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성녀가 이상하다.
뭐가 이상하냐고 묻는다면 이런 거하고 저런 게 이상합니다라고 딱 꼬집어서 말할 수 없을 것 같긴 하지만 아무튼 이상하다.
그러니까 어떤 느낌이냐면..
'꼭 초식동물 같단 말이지..'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성격이 소심하다던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동안 봐온 것들에 따르면 성녀의 성격은 소심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남녀관계에 임하는 태도가 초식동물 같다는 거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판한 한국판 카사노바 놈의 지론에 따르면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은 누군가와 관계를 맺음에 있어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했다.
육식계와 초식계.
잡아먹는 쪽과 잡아먹히는 쪽으로 말이다.
-성격하고는 좀 다른 차원의 얘기지. 관계의 주도권과 관련된 문제니까.
그리고 내가 이 세계로 떨어지고 나서 봐왔던 모든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육식계 쪽이었다. 다들 넘쳐흐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남자를 제 밑에 깔아뭉개고 싶어한달까. 좀 순화해서 말하자면 다들 자기가 관계의 주도권을 갖고 싶어했다.
지금은 많이 얌전해진 레이시아도 최근 하는 행동만 보면 초식동물처럼 보이지만 그건 내가 그녀를 이 손으로 직접 길들였기 때문이고, 원래는 굉장히 흉포한 성정을 자랑하지 않았던가.
'이 세계에 초식계 여자는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지..'
그 확신이 최근 들어서 흔들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달라진 성녀의 행동 때문이었다.
내가 그녀를 상대로 모종의 확신을 갖게 된 후로 그녀는 날 볼 때마다 묘하게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성력을 주입할 때 무슨 마약중독자마냥 손을 달달달달 떨어대는 건 물론, 치료가 끝난 후에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는 걸 손을 뻗어서 도와줬더니 '히익..!'하고 기겁하는 소리를 내며 기껏 뻗은 내 손을 쳐내며 그대로 도망쳐버리더라.
뭐, 그 뒤에 정신을 차리고 내게 사과를 건네긴 했지만.
남녀의 정조관념이 뒤바뀐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난 후로는 처음 접하는 반응이었고, 그렇기에 나는 그녀에게 '신선함'을 느꼈다.
그동안은 다들 내가 손을 뻗으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은근히 기뻐하거나 날 놀리듯 음흉한 표정을 해보이기 바빴으니까.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성녀의 행동이 눈에 밟혔다.
'친해지긴 해야되는데..'
무슨 맹수의 기척이라도 감지한 초식동물마냥 이쪽을 향해 경계심을 잔뜩 내비치니 뭘 하고 싶어도 섣불리 시도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이 병실로 찾아온 건 그런 식의 대치가 이어지고 있던 와중이었다.
"오랜만이네?"
마치 제 방에 드나드는 것처럼 들어오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덕분에 덩달아 침대 위로 올라오게된 그녀의 꼬리가 내 다리 위에 얹어진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느낌이 굉장히 묘했다.
마치 가느다란 붓같은 걸로 애무당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잘 지냈어?"
멈추고자 하면 충분히 멈출 수 있을텐데 아랑곳하지 않고 이쪽을 향해 싱긋 웃는 걸 보면 역시 의도적인 행동이었던 모양이다.
"그.. 간지럽습니다만.."
"그래? 그럼 이건?"
얇고 펑퍼짐한 환자용 옷으로 덮인 내 다리를 눈 내린 앞마당 쓸듯 쓸어대던 바이올렛의 꼬리가 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농밀해졌달까.
"으.."
꼬리 끝부분이 허벅지를 간질이는 그러면서 올라오는 근질근질한 느낌 때문에 앓는 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안 그래도 어제 레이시아가 스케쥴 때문에 찾아오질 못해서 하루치가 쌓여있는 상황인데 노골적으로 자극을 해대니 물건이 슬금슬금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 모습을 대놓고 보여주긴 그래서 조심스레 담요를 끌어와 하체 위에다가 덮었다. 겸사겸사 그곳을 훑어대던 꼬리도 슬쩍 손등을 이용해 밀어냈고.
그런 내 행동의 어디가 그렇게 웃겼던 걸까.
내 행동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바이올렛이 이내 피식하고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뭔가 같잖아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그.. 바이올라 님은.."
