야된다는 뜻인데.. 누가봐도 수상하게 생겨먹은 년이 뜬금없이 찾아와 대족장에 관한 정보를 요구한다?
그 꾀임에 넘어갈만한 이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유목민족들의 드높은 자존심은 왕국 내에서도 유명할 정돈데 말이다.
뭐, 이건 누구라도 혹할 수 밖에 없겠다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가를 약속한다면 회유가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식으로 쓸만한 정보를 건지긴 힘들겠지.
아니나 다를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비슷한 뉘앙스를 품은 발언이 바이올렛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녀는 연합체와 적대적인 입장에 서 있는 부족들하고도 접촉을 시도해보기까지 했단다.
"접촉 시도 중에 싹 다 덜미가 잡혀서 실패로 그치긴 했지만 말이야."
그리 말하며 쓰게 웃는 걸 보면 분명 손해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겠지.
"그나마 건진 게 있다면.. 그 대족장이라는 여자가 외부활동은 거의 안 한다는 것 정도?"
"외부활동을 안 한다고요?"
"응, 그렇다던데?"
그런데도 대족장이라는 지위에 오르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긴 한가?
바이올렛의 의견은 어떤가 싶어서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져봤지만 그녀도 의아한 건 매한가지인 듯 했다.
내 시선을 받자마자 어깨를 으쓱해보이는 걸 보면.
"부, 부상같은 거라도 입은 거 아닐까? 아니면 병이라던지.."
자연스레 대화를 주고 받는 나와 언니의 모습이 부럽기라도 했던 걸까.
어느새 핥짝거리는 것도 멈춘 채 나와 언니의 눈치를 열심히 살피고 있던 바이올라가 슬그머니 제 의견을 들이밀어왔다.
"부상.."
"으응, 그래서 그걸 다스린다고 외부활동을 자제한 걸 수도 있잖아."
그런 바이올라를 꾸짖을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바이올렛은 그런 동생의 의견에 찬동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들어보니까 한창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고 다니던 시기에는 본인이 전사들을 이끌고 친정을 다니기도 했다고 하더라고."
"그럼, 이번에 동맹에 참가의사를 표명한 건.."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을 필요성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지. 바이올라 말대로 부상때문에 외부활동을 자제해왔던 거라면 막 대족장 자리에 올랐을 때보다 권위가 많이 위축되었을테니까."
'진짜..'
그런 건가?
그랬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만 불안한 예감이 드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