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바이올라 시점****
'피곤해..'
아무래도 수련에 너무 열중했던 모양이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몸을 잡고 밑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몸이 무거워지는 듯해서 슬며시 이를 악물었다.
'아.'
또다.
또 이 거지같은 기분이 찾아와버렸다.
꼭 마치 누군가 귀에 대고 힐난의 말을 끊임없이 속삭이는 듯한, 그런 기분.
허나 이것의 진짜 거지같은 점은 그렇게 속삭여지는 힐난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들대로였으니까.
-비겁자.
그래, 자신은 비겁자였다.
-겁쟁이.
그 말도 맞았다.
-은혜도 모르는 년.
쉬지 않고 울려퍼지는 속삭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것들을 듣지 않으려고 그토록 몸을 혹사시켰던 거였는데..
역시 이번에도 아무 소용도 없었던 모양이다. 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몸에서 진이 다 빠지기 무섭게 이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지는 걸 보면.
한 마디가 속삭여질 때마다 말로 된 화살이 몸으로 날아와 푸욱하고 박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은 이미 만신창이라고, 제발 그만해달라고 애원해봐도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가혹한 처사.
그렇지만 마음 속 한켠에는 이런 꼴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끊임없이 속삭여지는 말들 중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속삭임대로 자신은 다른 여자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따지고 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이유 하나 때문에 생명의 은인에게 제대로 된 감사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던 비겁자였으며 겁쟁이였고, 은혜도 모르는 년이었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기껏 이안이 자신을 배려해 먼저 손을 내밀어줬는데 감사하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하다니.
'머저리같은 년.'
-네게 이안을 사랑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닥쳐."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해서 씹어뱉듯이 내뱉어봤지만 조롱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이안이 불쌍하네.
"..닥치라고."
-분명 그 아이 앞에 놓여져있던 길은 굉장히 찬란했을텐데.
"닥치라고 했잖아..!"
-그런 찬란한 미래까지 포기해가며 구해낸 년이 은인한테 목숨을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 한 마디 조차 하지 않는 배은망덕한 년이라니.
처음이었다.
제대로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것이 이토록 아프게 느껴진 것은.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이안은 제국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을 지닌 자신을 상대로 압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니,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심판이 이안의 승리를 선언했으니 사실상 그의 실력이 자신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보는 게 맞겠지.
그 정도면 사실상 같은 나이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을 거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세월이 흐른다면?
이안은 당당히 대륙 최강자 반열에 올랐겠지.
그쯤되면 성별같은 건 문제가 되지 않을 거다.
아니, 오히려 남자기에 더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의 씨를 받아 아이를 잉태하면 그의 재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날지도 모르니까.
분명 그와 한 번이라도 동침하고자 하는 이들이 줄을 설 것이며, 각국에서도 온갖 혜택들을 내세우며 이안을 자기들 쪽으로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이안이 그런 상황을 좋아할지 싫어할지를 떠나서 그것은 남자로 태어나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출세일 것이다.
늘 여성의 밑이었다가 스스로의 실력을 증명해 마침내 여성의 위에 선 것이니까.
그런 미래를, 어쩌면 이안이 간절하게 바랬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자신이 부숴버렸다.
만약 자신이 심판의 판정에 분한 마음을 품는 대신 순순히 승복했다면?
그토록 허무하게 기습을 허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때는 그 정도로 분했다.
처음으로 손에 넣고 싶은 이가, 평생토록 옆에 두고 싶은 이가 나타났는데 이대로 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배 안쪽에서는 주제넘게 승패를 결정지은 심판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들끓었다.
그렇게 끓어오른 분노가 시야를 좁혔고, 몸을 굳게 만들었다.
그래서 당해버렸고.
'두 번이나 구해줬구나.'
그 순간 깨달았다.
이안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는 걸.
만약 심판이 자신을 향해 접근할 때 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으로 자신의 몸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필시 그 자리에서 심장이 꿰뚫려 즉사했겠지.