동생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바이올렛은 병문안을 올 때마다 늘 바이올라와 함께 찾아오곤 했다.
헌데 어째 오늘은 바이올라의 모습이 보이질 않아서 그에 대해 물었더니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 묘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던 바이올렛의 눈썹이 꿈틀대며 제법 격한 반응을 내보였다.
"수련장에 틀어박혀서 수련 중."
폐관수련이라도 시작한 걸까.
뉘앙스만 들으면 대충 그런 느낌이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딱 그 순간이었다.
"담요를 덮을거면 제대로 덮어야지."
그리 말하며 바이올렛이 날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리고는 내 하체 위에 애매하게 걸쳐있던 것을 잡아 펼치기 시작했다.
전보다 한결 가까워진 거리.
그에 나도 모르게 꼴깍하고 침을 삼키니 바이올렛이 다시 한 번 싱긋하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본판이 워낙 좋다보니 분홍빛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위를 향해 휘어지는 광경은 마치 한 폭의 명화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그 아름다움을 온전히 만끽하지 못했던 건.. 호선을 그리고 있는 입과는 달리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아서겠지.
"내 안부는 안 궁금한가봐?"
고작 그 말을 하려고 이리도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한 걸까.
"그.. 잘 지내셨나요?"
이제와서 그 말을 내뱉어봐야 바이올렛에게는 엎드려 절받는 꼴밖에는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음에도 그녀의 안부를 물었던 건 안 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뭐라도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리 물었던 것인데..
"전혀?"
예의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표정과 함께 예상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대답이 분홍빛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보통 방금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되면 의례적으로라도 잘 지냈다고 답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헌데 여기서 정반대의 대답을 내놓을 줄이야.
덕분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침묵이 나와 그녀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뜨린 건..
"왜 잘 못 지냈는지는 안 궁금하고?"
다름아닌 바이올렛이었다.
담요로 덮인 내 하체를 손바닥을 이용해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그녀가 날 향해 물었다.
이렇게까지 할 정도로 이야기가 하고 싶으면 그냥 말하면 될텐데 굳이 이러는 이유가 뭘까.
살짝이지만 떨떠름한 심정을 느끼면서 그녀가 요구한 것을 이행하기 위해 말문을 열어젖혔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혹시 동맹하고 관련해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이런 식으로 내게 응석 비스무리한 걸 부리면서 풀려는 것이고?
부디 그런 거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동맹에 문제가 생긴다면 내가 리파하고 마주치게 될 가능성또한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나와의 재회를 오매불망 기다려왔을지도 모르는 리파한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일단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해야하지 않겠는가.
야만족에게 포로로 잡혀서 고생이라는 고생은 다한 척 온갖 쌩쇼를 다해가며 동정심을 박박 긁어모아 이용했는데 이제와서 실은 그게 전부 연출이었음이 밝혀진다?
농담 아니고 프로레슬링보다 빠른 속도로 망할 자신이 있었다.
단순히 망하기만 하면 다행이지 그게 다 거짓이었음을 알게된 이들이 진한 배신감을 느끼고 내게 복수하겠다며 나서기라도 하는 날에는..
'어우..'
잠깐 상상해보기만 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몸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다들 칼 하나씩 손에 쥐고 날 오체분시하려 하지 않을까.
마침 피해자도 레이시아, 디아나, 앨리스, 카트린느까지 해서 네 명이니 한 명당 팔다리 하나씩 담당하면 되겠지.
거기에 진이 끼어든다고 치면 이제 머리까지 똑 따여서 몸통만 남을 것이고.
'그것만은 안 된다..'
이제와서 죽는 게 무섭다거나 그래서 그런 건 분명 아니었다.
그냥 싫었다.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건 초회차 때 경험했던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뭣보다.. 구르라고 던져놓은 놈이 혼인빙자사기 비스무리한 걸 치다가 치정극에 휘말려 죽음을 맞이한다?
내가 그 여자였다면 기가 차서라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나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려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대가 상대다보니 자그마한 가능성이라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대충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올 바이올렛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으니 목이 뻐근하기라도 한 건지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꺾어댔다.
"최근들어서 잠을 제대로 못 잤거든."
"일이 많나 보네요."
