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15)화 (314/366)



〈 31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타이밍이 아주 그냥 환상적이었다.


나한테는 환상의 타이밍이고, 날 혼내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바이올렛에게는 환장의 타이밍이라고 할  있는 상황.


그렇기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성녀가 내 방을 훔쳐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타이밍은 말이 되질 않았다. 하물며 지금은 충전 시간도 아니지 않은가?

만약 이게 정말 우연이라면?


그야말로 신께서 보우하신 일이겠지.

뭐, 그럴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긴 했다.

그녀를 총애해 마지 않는 여신이 내 위기(?)를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가보라고 귓뜸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가능성을 조금 더 높게 보고 있긴 했다.

방금 성녀가 보여준 행동은 안의 상황이 어떤지 모르고는 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저번에 훔쳐봤을 때하고는 다르게 이번에는 누가봐도 내가 억지로 겁박을 당하고 있는 모양새이니만큼 황급히 날 도와주러 온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스스로가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를 알려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운 미간을  좁히고 있던 바이올렛이 아까 전부터  하체를 깔아뭉개고 있던 엉덩이를 띄워올렸다.


역시나 아무리 그녀라도 성녀의 앞에서까지 그런 짓을 저지르긴 좀 그랬나 보다.

'하긴..'


디아나나 성녀가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난 교국에서 영웅 취급 받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그런 이를 교국의 최고 수뇌부라 할  있는 성녀가 버젓이 지켜보는 가운데 희롱한다?


성녀가 그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는.. 아마 없겠지.

그리고 성녀에게는 나와 관련된 여성들을 효과적으로 제재할  있는 수단이 하나 존재했다.


성역의 출입권한과 관련된 것이었다.

 번 말한 바 있듯 지금 내가 치료를 목적으로 들어와있는 이 곳은 여신이 특별히 지정한 성역이고, 그렇기에 허가를 받지 못한 이는 애초에 발조차 들여놓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을 레이시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지금처럼 자신이 내킬 때마다 드나들 수 있는  어디까지나 나와 관련이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굉장히 특이 케이스랄까.

애초에 한 명의 성녀가 그 자리에 오르고 물러나는 동안 해당 성녀로부터 성역의 출입을 허가받는 이가 평균적으로 다섯 명이 되질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과 같은 경우는 명백히 비정상적이라 할  있겠지.

그런만큼 출입권한을 회수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줬다가 뺏는 것만큼 치사한 일도 또 없긴 하지만, 내 치료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데 뭐 어쩔텐가?

그리고 만약 그리 된다면?


다른 이들은 분명 쌍수를 들고 환영할테지.


경쟁자가 알아서 나가 떨어져준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을테니 말이다.


이리도 간단하게 도달할 수 있는 사실을 레이시아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영민하고, 한편으로는 그녀와는 다르게 교활하기도 한 머리를 지닌 바이올렛이 모를  같지는 않았다.


아니, 바이올렛이라면 필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레이시아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독점욕을 지닌 그녀가 그녀 입장에서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내 곁에 찰싹 달라붙은 년들을 내 옆에서 떨어뜨릴 수 있을만한 방법을 생각해보지 않았을 리 없으니까.


그녀들이 스스로 떨어져나가도록 만드는 건 보자마자 알아차렸을테니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는 방법들 위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성녀의 손에 쥐어진 권한이 얼마나 막강한지를 알게 되었겠지.


그러니 지금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려 하는 것 아니겠는가.

헌데 그녀는 물러나더라도 그냥 물러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침대 위에서 내려가려는 것처럼  하체를 꾹꾹 눌러대고 있던 엉덩이를 띄워올려 몸을 일으켜세운 바이올렛이 그 상태 그대로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 위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가득 베어문 그녀가 그대로 내게 입을 맞춰왔다.


"읍..!"

그야말로 저돌적이기 그지없는 입맞춤이었고, 순식간에 내 입안으로 제 혀를 집어넣은 바이올렛이  안을 빠르게 훑어댔다.


그녀의 혀가  입안을 헤집어댈 때마다 츠적쯔적하고 추잡하기 짝이 없는 소리가 우리 둘 사이로 울려퍼졌다.

