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성녀 시점****
끼이익- 쿵-!
문 닫히는 소리가 귓가로 울려퍼졌다.
더는 뒤에서부터 날아와 꽂히는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그 소리에 최선을 다해 억눌러놓았던 것이 그 순간 폭발했다.
"으아으.."
얼굴이 갓 쪄낸 빵처럼 뜨끈뜨끈한 걸 느끼면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맘 같아서는 이대로 소리라도 고래고래 지르고 싶었다.
그러지 않았던 건 이곳이 여신께서 지정한 성역이라는 점과 문 너머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한채 앉아있을 사내의 귀가 신경쓰였기 때문이었다.
해서 애꿏은 발만 동동 굴러대고 있으니 핀잔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으이구.. 쯧쯧쯧.. 여자가 그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그 말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순간, 어이라는 것이 손을 좌우로 흔들며 작별의 인사를 건네왔다.
성녀로 발탁되어 그 분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고 나서 처음으로 그 분의 말에 토를 달았던 건 사실 그 탓이 컸다.
'하, 하지만.. 어, 어찌 그런 말을..'
-왜? 하고자 하면 못 할 것도 없지.
'그, 그렇지만 그건 서, 서, 성희롱이지 않습니까..!'
그랬다.
이안이라는 사내의 물건이 헐렁하기 그지없는 바지 위로 모습을 드러낸 순간, 그리하여 그가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여신께서는 한 가지 지시를 내리셨다.
-쌓여있을 때가 기회거늘..
그를 상대로 대충 쌓인 걸 해결해줄 수 있다고 어필해 보라는 식의 지시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걸 이행하지 못했고.
여신께서 직접 지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따르지 않은 상황.
평소의 자신이었다면 그야말로 저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불경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남자를 상대로 그런 식의 발언을 하라니, 만에 하나 그로인해 이안이라는 사내가 불쾌함을 느끼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인가?
-아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그럴 리가 없대도.
여신께서 명심하라는 듯 그리 속삭이시긴 했지만..
-아니면 혹시 내 말을 의심하는 게냐?
살짝 노한 듯한 음성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순간, 즉시 그 자리에 부복했다.
남들이 봤다면 의아하게 쳐다봤겠지만, 이곳은 허락한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성역 아닌가.
그렇기에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유일하게 신경써야 하는 상대는 지금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방 안에 얌전하게 앉아있을테니까.
'죄, 죄송합니다.'
구차한 변명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실을 말했다. 솔직히 그 분의 말씀을 의심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농이니라. 그러니 얼른 일어나도록.
그에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니 그 분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네게 미안하구나. 내 욕심 때문에 네게 힘든 일을 강요하는 것만 같아서..
'아닙니다. 당신께 봉사하는 것이 제 기쁨인걸요.'
-지금과 같은 모습을 아까 그 남자의 앞에서도 보일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텐데..
할 말이 없었다.
맘 같아서는 자신도 그러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가 없었다. 이안이라는 사내의 앞에 서기만 하면 그와 몸을 섞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으니까.
뿐만아니라..
-하필이면 네 취향에 맞는 외모를 하고 있어서는..
그 점도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이 비루한 몸과 마음을 오롯이 여신께 바치기 위해 그동안 이성과는 담을 쌓고 살아오기는 했지만, 자신도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했다.
때로는 겉잡을 수 없이 분노하기도 하고, 욕망에 휩쓸리기도 하는 그런 인간 말이다.
그런만큼 이 몸 안에도 엄연히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리고 카트린느라는 여성이 제조해낸 약을 들이키고 원래 모습보다 한결 작아진 이안의 모습은 아직 성녀로 발탁되지 않았던 시절에 마음 속에 품은 적 있는 이상형의 모습과 흡사한 구석이 많았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은근히 닮은 구석이 많다고 해야할까.
그 영향인지 몰라도 그의 앞에만 서면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쿵쾅하고 뛰어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싶어도 그러기가 힘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혹스러운데 그런 식으로 성희롱 비슷한 발언을 한다?
가능할 리 없었다.
