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02)화 (301/366)



〈 30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고개를 끄덕인 것과는 별개로 레이시아는  손에 들린 로브를 향해 섣불리 손을 뻗지 못했다.

그야 그렇겠지.

여기서 이걸 받아드는 순간 정말로 돌이킬  없는 길을 걷게 되는 셈이니까.

쉽게 말해 지금 그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수 있었다.

그것도 그냥 갈림길 수준이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이 걸려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고민이 되고,  망설여질 수밖에 없겠지.


뿐만아니라 내 눈치가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있을 것이다.


내가 다 이해하고 받아주겠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걸리는 게 아예 없지는 않을테니까.

여기서 내가 내민 로브를 받아들게 되면 스스로가 정말 답도 없는 변태년이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는 셈이니 말이다.

그또한 마음에 걸리겠지.

그런 그녀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얼마든지 기다릴  있었다.


누구와는 달리 내게는 확신이랄게 있었으니까.


지금은 이렇게 망설이더라도 결국에는  손에 들린 로브를 그녀가 회수해갈 거라는 확신이 말이다.


그렇기에 여유로웠는데..


'좀.. 춥긴 하네.'

여유롭기 그지없는 마음과는 달리 몸은 그렇지가 못했다.

쌩쌩부는 바람이 몸을 으슬으슬 떨리게 만들었으니까.

덕분에 다시 한 번 실감할  있었다.

원래 몸과 비교하면 이 몸은 정말 찌그레기 수준도 못된다는 것을.


원래 몸이  무림소설 속에 등장하는 한서불침같은 수준이었던  분명 아니지만 고작  정도로 추위를 타지는 않았으니까.

헌데 지금은 어떤가?

레이시아에게 진심을 보여주겠답시고 든든하게 하체를 감싸주고 있던 것을 벗어던진 탓인지는 몰라도 하체서부터 올라오는 오한이 몸 전체를 떨리게 만들었다.


그걸 티내지 않는  꽤나 고역이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윗이빨하고 아랫이빨이 딱딱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히려 해서 턱에도 힘을 바짝 줘야했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아까 전부터 잇몸이 미친듯이 욱신거렸다.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티를 내지 않아보려 했는데 역시 완전히 숨기는 건 무리였던 모양이다.

레이시아가 저렇게  모습을 확인하고는 몸을 움찔대는  보면.

뭐,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더는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상태가 안 좋은 나를  이상 추위에 떨게 만들 수는 없다 판단한 것일까. 언제 망설였냐는  레이시아가  손에 들린 로브를 회수해갔다.


얼떨결에 가져가긴 했는데 영영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오랜 파트너와의 재회가 상당히 복잡미묘했나 보다.

레이시아가 뭐라 형용키 어려운 얼굴을 한채 이제는  손에 들린 그녀의 로브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때 그녀의 표정은 뭐랄까 민망해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어찌보면 이후의 일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한동안 내게서 낚아채간 것을 내려다보던 레이시아가 이내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향해 기대감어린 시선을 발사했다.


당연히 그걸 착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말했던 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연기할 필요조차 없었다.


진짜로 보고 싶었으니까.


해서 내 진심을 눈빛 속에 그대로 녹여냈더니 그게 뜨겁게 느껴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레이시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가 자신의 치태를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기라도  걸까. 자세히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 했다.


새어나오려고 하는 뭔가를 꾹 참듯 일자로 맞물린 그녀의 연분홍빛 입술이 아까 전부터 파르르 떨리며 묘한 떨림을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기대감.


그 떨림 속에는 분명 그것이 담겨있었다.


"후우우.."

결국 벅차오르는 무언가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작게 벌어진 연분홍빛 입술에서 허연 김이 새어나와 허공에 흩뿌려졌다.

왠지 모르게 달콤할 냄새를 풍길 것 같은 그것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잠깐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겠느냐.."

마침내 결심이 선 모양인지 레이시아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날 향해 물어왔다.

차마 여기서 갈아입을 수는 없었던 모양.

'하긴..'

달빛 외에는 조명이 거의 없다 해도 이렇게  트인 곳에서 그런 짓을 하기에는 좀 그럴테니까.


길이 사방팔방으로 뻗어있다보니 언제 어디서 사람이 튀어나올지 모를 뿐더러 내 시선또한 신경쓰일테니까.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했다.