그렇게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내 입안을 탐한 바이올렛이 이제는 미련따위는 없다는 것처럼 그대로 내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덕분에 바로 조금 전까지 찰싹 들러붙어 있었던 나와 그녀의 입술 사이로 끈적한 실이 길게 이어지다가 툭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남의 집에서 하려니까 눈치도 좀 보이고,  불편하단 말이지.."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 오늘 끝을 볼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안을 휘휘 둘러본 바이올렛이 이내 내쪽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를 줄인 것은 당연히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을 성녀를 의식해서겠지.


"그런 의미에서 다음에는 바깥에서 만나는 걸로 할까?"

표면적으로는  의견을 구하듯 내뱉어진 것이었지만, 거기에 내 의견 따위 필요치 않다는 건 나도,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응? 야외 좋아하잖아? 성치않은 몸을 이끌고 산책까지 나갈 정도로 말이야."


바이올렛은 말하고 있었다.


잔말말고 내가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협박아닌 협박까지 곁들여진 그녀의 발언에 내가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깨문  고개를 끄덕여보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베어문 입술에서는 왠지 모를 달콤한 맛이 났다.

귀찮게 두 번  필요 없이 자신이 전하고자 한 바를 단번에 알아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 태도가 퍽 기꺼웠던 것일까.

날 바라보는 바이올렛의 얼굴에는 어느새 만족스러움이 듬뿍 담긴 미소가 걸려있었다.


"아까도 말했던 것 같은데 입술 깨물지 말라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그녀의 엄지손가락은 내 입술까지 도달해있었다.

그렇게 꽈악하고 짓눌려있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던 바이올렛이 이만하면 되었다는  손가락을 떼어내더니 이내 그것을  입쪽으로 가져가 쫍-하는 소리를 내며 빨았다.

보란듯이 행해진 그 행동에 슬며시 표정을 찌푸리니 그녀가 큭큭 소리를 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왜? 더러워?"

그 물음에 답은 하지 않았다.


답을 바라지 않았던 건 그녀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인지 바이올렛이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넌 아무 것도 모른다고.


 모른다는 걸까.


"지금도 봐. 네가  눈에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는지 전혀 모르고 또  유혹하고 있잖아?"

내가 한 거라고는 뭔 소리냐는 듯 눈살을 찌푸린 것밖에 없는데 대체 뭐가 유혹이라는 걸까.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으려니 이 이상 가까이 붙어있으면 자제하기 힘들 것 같기라도 했는지  발자국 뒤로 물러난 바이올렛이  향해 턱짓을 해보였다.

그런 그녀의 턱이 가리킨 곳은 다름아닌 문쪽이었다.

이만하면 됐으니까 이제 방 안으로 들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몸짓에 큼큼하고 헛기침을 하고는 문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들어오셔도 됩니다."

아무래도 대기 시간이 나름 긴 편이었다보니 내심 그 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삐걱소리와 함께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성녀가 평소와는 달리 베일을  눌러쓴채로 등장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훔쳐봤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설 때 베일 사이로 얼핏 보인 앙증맞은 귀가 저렇게 새빨갛게 물들어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일단은..'


사과부터 건네는 게 좋겠지.

기다린 시간이 있으니 말이다.

불과 5분도 안 되는 시간이긴 했지만 실례는 실례 아니겠는가.


"죄송합니다. 성녀님.. 바이올렛님과 마무리지을 이야기가 있어서.."


"아, 네. 그러셨군요. 따지고보면 기별도 없이 찾아온 제 잘못이니 이안님께서는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사과를 위해 건네진  말에 그런 식으로 답을 한 그녀가 이내 바이올렛이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본 목적은 역시 그쪽이었던 모양.


그렇게 성녀가 바이올렛 쪽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베일 아래에 숨겨져있는 그녀의 눈빛이 어떨지가.

감히 신성한 성역에서 협박이라는 용서받지 못할 행위를 한 바이올렛의 행동에 분노하여 그녀를 노려보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눈빛?

'어쩌면..'

부럽다는 눈빛일지도 모르지.


가능성은 많이 낮긴 하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덕분에 흥미진진한 심정을 느끼면서 둘 사이에서 시작된 기묘하기 짝이 없는 대치를 구경했다.