심장에 구멍이 뚫리고도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자신을 목숨의 위기에서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꼴사납게 쓰러진 자신이 적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기까지 했다.
자신의 몸이 산산조각나는 걸 감수해가면서 말이다.
이안은 자신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오른 무인이었다. 그런 이가 스스로의 몸을 아끼지 않을 리 없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본인의 몸이니까.
그는 그런 걸 희생한 것이다.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쌓아올렸을, 어쩌면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거의 일평생을 들여 쌓아올렸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것을 말이다.
만약 거기서 이안이 희생을 각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교도 놈들과 맞섰던 이들의 증언을 떠올려보면 놈들은 사람을 조종하는 괴이한 술법을 사용한다 했었다.
그런 놈들에게 있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있는 자신은 최고의 인형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일단 조종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무려 제국의 황녀가 사교의 주구들에게 조종당해서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명예와 체면을 그 무엇보다 중요시 여기는 제국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씌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테니까.
그렇기에 이안은 자신의 은인임과 동시에 조국인 제국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를 상대로 감사를 표하고 은혜를 갚지는 못할 망정 다른 이들의 신경쓰인다는 이유로 제대로된 감사인사조차 전하지 못했다.
한낱 축생도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이에게 자기 나름대로 은혜를 갚는다고 하던데 이래서야..
-가축보다 못한 년.
아니, 이또한 다 변명에 불과했다.
자신은 그냥 겁이 났던 거다.
그를 상대로 감사를 표한 순간,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기껏 숨겨놓은 상처를 헤집음당한 이안의 표정이 일그러질까봐.
그런 얼굴을 한채 자신을 원망할까봐.
너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런 꼴이 될 일은 없었을 거라고 경멸과 증오가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이안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준비해놨던 것들 중에서 단 하나도 입밖으로 꺼내들지 못했다.
그냥.. 그냥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바보처럼.
머저리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안이 그 자리를 파한 순간, 그대로 도망쳤다.
그런 자신을 보며 이안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경멸했겠지.
그래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분명 구해준 은혜도 모르는 쓰레기같은 년이라 생각했을 걸?
그랬을지도 모르고.
-나같았으면 꼴도 보기 싫었을텐데.. 참 이안이 착하긴 해.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선뜻 그를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나마 그가 참기 힘들 정도로 보고 싶을 때 언니의 힘을 빌려 몇 번 얼굴을 내비친 게 전부일 뿐.
-대단하다. 대단해.
나도 알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스스로가 한심한 년이라는 것쯤은.
그러니까.. 더는 한심해지지 않을 거야.
한심한 모습은 지금까지 보인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왜? 감사 인사라도 하려고? 이제와서?
그래, 그럴 거다.
어쩌면 이안은 진작에 안 하고 이제와서 그딴 말이나 하려 왔냐고 자신을 경멸하는 눈빛으로 쳐다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전할 거다.
구해줘서 고맙다고.
-이기적이네. 그래봐야 네 자기만족일 뿐이잖아?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앞으로 남은 삶을 그에게 바칠 것이다.
설령 그가 그걸 바라지 않더라도,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지라고 말하더라도 포기하지 않을 거다.
그의 옆에 서지 못하게 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평생토록 다 갚지 못할 은혜를 갚고 싶을 뿐이었다.
그로인해 이안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에 '보람'을 느낀다면.. 그때는 정말 이 지긋지긋한 속삭임과도 작별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결정은 내렸다.
남은 건 그걸 행동으로 옮기는 것뿐이었다.
해서 연무장을 빠져나와 언니의 집무실이 자리하고 있는 숙소 맨윗층으로 향했다.
혼자서 찾아가도 되긴 했지만, 그보다는 언니의 힘을 빌리는 편이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를 마주할 수 있게 해줄테니까.
이 결심을, 이 마음을 한시라도 빨리 그에게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언니의 방이 있는 곳까지 올라왔던 것인데..
