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17)화 (316/366)



〈 31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훔쳐보기 덕분에 바이올렛의 만행에 대해 알게 된 성녀가  상대로 여지를 남기긴 했지만, 그로인해 내 일상이 극적으로 달라지는 일은 없었다.


왜냐고?

그야 그게 전부였으니까.

내가 도와달라고 말한 것도 아닌데 따지고 보면 완전 타인에 불과한 자신이 주제 넘게 나설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적어도 한두 번 정도는  그것에 대해서 언급할 법도 한데  날 이후 그녀는 그것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말 그대로 죽도 밥도 안 되고 애매하게 끝나버릴 게 분명한 상황.

그렇기에 성녀를 조금  자극해보기로 했다.


"외출.. 이요?"

그 자극 방법이란 간단했다.

성녀에게 다시 한 번 외출을 신청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네."


말 한 마디면 끝나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작업, 허나 그것의 효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치료가 끝나는 타이밍에 맞춰서  말을 꺼내드니 성녀의 얼굴이 무슨 조각상마냥 딱딱하게 굳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야 그렇겠지.

나와 바이올렛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알고 있는 그녀가 내 외출신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없으니까.

서글픈 척 시선을 내리깔  있었음에도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던 건 그래서였다. 그 편이 훨씬  효과적일 거라 보았으니까.

그렇게 애써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고 있으려니 무슨 메두사라도 마주한 것마냥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성녀이 입술 끝을 파르르 떨었다.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을 감정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지금  순간 성녀는 날 보며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동정심? 바이올렛을 향한 분노?


 중에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만 확실한 건 잠잠하던 성녀의 감정에 파문이 일었다는 것이다.

"..꼭 하셔야 되는 건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식으로 내 요청에 반문할 리가 없으니까.

"몸 상태가 좋지 않으세요. 위험할 수도 있어요."

이번에는 쓰게 웃어야할 타이밍이었다.


해서 잽싸게 덧붙여진 성녀의 설명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한 일이라서요."


"중요한 일이라면 어떤.."


뭐든 처음이 가장 어렵다고 처음으로 동요를 드러냈던 성녀는 굉장히 집요한 면모를 보였다.


조심스러운 척 하면서도 무슨 일로 외출을 하냐고 물어오는데 그리 물으면 내가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한 행동일까.

정말로?


물론, 난 적당히 얼버무리는 쪽을 택했다.

"그.. 일이  있어서요."


너한테 말해도 될만한 일은 아니다.

그런 뉘앙스를 팍팍 풍겨줬더니 성녀의 입술 끝 부분이 다시  번 파르르 경련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번에 주셨던 그.. 성수?를 한 번 더 받을 수 있을까요?"

굳이 성수까지 요청했으니 상상의 재료는 이만하면 충분하겠지.


내가 그것을 받아들고 성역을 떠나고 나면?

아마 성녀의 머릿속에서는 온갖 망상들이 폭주할 거다.


그리고 그 상상의 대부분은 내가 바이올렛의 밑에 깔려 서글픈 표정으로 자지를 대주고 있는 것일테고.

일련의 대화에서 자기가 여기서 무슨 말을 한들 내 결정을 돌리긴 어려울 거라 본 것일까.

한 차례 입술을 꾹하고 깨문 성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성수라면.. 내일 아침까지는 준비해드릴게요."


"많이 바쁘실텐데..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말만으로 그치지 않고 손을 뻗어서 성녀의 손을 꼬옥하고 움켜쥐었다.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스킨십에 놀란 것일까. 줄어든 내 손만큼이나 작은 성녀의 손이 내 손안에 갇힌 채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 내 시선을 피하더라.

혹시 부끄러움이라도 느낀 것일까.

뺨이 약간이지만 빨갛게 물들어있는  보면 그런  같긴 했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나 보일 법한 반응들이 그녀의 얼굴 위에 머물고 있었으니까.

죄책감이라.

무엇으로 인한 죄책감일까.


말은 뭐든 다 해줄 것처럼 해놓고서 정작 내게 안 좋은 일이 닥치니 이도저도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

아니면 지금처럼 아무 것도 못하고 오히려 내 외출을 돕는  바이올렛의 방종을 옆에서 거드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정도까지 착하겠냐만은 다른 이라면 몰라도 눈앞에 있는 여자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일평생을 성녀로 살면서 외부와의 접촉이 극도로 제한된 삶을 구가해왔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때로 헛웃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순진한 면모가 있었으니까.

