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아쉽네.'
저 빌어쳐먹을 베일만 없었어도 성녀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뭐, 목덜미가 저 정도니 얼굴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할 뻔자였지만, 그래도 짐작만 하는 거하고 직접 보는 거하고는 다르지 않나.
아무튼 저렇게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걸 보면 내 반문 덕분에 비로소 깨달은 듯 했다.
방금 제 질문이 얼마나 섣부른 것이었는지를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질문을 왜 던져서는..'
방 안을 훔쳐보고 있었다고 광고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허나 그럴 리는 없겠지.
그보다는 차라리 얼떨결에 흘러나온 것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 내가 해야할 일은..
"..아, 몸 상태 말인가요?"
모르는 척이었다.
그러나 그냥 모르는 척만 해선 안 됐다.
모르는 척을 하더라도 성녀에게 모종의 인상을 남겨야만 했다.
그 모종의 인상이란 바로 내가 전혀 괜찮지 않은 데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고.
성녀의 질문을 듣고 놀란 척 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입가에 머금었던 건 다 그를 위함이었다.
'먹혔으려나?'
먹혀들었을지 모르겠다.
표정만큼은 의도한 대로 지어진 것같은데 그걸 보고 성녀가 내가 바라는대로의 인상을 받았을지는 미지수였으니까.
어떻게 얼굴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베일로 덮여있어서 그러기도 힘들었다.
'아오..'
맘 같아서는 그 놈의 베일 좀 이제 좀 벗으면 안 되냐고 한 소리 하고 싶을 정도였다.
'하긴 뭐..'
한편으로는 베일을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상대가 그 '바이올렛'아닌가?
나같았어도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느낌으로 베일을 뒤집어 썼을 거다.
그만큼 바이올렛에게는 상대방을 위압시키는 무언가가 있었으니까. 프레셔라고 해야할까. 레이시아가 상대방을 감화시키는 느낌이라면 바이올렛은 말 그대로 찍어누르는 느낌이다보니 당연히 겁이 날 수밖에 없었겠지.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바이올렛이 방 안에 존재할 때의 이야기고, 그녀는 바로 조금 전에 제 발로 걸어나갔으니..
'이제 벗어도 될 텐데.'
딱 보니까 베일을 벗고 있는 것보다 뒤집어 쓰고 있는 게 익숙해서 그것이 주는 불편함에도 적응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베일을 뒤집어 쓰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눈치로 보였고.
"..예, 맞, 습니다. 최근 들어서 신성력이 떨어지는 속도가 빨라졌으니까요."
"음, 당장은 크게 문제 없는 것 같은데요? 아, 그런데 혹시.. 어디 다녀오신 건가요?"
해서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 말에 답을 하는 성녀를 향해 그리 물었다.
"네? 아, 아뇨.. 그건 왜.."
내 딴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베일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어딜 다녀오셨나 보구나라는 느낌으로 내뱉었던 말인데 당황을 한웅큼 집어먹은 성녀에게는 그런 내 물음이 자길 의심하는 걸로 비춰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내 물음에 답을 하는 성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아, 평소와는 다르게 베일을 쓰고 계셔서요."
너 맨날 나갈 때 그거 뒤집어 쓰고 나가지 않았느냐.
내가 그 말을 직접적으로 입에 담고 나서야 성녀의 우려가 수그러들었다.
"아."
"그래서 오늘도 어디 다녀오신 건가 했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질문이었죠?"
그리 말하고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마냥 얼굴 위로 쓴웃음을 머금어보였다.
원래 어필이라는 건 하면 할수록 좋은 거라고 그 한국산 카사노바 놈이 그랬었으니까.
낯간지러움까지 참아내며 한 행동이었는데 다행히 효과가 아예 없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던 성녀가 이내 뒤집어 쓰고 있던 베일을 조심스레 걷어올렸으니까.
그렇게 마주하게된 그녀의 맨얼굴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아보였다. 보아하니 그새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모양.
"그, 그럼 몸 상태를 확인해봐도 될까요?"