대체 어찌된 일인지 문 옆을 지키고 있어야할 호위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명백히 비정상적인 상황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굳게 닫혀있는 문쪽으로 향했다.
호위가 문앞을 지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안에 없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렇다면 돌아올 때까지 안에서 기다리면 될테니까.
그리 생각하며 문앞에 섰다.
섰는데..
"하읍.. 츕.."
그 순간 생각치도 못한 소리가 방 안쪽에서부터 들려왔다.
질척질척하게 젖은 것들끼리 서로 얽히고 섥히며 뒤섞이는 소리.
수련에만 집중하느라 아직 남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만 저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노골적인 소리였으니까.
대체 어떤 식으로 입을 맞추면 저런 소리가 나는 것일까.
숨도 안 막히는지 쉬지 않고 울려퍼지는 그 소리에 얼굴 위로 피가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언제..?'
자신만큼이나 남자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언니다.
그런 언니가 방으로 남자를 끌어들이다니.
끌어들인 남자는 누구고 그 남자와는 어떻게 만나게 된 것일까.
순간적으로 울컥하고 치솟은 호기심과 함께 깨달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걸.
기껏 마음을 굳혔는데 이대로 물러나야 한다는 사실이 아쉽긴 했지만 평생토록 혼자 살 것처럼 행동하던 언니가 모처럼 남자를 사귀어보겠다는데 동생이 되서 방해를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이안을 찾아가는 거야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
언니의 힘을 빌릴 때보다야 시간이 좀 더 걸릴테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차라리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급한 마음에 언니의 힘을 빌리려 했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면서 조심스레 몸을 뒤로 물렸다.
'근데 대체 누구지..'
아니 물리려 했다.
"윽.."
그 순간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익숙한 목소리로 된 헐떡거림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테지.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하고는 살짝 다르지만, 그럼에도 익숙하고 친숙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그렇기에 모르는 척, 못들은 척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목소리.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하고는 다르게 달콤함을 품은 채 헐떡이고 있었다.
쿵- 묵직한 무게를 자랑하는 것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잘못 들은 거겠지.'
그래,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방금 그건 그냥 그때부터 시도때도 없이 떠들어대던 목소리의 농간일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언니하고.. 이안이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고 넘기려 했다.
그냥 착각한 거라고, 그대로 돌아서려고 했다.
허나 야속할 정도로 밝은 귀가 자꾸만 속삭였다.
착각이 아니라고.
저건 네가 아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맞다고.
'아니야..'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해?
'아니라고..'
-그렇게 확신할 정도면 한 번 확인해보든지.
'그, 런 짓을 어떻게..'
언니가 눈치챌 거다.
자신만큼이나 예민한 감각을 지닌 게 바로 언니니까.
-몰래 확인해보면 되지. 남자랑 떡치고 있는데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있겠어?
남자에게 집중하기도 바쁠거라며 요사한 목소리로 이어진 속삭임에 손이 제멋대로 문고리를 향했다.
'그래..'
이건 이안이나 언니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믿기에 하는 행동일 뿐이다.
그럴 리 없으니까.
둘이.. 그럴 리 없으니까.
속으로 그 말을 몇 번이고 되뇌이면서 어느새 덜덜 떨리기 시작한 손을 움직여 조심스레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 있는 사람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방 안의 풍경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살짝 문을 열어젖힌 뒤, 그쪽을 향해 얼굴을 가져다댔다.
그 순간 눈으로 파고들어온 것은..
"빨아."
민망하지도 않은지 허벅지를 좌우로 쫙 벌린 채 스스로의 그곳을 가리키며 누군가를 향해 명령하고 있는 언니와-
남자 입장에서는 치욕스럽기 그지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주저도 없이 조심스레 언니의 그곳을 향해 입술을 가져가는-
이안의 모습이었다.
쿵쿵쿵쿵-
머릿속에만 존재하던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풍경을 그대로 끄집어내놓은 것만 같은 그 모습에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