외부 활동을 할 때처럼 얼굴 위에 베일을 푹 눌러쓰고 있는 상태였다면 거기에 기대서 어찌어찌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겠지만 서로 얼굴을 튼 이후로 이안의 앞에서 베일을 뒤집어 쓰는 건 금지당한지 오래였다.
"히유.."
여신께서 내리신 사명을 생각하면 그를 어떻게든 꼬셔서 그의 정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래야할 거다.
한 번으로 끝나면 참으로 다행이겠지만 만반을 준비를 하고 서도 임신에 실패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고려하면 바라는대로 될 가능성은 낮을테니까.
가능할까?
여신께 그 사명을 받았을 때는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자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린지 오래였다.
오히려 막막하기만 했다.
그만큼 답이 안보인다고 해야할까.
-왜 한숨을 쉬는 게냐.
'제게 주어진 사명의 무거움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거 그냥 들이대면 된대도.
이미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냐는 투로 울려퍼진 그 분의 목소리에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들을 때마다 대체 무슨 근거로 저리 말씀하시는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내가 친절하게 보여주지 않았더냐. 이안이라는 사내는 네가 아는 그 '남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라는 걸.
그야.. 보기는 했다.
여신께서 꼭 봐야할 게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눈을 감아보라고 하시기에 눈을 꼬옥하고 감았더니 그 이안이라는 사내과 레이시아 양과 정분을 나누는 모습이 꼬옥하고 감고 있던 눈꺼풀 위로 펼쳐졌으니까. 시커먼 공간 위로 그려진 그 광경이 어찌나 선명한지 두 눈으로 직접 훔쳐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당혹스럽기까지 했었지.
-아무래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구나.
"...."
-다 수행이 부족해서 그런 게지. 암, 그렇고 말고.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것 때문에 수행이 부족하다는 말을 듣게 되니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억울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따지고 보면 그 남자는 이물질이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네가 그 남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거라고 억울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듯 울려퍼진 목소리는 솔직히 그렇게까지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것을 대신해 머릿속에 눌러붙은 건 의문이었다.
이물질이라니.
무슨 의도로 그리 말씀하신 건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 이물질이라고 하심은..'
해서 그것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어쩌면 여신께서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는 상황.
그럼에도 질문을 던진 것은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걸 괜히 혼자서 지레짐작 했다가 그로인해 일이 이상한 쪽으로 꼬이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녀로 임명된 날 여신께서도 잘 모르는데 괜히 혼자서 삽질하다가 사고 치지 말고 모르는 게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재깍재깍 물어보라고 말씀하기도 하셨었고.
그래서 질문을 던졌던 것이었는데..
-미안하구나. 그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없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딱딱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그 순간 겁이 덜컥 났다.
설마 화나신 걸까.
생각해보면 충분히 그럴 만 하긴 했다.
지시한 것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놓고서는 따박따박 말대꾸는 물론, 주제도 모르고 질문까지 던져대는 꼴이라니.
-너 때문에 그런 게 아니란다.
'그, 그럼..'
-음.. 그러니까..
그게 또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는 건 이어진 대화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머릿속으로 재차 울려퍼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그건 화가 난 느낌이라기 보다는 꺼림칙한 무언가를 떠올렸을 때의 반응에 가까웠으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아는 '남자'들을 기준으로 그 이안이라는 사내를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게다.
그러면 그를 어떤 식으로 봐야하는 걸까.
-그러니까 그 이안이라는 사내는 말이다.. 음.. 그래! 폭군이다! 폭군!
'폭군이요?'
솔직히 의아함부터 앞섰다.
그만큼 둘은 서로 어울리질 않았으니까.
-그래, 폭군. 정확히는 남녀관계에 있어서 폭군이라 해야겠지. 너도 보지 않았더냐? 그 사내가 레이시아라는 여자를 제 마음대로 농락하는 모습을 말이다.
그야.. 보긴 했다.
당시에는 그 생생함과 음탕함이 너무나도 짙어서 당혹스러움 외에 다른 감상은 받지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확실히 좀 이상하긴 했다.