하긴 그동안 고만고만한 나라들끼리 모여서 연합하는 경우는 있었어도 이런 식으로 덩치 큰 놈들끼리 단체로 뭉쳐서 동맹을 형성하는 건 역사상 처음있는 일이라 했으니까.
조율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텐데 일이 많지 않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그렇게 보면 그 많은 일들을 처리하면서 동시에 내게 따먹히러 올 짬을 만드는 레이시아가 참 대단하긴 했다.
나와 해피타임을 가지고야 말겠다는 욕망이 그녀를 일에 미친듯이 몰두하게 만들기라도 한 걸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실은 그렇지가 않다는 걸 알게되었다.
이어진 바이올렛의 발언이었다.
"아니, 딱히 그렇진 않은데?"
"네? 그렇지만.."
"처음에야 많긴 했는데 지금은 뭐 자잘한 걸 빼면 사실상 소강상태지."
"아, 아하.."
"왕녀님이 능력이 참 좋으시더라고. 그 덕좀 봤지. 뭐."
지금 이 순간 등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식은땀들은 대체 뭣 때문에 흘러나온 것일까.
바이올렛의 태도가 특별히 위협적인 것도 아니었다.
입은 분명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표정이 아주 살짝 오싹하긴 했지만 식은땀이 나올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대체 왜, 왜 나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몬가.. 몬가가..'
내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 했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노라고.
이 이상 저 주제에 관심을 보여선 안 된다고.
그런 속삭임이 몇 번이고 귓가로 울려퍼졌지만 그 말을 따를 수가 없었던 건 상황이 그걸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왜.. 혹시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그 질문을 입에 담은 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덜컥하고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엄습해왔지만 눈을 돌려 외면했다. 어쩌면 나 혼자서 지레짐작하고서 설레발을 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신경 쓰이는 일이라.. 응, 그러고 보니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네."
스윽-
어느새 내 하체를 점령한 담요 위로 올라온 바이올렛의 손이 조심스레 내 허벅지 위를 노닐었다.
그러면서 올라오는 묘한 감촉을 느끼면서 침묵을 지켰다.
바이올렛의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본능이라는 놈이 다시 한 번 경고를 전해왔으니까.
그 이상은 위험하니 더 파고들지 말라고 말이다.
허나 바이올렛은 그런 내 후퇴를 용납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무슨 일인지 안 물어보네?"
피식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은 그녀가 날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볼 때마다 보름달을 생각나게 만드는 그녀의 호박빛 눈동자는 어느새 야생 늑대의 그것마냥 흉흉하기 그지없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런 눈빛을 한채 그녀가 다시금 내 허벅지를 쓰다듬었다. 살살 어루만지는 듯한 느낌이었던 전과는 달리 이번의 것은 살짝 거친 느낌을 풍겼다.
"내가 말이야.."
읊조리는 투로 내뱉어진 목소리.
거기에 대고 귀를 기울였다.
"당분간은 아무 짓도 안 하고 내버려두려고 했어."
스윽-
"왜 그랬는지 알아? 아프다니까.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프다는데 혹시라도 내 욕심 때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그 말을 들은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녀가 최근 나와 레이시아 사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속으로 그리 되뇌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건 그녀가 타고난 형질이었다.
인간보다 몇 백배는 뛰어난 코, 그것을 이용해 나나 레이시아에게서 흔적을 찾아낸 거라면?
'하지만..'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할까?
그 부분이 의문이었다.
바이올렛이 뭐 나와 레이시아가 그 짓을 하는 와중에 들이닥친 것도 아니고, 레이시아와 마지막으로 그 일을 한 게 약 이틀 전의 일이니 냄새가 몸에 남아있을 리 없었다.
몸에 힘이 없다고 안 씻는 것도 아니니까.
그렇다면 혹시 방에?
방 어딘가에 레이시아가 관계 중에 흘린 것의 냄새가 남아있기라도 한 걸까?
그걸 맡고서 저러는 것이고?
딱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말했지."
그 말과 함께 바이올렛이 얼굴을 들이밀어왔다.
"표식을 새긴 사람끼리는 서로 감각을 공유한다고."
아.
"아주 그냥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대더라?"
기분 좋았어?
그 물음과 함께 바이올렛의 눈꼬리가 초승달마냥 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