본인은 나름대로 그걸 숨겨본다고 숨긴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그런 식으로 해서 숨겨진 부분보다 때때로 드러나는 부분이 더 많았다.

"아.. 죄, 죄송합니다."

성녀에 관한 고찰은 여기까지.

끊임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것을 단칼에 잘라낸 뒤, 성녀가 보인 반응을 이상한 쪽으로 오해한 척 황급히 그녀에게서 손을 떨어뜨렸다.

민망하다는 뜻의 미소를 지어보이는  덤이었다.


그리고는 바로 조금 전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꼭 마치 더러운 뭔가라도 바라보는 듯한 눈빛은 덤이었다.

물론, 다 성녀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 행동들이었고, 그런만큼 효과 또한 확실했다.

성녀의 얼굴이 덩달아 서글프게 변했으니까.

'참 공감을 잘한단 말이지..'

허나 고작 이것만으로는 부족할 거다.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가 레이시아를 무릎 꿇려놓고 그녀를 농락하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을테니까.

'이럴  알았으면  자제했을텐데..'


허나 이미 보여버린 걸 없는 일로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방금처럼 성녀에게 혼동을 주는 것뿐이었다.


'음..'


여기서 내가 어떻게 해야 지금쯤 엄청난 혼란을 느끼고 있을 성녀를 확실하게 흔들어놓을 수 있을까.


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면서 이만 가보겠다는 듯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성녀를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였다.


"따라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것도 모자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니 언제나처럼 성녀의 만류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평소였다면 그 말에 수긍했겠지만..

"아뇨, 이거라도 하게 해주세요."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성녀의 만류를 가볍게 뿌리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와 나란히 섰다.

그리고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를 그녀와 함께 움직였다.

"성녀님."

침대에서부터 문 앞까지.


5미터는 될까 싶은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고, 그렇게 성녀가 문을 앞에 둔 순간 조심스레 그녀를 불렀다.


그에 문고리를 향해 뻗어나가던 고운 손이 허공에서 우뚝하고 멈춰섰다.

"매번 드리는 말씀이라 질리셨을지도 모르지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

"성녀님께서는 제게 교국의 은인이라 하셨지만.. 제게는 오히려 성녀님이 제 은인이십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이 말만큼은 거짓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도 백퍼센트짜리 진심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두 발로 돌아다니는 건 생각도 못했을테니까.

어찌어찌 목숨은 건졌을지도 그 뒤에 침대 위에서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어느 순간 잠에 들듯이 죽어버렸을테지.

진심은 언제 어디서나 통하는 법.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허공에 애매하게 멈춰있던 성녀의 손이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리며 동요를 드러내는 광경을 목도할  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뒷모습에 시선을 두고 있자니 지금 이 순간 그녀가 짓고 있을 표정이 무진장 궁금해졌다.

울컥울컥하고 솟구치는 호기심, 허나 그것에 몸을 맡기지는 않았다.


그래버리면 기껏 잡아놓은 분위기가 다 망가져버릴테니까.

갑작스러운  감사인사에 당황했는지 멈칫하며 굳어있던 것도 잠시, 어찌어찌 당황을 수습하는데 성공했는지 마침내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한 일인걸요."

그리 말하는 성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비틀어서 쥐어짜낸 듯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방금  한 마디가 그녀의 안에 꽤나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는 걸.

'조금만  흔들면 되려나.'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성녀가 자신은 일정이 있어서 그럼 이만 가보겠다며 방을 빠져나갔다.


졸지에  안에 홀로 남겨지게 된 나는 펑퍼짐한 스타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그 위로 얼핏얼핏 드러나는 순산형의 엉덩이를 보며 속으로 작게 입맛을 다셨다.

언젠가  법복을 까뒤집을 순간을 상상하면서.


.
.
.
.
.
.
.
.
.
.
.
.
.
.
.
.
.
.
.

아침까지 성수를 준비해주겠다는 약속을 성녀는 착실하게 지켰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시녀인 사라가 말간 빛이 도는 액체가 가득 담긴 병을 쟁반 위에 올린  내 방을 찾아왔으니까.

"감사합니다."