남녀간의 관계는 본디 여성의 주도 하에서 이루어지는 게 기본이다.
적어도 자신이 알고 있고, 또 교육받은 바로는 그랬다.
헌데 일전에 눈꺼풀 위로 전해진 바 있는 광경을 떠올려보면 거기서 관계를 주도하고 있는 건 분명 이안이었다.
어찌보면 오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입가에 베어문 채 의자에 걸터 앉아있는 이안을 상대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은 배운 것과는 완전히 달랐고 말이다.
자신이 기억하는 레이시아의 모습이 아름답고, 오만하며 가진 능력만큼이나 자신감도, 자부심도 넘치는 여성이라면 이안을 앞에 두고 있는 그녀는 마치 노예와도 같았다.
여성이라면 당연히 굴욕을 느껴야 정상인 상황.
헌데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의 명령에 따라 정신없이 그의 물건에 입을 맞추던 그녀의 모습에서 그러한 감정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전부 연기였을 수도 있지만,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만큼 농도 짙은 기쁨이 그녀의 얼굴 위에 맴돌고 있었으니까. 남들에게는 굴욕적이기 짝이 없는 행위더라도 그런 식으로라도 그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기쁨을 느끼는 사람처럼 말이다.
'아.'
그 광경까지 떠올리고 나니 비로소 좀 알 것도 같았다.
확실히 여신께서 말씀한 대로였다.
이안이라는 사내는 폭군이었다.
다른 남성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여성을 껄끄럽게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제 손 안에 놓고 마음대로 주무르는 걸 즐기는 폭군 말이다.
그리고 레이시아 양이 보여주었던 그 모습은.. 폭군의 손길에 길들여진 결과겠지.
생각이 딱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이었다.
아까 전부터 머릿속을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것이 꿈틀꿈틀대며 기묘한 움직임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 기묘하고 기괴한 꿈틀거림이 마침내 멎은 순간..
이안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그의 물건에 조심스레 키스를 하고 있는 건 레이시아가 아닌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상상 속으로 투영된 스스로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다른 무엇보다도 당혹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간신히 진정되어가던 얼굴로 언제 그랬냐는 듯 피가 확 쏠리는 게 느껴졌다.
얼굴이 뜨거웠다.
동시에 심장이 쿵쿵하고 거칠게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 무, 무슨.. 상스러운..'
자신은 여신께서 손수 발탁하신 성녀다.
그렇기에 이 몸에 난 자그마한 털 하나까지 모조리 그 분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입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분의 옥음을 지상에 전하기 위한 창구.
그런 중요한 사명을 지니고 있는 곳을 이용해 남자의 물건에 입을 맞추고 있는 꼴이라니.
그 꼴을 차마 더 지켜볼 수가 없었다.
해서 머릿속에 눌러앉은 그걸 쫓아내기 위해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그러면 그럴 수록 한 번 자리를 잡은 망상은 자신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보여주겠노라고 선언이라도 하는 것처럼 머릿속을 떠날 줄 몰랐다.
'으으으..'
분명 내 머릿속인데 왜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 걸까.
당황스러운 마음에 일단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그가 있는 방이 바로 등 뒤에 자리하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광경을 상상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얼마 회복되지도 않은 신성력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그 이안이라는 사내의 몸속에다가 그것을 퍼부어댄 탓일까.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으으.. 내가 어째서 이런..'
혹시 문 너머에 있을 그에게 닿을 세랴 속으로만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벽을 짚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힘겹게 거리를 벌렸건만 그럼에도 상상은 머릿속을 떠날 줄을 몰랐다.
오히려 아까보다 더 선명해진 것 같기도 했다.
상상 속의 자신은 여전히 그의 물건 끝에다가 조심스레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 광경이 하도 선명해서 쪼옥-하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실제로 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그 분을 대하는 것처럼 그의 물건에 대고 입을 맞추던 또다른 자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날아와 꽂혔다.
그렇게 고정된 시선이 꼭..
'곧 너도 이렇게 될 거야.'
라고 예언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쿵쿵-
하고 심장이 뛰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