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뭐야, 미친.'
솔직히 말하자면?
당혹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난 정말 몰랐으니까.
바이올라가 문 뒤에 숨어 나와 바이올렛이 섹스하는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몸이 이리되면서 상실한 건 무력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거기서 파생된 것들, 이를테면 타인의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같은 것도 다 전만 못했다.
그러다보니 눈치챌래야 눈치챌 수가 없었고.
그에 비해 바이올렛은 일찌감치 바이올라의 존재에 대해 눈치채고 있었던 듯 했다.
'하긴.'
그 정체불명의 가루를 통해 지운 건 내 체취 뿐이니까. 내 체취를 맡지 못하게 된다고 해서 다른 냄새까지 덩달아 못 맡게 되는 건 아닐테니 냄새를 통해 알아차린 거겠지. 어쩌면 소리일 수도 있고.
덕분에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었다.
관계 도중에 바이올렛이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행동했던 이유를 말이다.
설마 그게 진짜로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을지 그 누가 알았겠는가.
"바, 바이올라님..?"
그야말로 헛웃음밖에는 나오지 않는 상황에 속으로 허허허허하고 공허하기 짝이 없는 헛웃음 소리가 메아리쳤지만 그와는 별개로 내 몸은 착실하게 이 상황에 어울릴 법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메소드 연기라는 걸까.
있는 힘 없는 힘 전부 쥐어짜내서 나와 바이올렛의 체액으로 질척하게 젖은 담요를 허둥지둥 끌어와 그대로 몸을 가렸다.
당황한 표정까지 연기할 필요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로 당황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기에 그걸 굳이 숨기지 않고 얼굴 위로 드러냈다.
그런 내 행동이 바이올라에게는 '언니의 여자'처럼 비춰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크게 분노한 모습을 연기하고 있는 바이올렛의 눈치를 살피기 바쁜 와중에도 날 향해 간절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보내오던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마치 내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 같은 그런 반응이었다.
그 모습을 외면하듯, 내 얼굴로 날아와 꽂히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할 면몫이 없다는 것처럼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럼에도 바이올라는 포기하지 않고 시선으로라도 날 쫓으려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것처럼 팔짱을 낀채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바이올라를 내려다보고 있던 바이올렛이 '하..!'하고 날카롭기 짝이없는 코웃음 소리를 냈으니까.
마치 굉장히 같잖은 무언가를 목격한 듯한 그런 반응이랄까.
외면하기에는 너무나도 날카로운 그 소리에 바이올라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왜 말이 없어? 할 말 있으면 해보라니까?"
딱 그 타이밍에 맞춰서 바이올라를 밀어붙이는 바이올렛의 솜씨에는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밍을 잡는 솜씨가 기가 막혔으니까.
덕분에 오히려 본인이 화를 내야 맞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바이올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이올렛의 페이스대로 끌려가기 바빴다.
"많이 즐거웠나봐? 소리가 아주 질척질척하네? 대체 얼마나 쑤셔댄거야?"
끊임없이 퍼부어지는 매도.
그럼에도 바이올라는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좋아하는 남자의 알몸이니까."
몰아붙이는 것에 이어 이제는 수긍해주는 척이라니. 완급조절이 기가 막혔다.
대체 뭘 어쩌려고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그러니까 이번 한 번은 봐줄게. 대신.. 앞으로는 자제해줬으면 좋겠어. 형부될 사람을 보며 욕정을 하다니 그건 좀 아니잖아?"
형부.
바이올렛이 일부러 힘주어 내뱉은 듯한 그 단어에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바이올라의 눈동자가 다시금 격한 흔들림을 선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언니의 시선을 견딜 수 없다는 것처럼 시선을 푹 내리깔고 있던 바이올라가 홱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따지고 싶었던 것일까.
이를 악문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쉰 것 같기도 한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왔다.
허나 그것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그것이 끝을 맺는 것보다 바이올렛이 끼어드는 게 더 빨랐으니까.
"왜? 못 믿겠어?"
몰라서 묻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 뭔가 의도가 있는 모양인데 그게 뭘까..