내 상황이 위험해보여서 일단 급한대로 달려오긴 했는데 이대로 그냥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빠져나가자니 아까 핑계삼아서 둘러댔던 말이 마음에 걸렸나 보다.
확인 좀 해봐도 되겠냐며 성녀가 내 의견을 물어왔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바이올렛과 나 사이에서 벌어진 상황을 상당히 신경쓰고 있다는 걸.
무턱대고 손을 댔다간 바로 조금 전까지 바이올렛에게 희롱 비스무리한 걸 당하던 내가 격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그녀는 내 상황을 제대로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겠지.
그동안 훔쳐본 게 여전히 머릿속에 또렷할테니까.
레이시아를 무릎 꿇리고 그녀를 내 마음내키는대로 희롱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봐왔었는데 그런 놈이 다른 여자에게 약점이 잡혀 무력하게 희롱을 당하는 모습을 보인다?
'나같아도 못 믿겠는데..'
나조차도 그럴진데 성녀는 어떻겠는가.
혼란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아마 지금쯤 머릿속으로는 어느 쪽이 진짜 내 모습에 가까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겠지.
굳이 확인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굉장히 복잡해보이는 표정을 얼굴 위에 띄운 채 성녀가 날 향해 다가왔다.
그렇게 나와 그녀 사이의 거리가 실시간으로 줄어들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힐끔힐끔 내 얼굴을 곁눈질하며 내 기분이 어떤 지를 살피던 성녀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해갔다.
어딘가 복잡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그와 더불어 열심히 내 얼굴을 흘긋거리던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한곳에 못 박히듯 고정되어 있었다.
얼굴이라 보기에는 좀 낮고, 대충 목이랑 쇄골 사이라 해야할까.
대체 뭘 그렇게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싶어서 그녀의 시선이 닿을만한 곳으로 손을 가져가 훑어봤다. 그러자 손가락 끝으로 휘감긴 건..
"아."
피부가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부풀어오른 곳을 만질 때나 느낄 수 있을 법한 감촉이었다.
대체 얼마나 빨아제낀 것인지 어딘가 오돌토돌한 느낌마저 주는 그것의 감촉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성녀가 왜 그리 내 목덜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를.
그녀 입장에서는 내 목덜미에 강제로 희롱을 당했다는 증거가 버젓이 남아있는 셈이니 당연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당황스러웠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그것의 존재는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꼭 마치 부모님께 보이지 않기 위해 안 입는 옷 사이에다가 몰래 쑤셔넣어놨던 성적표가 가족하고 다 함께 옷 정리를 하는데 튀어나온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아, 음, 저, 저번에 외출했을 때 벌레한테 물렸나 봅니다."
내가 생각해도 되도 않는 변명을 입밖으로 내뱉었던 건 말이다.
당황하면 아무 소리나 내뱉어대는 게 사람이라는 생물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겨울에 벌레라니.
핑계 삼더라도 그럴 듯한 걸 대야지 벌레가 뭐란 말인가.
속으로 그리 한탄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내가 당황했다는 사실이 성녀에게 전해졌을테니까.
문제는 그걸 그녀가 어떤 식으로 해석하냐는 것인데..
궁금한 마음에 그녀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때마침 눈으로 들어온 것은 윗입술 아래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낸 새하얀 치아가 아랫입술을 꾸욱하고 깨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목도한 순간 확신했다.
상황이 내게 유리한 쪽으로 풀렸다는 걸.
"하하.. 하.."
어색하게 웃다가 슬쩍 시선을 돌리니 성녀가 침대 옆에 놓여있던 의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겨 그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그녀를 향해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실례할게요."
그 말과 함께 따뜻한 손이 손목을 휘감아왔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흠칫하고 몸을 떨어보이는 걸 잊지 않았다. 꼭 마치 여성의 손길에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전에 보여준 모습이 있다보니 당연히 그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한 번으로 부족하다면 여러 번 시도하면 그만이니까.
지금 중요한 건 성녀의 머릿속에서 내가 남자답지 않게 여자를 내 마음대로 농락하며 흥분을 느끼는 특이한 놈으로 낙인 찍히기 전에 그것을 애매하게 흐트려놓는 것이었다.