그랬더니-


꾸우욱-

내가 건넨 로브를 움켜쥐고 있던 레이시아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얼마나 힘을 준 건지 추위때문에 빨갛게 달아올라있던 것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그렇게 로브가 구겨지든 말든 손등을 통해  심정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레이시아가 마침내 몸을 돌렸다.

그 방향이 후미져보이는 골목 쪽을 향하고 있는  보면 척봐도 인적이 거의 없어 보이는 그곳으로 들어가 후딱 갈아입고 나올 생각인 모양.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레이시아의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허나 그 움직임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채 몇 걸음 걷기 전에 그녀가 제자리에 우뚝하고 멈춰서버렸으니까.


뒤늦게 생각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만한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고 있으려니-


"이, 이거.."


어느새 내 앞으로 돌아온 레이시아가  향해 뭔가를 내밀었다.

그렇게 내밀어진 것은 내게도  익숙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일전에 그녀에게 선물해준 것이었으니까.

그녀와 단둘이 빠져나가 구매했던 꽃팔찌 말이다.

그게 벌써 몇 개월 전의 일인데 지금 내 앞으로 들이밀어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팔찌를 장식하고 있는 꽃들이 살짝 시들시들해졌다는 점을 빼면 거의 그대로랄까.


덕분에 보자마자  수 있었다.

레이시아가 그 팔찌에 뭔가 모종의 조치를 취했다는 걸.

그 목적은 아마도.. 팔찌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함이겠지.

뭐, 그 부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하필 지금 이걸 날 향해 내미는 저의가 뭘까.


설마 어필이라도 하고 싶었나?

내가 준 선물을 이렇게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고?


그게 아니라는  곧 알 수 있었다.

더듬더듬 내뱉어진 레이시아의 설명 덕분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으면 따뜻해질 거다."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떠는 게  눈에 밟혔던 모양이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추운 건 사실이었기에 그런 그녀의 호의를 굳이 사양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기쁘기도 했다.

간직할 거라는 생각정도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소중하게 여겨줄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심장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박자로 뛰며 거품마냥 몽글몽글거리는 것이 가슴 속으로 차오르는 듯한 느낌.


지금 난 어떤 표정으로 레이시아를 바라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그걸 확인해버리면 이 낯설지만 결코 불쾌하지는 않은 감정이 팍 식어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감사해요."

날 향해 내밀어진 것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살짝 시든 꽃의 감촉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그래서일까. 자꾸만 입꼬리가 근질거렸다.


그 근질거리는 느낌이 너무나도 강해서 지금 머릿속을 맴도는 말을 내뱉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기쁘네요. 굉장히.."


혹시라도 팔찌에 붙어있는 꽃송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조심스레 그것을 손목에 찼다.

어렵지는 않았다.

몸이 줄어든 덕분에 내 팔은 레이시아의 것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변한 상태였으니까.


그렇게 팔에 찬 것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쓰다듬고 있으려니 훈훈한 기운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귓가로 들이치는 거센 바람 소리는 여전한데 갑자기 공기만 달라지니 꼭 마치 따로 격리된 공간 속에 서있는 것만 같았다.


"따뜻하네요.."

자꾸만 피어오르는 몽글몽글한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던 것일까.

"그, 그럼 다녀오마.."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는 몰라도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내게서 숨기고 싶었는지 뒤로 젖히고 있던 로브의 후드 부분을 얼굴 위로 푹 눌러쓴 레이시아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레이시아는 후미진 골목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고, 내 옆에 남은 건 기다림 뿐이었다.

'와.. 미치겠네..'


주관적으로도 객관적으로도 레이시아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동안 봐왔던 히로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봐도 그녀는 독보적이었다.

히로인들의 모습을 보고 있다보면 자연스럽게 군계일학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하는데 레이시아에게는 학이었던 이들을 닭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이 있었다.

애초에 여자들을 껄끄럽게 여기는 이 세계의 남성들조차도 그녀의 관심을 바라마지 않을 정도니  다했지 뭐.


심지어 신분 마저도 완벽했다.

허울뿐인 공주가 아니라 그녀는 유력한 왕위계승권자가 아니던가.

지금도 왕국의 내정을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여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라 할 수 있었고.

 정도로 고귀한 이가 지금 길바닥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것이었다. 오직 내게 보여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안 꼴리고 배기겠는가.

'로브가 펑퍼짐해서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녀의 치태를 상상하며 물건을 발딱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겠지.


좀 가라앉혀 보려고 해도 아무 소용 없었다.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해봐도 자꾸만 레이시아가 홀딱 벗고 있는 모습이 머릿속으로 떠올랐으니까.