"뭐, 어쩔 수 없지. 못 믿겠으면 믿게 만들어줄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주저앉아있는 바이올라로부터 빙글 몸을 돌린 그녀가 내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는 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며.. 날 향해 입을 벙긋거리기 시작했다.
바이올라에게는 보이지 않도록 아주 은밀하게 보내진 신호.
그것을 통해 바이올렛은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네가 바깥에서 홀딱 벗고 흥분하는 씹변태놈이라는 사실을 들키기 싫다면 알아서 잘 하라고.
그에 슬쩍 입술을 깨무니 어느새 내 옆에 도착한 바이올렛이 침대 끝에 걸터앉아 내 몸을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냈다.
"앗, 자, 잠.."
"가만히 있어. 이것만 보여주고 다시 덮어줄테니까."
아주 그냥 박력 넘치는 구만.
보아하니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는 듯해서 일단은 그녀가 하는 대로 장단을 맞춰주기로 했다.
딱 그리 결심한 순간 바이올렛의 손이 내 목덜미 쪽을 짚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표식을 새겨놓은 부분이었다.
그곳을 꾸욱하고 짚은 바이올렛의 손이 이내 그 부근을 천천히 문지르기 시작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 실컷 즐겼던 탓에 아직 민감한 상태에 머물러있던 몸에는 그 별거 아닌 움직임도 굉장히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잠, 윽.."
그에 나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며 바이올렛의 옷자락을 꼬옥하고 움켜쥐니 날 내려다보고 있던 그녀의 얼굴 위로 짖궃은 미소가 내걸렸다.
"자. 그 눈으로 직접 확인해."
왜 자꾸만 거길 문질러대나 했더니만 불가시 상태에 놓여있던 표식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나 보다.
나조차도 처음 그것이 새겨졌을 때 이후로는 본적 없었던 것의 형상이 꽤나 진하게 나타났다.
멀리서도 눈에 확 띌 정도로 커다랗고 진한 문양.
그것을 평범한 이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감각을 지닌 바이올라가 보지 못할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이올라 쪽으로 흘깃하고 시선을 던져보니 그녀는 눈을 부릅 뜬채 내 목덜미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 탓에 금방이라도 흘러넘칠 것만 같은 아슬아슬함을 연출하며 바이올라의 눈에 맺혀있던 것들이 창백하게 변한 그녀의 볼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내렸다.
"이럴 리.. 이럴 리 없.. 언니가 왜.."
고장난 인형마냥 똑같은 말을 쉬지않고 중얼대는 바이올라의 모습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허나 바이올렛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긴 당연히 너 때문이지."
바이올렛은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던 바이올라의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이왕 일을 벌인 김에 바이올라가 혹시라도 날 넘보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밟아놓겠다는 걸까.
뭐라 반응하면 좋을 지, 어떤 모습을 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어서 고개를 푹 숙여 표정을 숨겼다.
"그게 무슨.."
"네가 은혜를 갚기는 커녕 책임을 질 생각도 없어보이니까 당연히 나라도 책임을 져야하지 않겠어?"
결국 이리된 건 네가 쓸데없이 미적거렸기 때문이다.
바이올렛은 그리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이 바이올라에게는 어떤 식으로 들렸을까.
나야 알 수 없었다.
다만 바이올라의 반응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치명타였구만..'
그 증거로 어느새 새하얀 이빨 밑에 깔린 바이올라의 아랫입술 에서는 새빨간 피가 송골송골 새어나오고 있었다.
"뭐.. 나한테도 썩 나쁜 일은 아니기도 했고."
"..."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영웅이라 불릴 정도잖아? 남편으로 삼기에 이만한 상대도 또 없지."
차라리 날 사랑했기에 이런 일을 벌인 거였다고 말했다면?
"고작..! 고작 그런 이유로..!"
바이올라가 저렇게까지 격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허나 바이올라는 내게 있어서 진심이었고, 그렇기에 그녀는 여태껏 제대로 된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던 모습이 거짓이었던 것처럼 격렬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토해냈다.