남들은 침대에서 허우적대기 바쁠  노동전선에 투입되어 자신을 불사르고 있는 그녀를 향해 감사인사를 건넨  내 앞으로 배달된 병을 집어들었다.

그에 맞춰  안에 든 액체가 찰랑찰랑 흔들렸다.


'일단 보조 배터리는 확보했고.'


남은 건 따먹히러 가는 것 뿐인가?


어쩌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솔직히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애초에 날 자기 영역이라   있는 숙소로 부른 시점에서 바이올렛은 이번에야 말로 날 따먹고 말겠노라고 선언한 거나 다름없었다.


다만 딱 한 가지 변수가 있다면..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건 바로 바이올라였다.

사실상 불가해의 영역에 다다른 후각을 지닌 그녀이니만큼 분명 내가 제국 측 숙소로 입성하는 순간 내 존재를 알아차릴텐데.. 그런  옆에서 언니의 냄새와 발정한 암컷의 냄새가 동시에 풍긴다면?


'분명 가만히 있지 않을텐데..'


어쩌면 자매가 한 남자의 소유권을 놓고 생사결을 벌이는 굉장히 희귀한 장면을 보게될지도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 가겠냐만은 정말로 그리 된다면 바이올라가 느낄 배신감이 장난 아닐테니까.

내심 결혼까지 생각했었던 남자가 다른 여자도 아니고 자기 언니 밑에 깔려서 따먹히고 있다?


만약 내가 바이올라였다면 언니는 물론 남자까지 도매급으로 썰어버렸을 거다.

그 광경을 상상한 탓일까. 바이올렛에게 따먹히고 있는데 눈이 돌아간 바이올라가 그 현장을 덮치는 광경이 자꾸만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 시점에서 나는  생각하길 포기했다.

어차피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딱히 없었으니까.


그리고 뭣보다 바이올렛이 아무 생각없이 자기 영역으로 불렀을  같지도 않았고.

분명 무언가 대책을 세워놨겠지.

'저번에 그 가루를 쓰려나?'

일전에 바이올라에게 바이올렛과의 관계를 들킬  했을  등장한 바 있는 가루를 떠올리며 깨끗하게 몸을 씻었다.

그리고는 입으라고 가져다놓은 옷들 중에서 천의 면적이 가장 넓은 것들만 골라서  위에다가 걸쳤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나서야..

줄을 잡아당겨 사라를 호출했다.

성역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그녀의 안내는 필수였으니까.

"지금 나가시는 겁니까?"

"네."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앞장 서서 걷기 시작한 그녀를 따라 성역을 빠져나오니?

"왔어?"


눈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건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벽에 몸을 기댄 채 너무나도 태평한 얼굴로 이쪽을 향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보이는 모습이 그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마치 이 시간에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잡아둔 것 같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침부터 참 부지런하네?"


저 말이 '아침부터 그렇게 나한테 따먹히고 싶었어?'로 들리는  과연 기분 탓일까.

갑작스러운 바이올렛의 등장에 당황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괜히 성역지키미로 임명된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어지간해서는 당황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라또한 당황한 듯 나와 바이올렛을 번갈아 바라보기 바빴으니까.

그런 사라의 시선이 꼭 '둘이 미리 약속잡은 거 맞느냐.'라고 묻는 듯 했다.

그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른 이쪽으로 오라는 것처럼 손을 앞뒤로 팔랑팔랑 흔들고 있는 바이올렛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황녀 님이야 말로.. 일찍 나오셨네요."


"기대가 되서 말이야. 방에 있는 게 그렇게 답답하게 느껴질 수가 없더라."


날 보며 바이올렛이 씨익하고 웃는 사이 뒷쪽에서는 저벅하고 누군가 걸음을 옮기는 소리가 났다.


다시 성역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일까.


뒷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촉각을 기울이며 바이올렛의 옆으로 가서 섰다.


그랬더니..

"그럼, 얼른 갈까?"

어느새  등뒤로 뻗어온 바이올렛의 손이 내 엉덩이를 꽈악하고 움켜쥐었다.


동시에 '하아..'하고 바이올렛의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온 뜨겁고 촉촉한 숨결이 내 볼을 간지럽혔다.

"이 이상은 내가 참기 힘들것 같거든.."


그리 말하는 바이올렛의 눈 속에는 정욕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날 덮쳐서 제 밑에다가 깔아뭉개기라도 할 것처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