아까도 말했듯 바이올렛은 기본적으로 성녀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이지만, 그게 막 성녀의 앞에서 설설 기어야 한다는 의미는 분명 아니었다.

그리고 바이올렛은 내가 그동안 만났던 여자들 중에서는 성깔로는 단언컨대 최상단에 위치해있는 여자였다.

그렇다보니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성녀의 눈빛을 그냥 흘려넘기지 않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성녀님?"


 꼬나보냐는 말을 저렇게 고상하게 바꿔서 내놓을  있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다만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


"아, 돌아가시는 건가 해서요."

그 말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기선을 잡으려 했던 바이올렛의 의도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는 걸.

그것도 모자라 그녀는 졸지에 눈칫밥 비스무리한 것까지 얻어먹게 되었다.

한  먹여서 기선을 잡아보려 했는데 생각치도 못하게 역으로 한  얻어맞은 상황.

그것도 다름아닌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보니 영 마뜩치가 않았던 것일까.


바이올렛의 눈썹 끝부분이 꿈틀하고 떨리며 요란하기 그지없는 무빙을 선보였다.

"...뭐, 슬슬 그럴 생각이긴 했어요."


그것도 잠시 바이올렛이 굉장히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오늘 날 찾아온 용건은 전부 달성한만큼 더는 미련을 가질 이유가 없다 판단한 모양.

흥미로운 점은 그 정도면 바이올렛에게서 관심을 거둘 법도 한데 성녀의 시선이 줄곧 그쪽에 못박혀있다는 점이었다.


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충전시간마다 봤던 그녀의 맨얼굴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그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을 추측해보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알게되었다.

성녀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곳은 나와 본인의 침으로 번들대고 있는 바이올렛의 입술이라는 걸.


'아.'

조금이라도 눈치있는 이가 봤다면 바로 조금 전까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눈치채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풍경이었고, 그에 나는 황급히 손을 들어올려 내 입술을 문질렀다.

키스는 둘이 했는데 한쪽의 입술만 번들거리고 있을 리 없으니까.

성녀와 기싸움 비슷한 것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도 내쪽을 힐끔거릴 여력이 남아있었던 걸까. 순간 바이올렛하고 눈이 마주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뭔가를 깨달았다는 표정을 한채 입꼬리를 슥 말아올렸다. 그러더니..

혀를 입밖으로 내밀어 입술을 슥 핥는 게 아닌가?


누가봐도 보란듯이 행해진 행동이었고, 그런만큼 효과또한 확실했다.


그것의 타겟임이 분명한 성녀를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어느새 꽈악하고 움켜쥔 손이 파르르 떨리는 광경을 볼 수가 있었으니까.

누가봐도 분노했다는   수 있는 몸짓이었고, 충분히 그럴만한 상황이기도 했다.

성녀의 입장에서는 성범죄자가 반성하는 기미를 보기는 커녕 느그 영웅 입술맛 쩔더라를 시전한 격일테니까.


평소에도 그것이 드러날 정도로 교국과 여신에 대한 애정이 어마어마한  성녀였고, 그렇기에 그녀에게 있어서 나는 본인이 힘들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치료해내야만하는 아주 고마운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더더욱 분노가 치밀테지.


그래서 그런 지 몰라도 성녀는 손등이 새하얗게 변할 정도로 그곳에 힘을 주었다.


그런 성녀의 상태를 아는 지 모르는 지 그럼 자긴 이만 가보겠다며 태연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내게 인사를 건넨 바이올렛이 때마침 도착한 사라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아니..'

폭탄만 던져놓고 자기만 홀라당 튀어버리면 나보고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걸까.

속으로 난감함을 곱씹고 있으려니 바이올렛이 사라진 방향을 지그시 노려보던 성녀가 이내 내쪽으로 시선을 던져왔다.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기색이 다분히 담겨있는 몸짓.

날 상대로 그런 것을 선보이던 것도 잠시 꼴깍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성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 괜찮으신가요?"

나에 대한 걱정이 듬뿍담긴 목소리였다.

귓가로 울려퍼진 그 목소리에 속으로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식피식 헛웃음을 흘리면서..


"..네?"

그녀를 향해 반문했다.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뜻이냐는 것처럼.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베일 아래로 얼핏 보이던 성녀의 목덜미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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