'어떻게..'
효과가 있으려나?
상황상 고개를 그녀 쪽으로 돌려 대놓고 확인하기는 좀 그래서 활짝 열려있는 창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을 힐긋거렸다.
허나 생각했던 것만큼 형상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성녀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고 있기도 했고.
"일단.. 생각했던 것보다 소모된 양이 많은 듯하니 그 부분만 좀 채워놓도록 할게요."
평소답지 않게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성녀의 손에 잡힌 손목을 통해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바이올렛이 키스마크를 새겨놓은 부분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덕분에 군데군데가 볼록하니 부풀어있던 그곳이 빠르게 가라앉은 걸 실시간으로 느낄 수 있었다.
'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신성력을 충전해주는 척 하면서 키스마크를 지워버릴 줄이야.
아쉽다고 해야할지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들어서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알 수 없는 복잡한 기분에 내심 쓴웃음을 짓고 있으니 손목을 통해 흘러들어오던 것이 뚝 끊어졌다.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 현상에 성녀의 시선을 외면하듯 옆으로 돌리고 있던 고개를 다시 그녀 쪽으로 향했다.
"그.. 감사합니다. 매번 번거로우실텐데.."
"아니에요. 당연한 일인걸요."
매번 그랬던 것처럼, 허나 오늘만큼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감사를 표하니 성녀가 늘 그랬던 것처럼 미소로 화답해왔다.
허나 내 목소리가 그렇듯 그녀의 미소도 평소와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평소 짓던 자연스럽기 그지없는 것들하고는 달리 어딘가 어색하다고 해야할까.
마치 누군가 그녀의 입꼬리를 잡고 억지로 끌어올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채 내 감사인사에 답을 한 그녀가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을 조심스레 침대 위에다가 내려놓고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딱봐도 방을 빠져나가려고 하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그대로 성녀를 따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당연히 방을 나가는 그녀를 배웅하기 위함이었다.
"괜찮으니 앉아계세요."
물론, 목적을 채 달성하기도 전에 성녀의 제지로 다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었지만.
"그럼, 편히 쉬고.. 저녁 때 뵐게요."
"네, 성녀님도 편히 쉬세요."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정말로?
아무래도 그런 듯 했다.
성녀가 천천히 몸을 돌리기 시작했으니까.
'아무래도 좀 부족했나 보네..'
살짝 아쉬웠지만 나가겠다는 사람을 붙잡고 구구절절 사연을 읊어대기도 좀 그랬기에 오늘은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돌아서는 성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베일과 똑같은 색을 자랑하는 법복으로 덮여있는 그녀의 등이 마침내 내 눈앞에 드러난 순간, 그녀가 문을 향해 걸음을 내딛었다.
한 걸음.
그리고 두 걸음.
딱 두 걸음만이었다.
그대로 방을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성큼성큼 걸음을 내딛던 성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멈춰선 것은.
"그..!"
저 목소리를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네..?"
급하게 내지른 탓에 평소보다 훨씬 높은 높이를 자랑하는 성녀의 목소리에 의아한 목소리를 내어 반문했다.
"흠, 아.. 음, 그게.."
어찌어찌 결심을 굳히는데 성공해서 일단 입을 열었는데 막상 입을 열고 보니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던 걸까.
성녀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어졌다.
맘 같아서는 그녀가 차분하게 말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상황상 그러긴 힘들었기에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덧붙였다.
"뭐, 하실 말씀이라도..?"
"그게 그러니까.."
하긴 난감하긴 할 것이다.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말을 하자니 그러다가 내게 협박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찌 알았냐며 질문을 받게될 수도 있었으니까.
이래저래 떳떳치 못한 성녀에게 있어 그것만큼 최악의 상황도 또 없을 터.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성녀는 쉬이 말을 잇지 못했다.
결국 그런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성녀님?"
"그.. 혹시 지내면서 불편한 건 없을까 해서요. 혹시라도 불편한 게 있다면.."
나중을 위해 여지를 남기는 것이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해주세요. 그게 뭐든 상관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