그녀의 몸에서부터 뿜어져나온 투기가 방 안을 뒤덮었다.
덕분에 그것에 노출된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런 날 구해낸 건 다름아닌 내 옆을 차지하고 있던 바이올렛이었다.
"하."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친 그녀가 허공에 대고 손을 휙 휘저은 순간 사방에서 내 몸을 찔러오던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역시..'
대체 뭘 믿고 그토록 바이올라를 자극하나 했더니만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가지가지 하는 구나. 네가 내 동생이라는 게 부끄러울 정도야."
"으읏..!"
"그리고 뭐? 고작? 고작이라고 했니?"
그 말과 함께 시작된 건 매도의 폭풍이었다.
난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널 대신해 제국의 은인을 책임진 것 뿐이다.
그 사실에 감사를 표하지는 못할 망정 분노를 드러내다니 황녀면 황녀답게 행동해라.
대충 그런 뉘앙스의 발언들이 바이올렛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바이올라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허나 바이올렛의 만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뭐.. 지금은 네게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한창 매도의 말을 토해내던 그녀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더라고."
어느새 그녀는 제 동생에게 과시라도 하듯 내 목덜미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다만 후사를 잇는 게 좀 걱정이긴 했는데.. 너도 봤다시피 그 점도 문제 없을 것 같고."
그리 말하는 바이올렛은 여전히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전라였고, 그렇기에 그녀의 다리 사이에서는 내가 그녀의 안에 대고 실컷 싸지른 것이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누가봐도 도발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기 짝이 없는 바이올렛의 행동에 그것을 목격한 바이올라가 마침내 꾹꾹 눌러담고 있던 분노를 터뜨렸다.
새빨갛게 충혈된 눈이 바이올렛에게 고정되었다.
어느새 꽈악하고 쥐어진 바이올라의 손은 뚜둑뚜둑하고 살벌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사방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것을 바이올렛을 향해 휘둘러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모습.
그럼에도 바이올렛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왜? 한 번 해보려고?"
그리 말한 바이올렛이 가벼이 웃었다.
가당치도 않다는 것처럼.
그리고 정확히 그 다음 순간이었다.
그저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뿐인데 어느새 바이올렛은 바이올라의 앞에 서 있었다.
바이올라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고 그대로 그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덕분에 바닥과 생이별을 하게된 바이올라의 두 발이 미친듯이 버둥거렸다.
"크으읍..!"
바이올라는 어떻게든 자신의 목을 움켜쥔 언니의 손을 떼어내려 했다.
허나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두 손을 모두 동원하고도 부족해보이는 그녀와는 달리 바이올렛 쪽은 여유가 넘쳐보였으니까.
"건방진 내 동생.. 널 어찌하면 좋을까."
그리 중얼거리던 바이올렛이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싱긋 웃었다.
'설마..'
그 모습에 내가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끼고 있던 순간.
바이올라를 제쪽으로 끌어당긴 그녀가 동생의 귀에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안이 그렇게 좋니?"
그 말에 바이올라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투명한 눈물만 주륵주륵 쏟아낼 뿐.
다른 이도 아니고 혈육이 그러고 있으면 동정심을 느낄 법도 한데 바이올렛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바이올라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쯧."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울려퍼지더니..
바이올렛이 바이올라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바이올라가 바닥에 엎어진채 기침을 연거푸 쏟아냈다.
"이런 것도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라고.. 어쩔 수 없지."
그리 중얼거린 바이올렛이 엎어져있는 바이올라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더니 진짜 아끼는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바이올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했다.
"이안과 그렇게 맺어지고 싶니?"
물론, 바이올라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기침을 쏟아내기도 바빴으니까.
"마지막 기회마저 잃고 싶은 게 아니면 대답하렴."
허나 바이올렛은 가차 없었고..
이어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기라도 한 것인지 홱하고 고개를 치켜든 바이올라가 이내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리 중얼거리며 자신의 동생을 내려다보는 바이올렛의 얼굴 위로 요사하기 짝이 없는 미소가 걸렸다.
그러더니..
"그럼 벗으렴."
그녀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