그녀가 나무에 몸을 기댄  격렬하게 스스로의 보지를 쑤셔대고 있는 풍경이 말이다.

지금 이렇게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도 꼭 건조해서만 그런  아니겠지.


바로 조금 전에 적셔놨는데 어느새 바짝 말라버린 입술을 혀를 이용해 수습하며 레이시아가 빌려준 팔찌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아까 느꼈던  몽글몽글하고 풋풋하면서도 낯간지러운 느낌을 되살려서라도 좀 진정해보기 위함이었는데-

"뭐야~? 누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시나? 여자친구~?"

방해가 들어왔다.

자기 과시라도 하는 것처럼 내뱉어진 껄렁껄렁한 목소리.

그에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욕망에 젖은 얼굴을 한채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20대 중반쯤 되어보이는 나이의 여성이었다.


정확히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와 꽂히는 그녀의 시선 덕분에 한 발 늦게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갖가지 상상들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거세게 들이치는 바람 때문에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젖혀져버렸다는 것을.


"으응~? 사람이 말을 걸었으면 대답을 해야할  아냐? 쒸불 놈이.."

"...."

"얼굴 좀 반반하다고 이렇게 사람 무시하고 그래도 되는 거냐고? 으이? 내가 우스워? 어?! 우습냐고!"

여성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보자마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코하고 볼이 빨갛게 물들어 있을 뿐더러 손에는 술병을 들고 있었으니까.


보아하니 어디 술집같은데서 난동을 부리다가 쫓겨나기라도 한 모양인데..

'음..'

저걸 어쩐다.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그대로 픽 쓰러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태위태한 몸짓을 선보이는 여성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허스키를 발견한 포메라니안마냥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표정까지 일그러뜨리며 위협을 했음에도 내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니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순간 울컥하기라도 한 것일까.

"너같이 얼굴만 믿고 사람 무시하고 그러는 걸레 놈들한테는-"


여성이 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휘둘렀다.

허나 그것 때문에 몸을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턱-


나름 힘차게 휘둘러진 그것이 내 몸에 닿기도 전에 내 등뒤에서부터 튀어나온 희고 고운 손 하나가 그것을 잡아챘으니까.


스륵-

팔뚝 중간 쯔음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로브 자락이 살결을 따라 흘러내리며 나는 소리가 유난히도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렇게 재등장한 레이시아는 척 봐도 엄청 질척댈 것 같이 생겨먹은 년을 어렵지 않게 쫓아냈다.

"힉..!"


입을 열어 무어라고 협박을 한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저런 반응인지는 모르겠다만,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간 취객이 그대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허나 거기에 시선을  겨를 따윈 없었다.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것이 지금  등뒤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천천히, 지켜보는 입장에서 속이 탈 정도로 느릿하게 그녀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눈으로 들어온  아까처럼 로브로 몸을 덮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이었다.


다만 아까와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로브 사이즈가 줄어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아래에 펼쳐져있을 풍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야하네.'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겨왔으니까.

로브 위로 드러난, 오직 여성의 몸만이 보여줄 수 있는 굴곡을 느긋하게 눈으로 훑으며 감상했다.


꼴깍하고 내 것인지 레이시아의 것인지  수 없는 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만끽하면서-


"그럼.. 아래도 보여주실래요?"


그녀를 향해 기대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거기에 반응하기라도 한 것처럼 꼴깍하고 침 삼키는 소리와 함께 레이시아의 손이 로브 위를 훑으며 밑으로 내려갔고..


스륵-


거칠거칠한 천이 살결을 스치며 나는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로브 자락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은 가느다랗고 새하얀 발목이었다.


왠지 작아진 이 손으로도 한 손에 움켜쥘 수 있을 것 같은 그것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으니 고작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말라는 것처럼 종아리가, 무릎이, 허벅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달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보다 훨씬 더 하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광경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삼켜도 삼켜도 순식간에 입 안 가득 차오르는 침을 다시  번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손으로 찰싹 소리가 나게 때려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던 허벅지의 향연이 마침내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퍼레이드 끝을 장식한 것은-


"너, 너무 빤히 보지 말거라.."

그녀의 허벅지만큼이나 새하얀 팬티였다.


손바닥으로 한  꾹 눌러보고 싶을 정도로 도톰하게 부풀어있는 팬티의 가운데 부분은..


젖어있었다.


질척질척하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