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01)화 (300/366)



〈 30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놀랐구만.'

무슨 귀신이라도 마주한 것마냥 눈을 부릅 뜬채 바닥에 떨어진 걸 응시하고 있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자꾸만 새어나오려 하는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너, 너무 그렇게 빤히 보지는.. 말아주세요."

수치심과 민망함을 연기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아무리 나라도 얼굴색까지는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겨울 아니던가?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추운 편은 아니었지만 제법 강한 편인 바람 속에 오랫동안  있었던 탓에 이미 얼굴은 발그레하니 달아오른지 오래였다.

그렇기에 난 민망해하는 모습과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만 연기하면 됐다.


그것들이 자연스레 얼굴색과 어우러지면서 내 모습을 수치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겠지.


어떻게 확신하냐고?


방금 레이시아가 보여준 반응이 그 증거였다.


저 얼굴 좀 봐라. 거울이 없어서 지금 내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나보다  빨갰으면 빨갰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레이시아의 얼굴은 만취한 이의 얼굴을 방불케했다.

그 상태로 움찔하고 크게 몸을 한 번 떤 그녀가 아까부터 바닥쪽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황급히 들어올렸다.

"미, 미안하다.."


날 향한 사과는 덤이었다.

재미있는 건 어떻게든 바닥을 쳐다보지 않겠다는 듯 위를 향해 치켜떠진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자꾸만 밑을 향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안 그래도 빨간 그녀의 얼굴이 더욱 빨갛게 변하며 로브에 덮인 그녀의 몸이 흠칫흠칫하고 묘한 떨림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직감했다.


그녀가  로브 아래의 광경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것처럼 다시  번 몸을 움츠려보였다.


그랬더니 언제 위를 향해 올라가 있었냐는 듯 스르륵 밑으로 내려오던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다시금 위를 향했다.

아까보다 한결 작아진 목소리로 된 사과의 말은 덤이었다.

어디선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레이시아의 몸이 흠칫하고 잔떨림을 뱉어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더니만 지금 그녀의 모습이 딱 그랬다.

자기가 침을 삼켜놓고는 거기에 반응해서 움찔대는 꼴이라니.

스스로가 패닉에 빠졌다는  아주 대놓고 드러내주는 그녀의 모습에 입꼬리가 근질거렸다. 여기까지는 내가 의도한대로였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가 오기 전까지 참 고민이 많았다.

일단 불러내기는 했는데 우리 둘 사이의 문제가 워낙.. 좀 그런 것이다보니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풀어가야할지 감조차 잡히질 않았으니까.


그런 식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고민 속에 퐁당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으려니 약속한 시간보다 살짝 늦게 도착한 레이시아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고,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가 뒤로 넘어가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백금발 머리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것도 모른채 정신없이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그녀의 뒷모습을 확인한 순간 비로소 결정을 내릴  있었다.


그래서 바지를 벗어던졌다.


 마디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지금의 그녀에게는 훨씬 더 잘 먹혀들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만으로도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효과가 과연 얼마나 갈까.


당장이야 넘길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이라면?


나중에도 먹혀들까?


확신할 수 없었다. 그만큼 레이시아가 지닌 '비밀'은 평범한 사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니까.

정상인이 광인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범재가 천재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간극을 좁히려면 방법은 하나 뿐이다.

'진심'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내가 고심끝에 생각해낸 해결법은 효과가 있는 듯 했다.

지금 레이시아의 반응을 보면 진위여부를 의심할 여유조차 남지 않은 듯 했으니까.

'어우..'

그나저나  놈의 바람이 이렇게 살벌하게 부는 걸까.

까딱 잘못하면 태풍을 맞이한 우산마냥 뒤집어 쓰고 있는 로브가 그대로 뒤집혀버릴 것만 같아서 그것을 손으로 꾹 눌러 고정시켰다.

헌데 그런  모습이 레이시아에게는 나름대로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꿀꺽-

다시 한 번 침 삼키는 소리가 났다.


이번에 울려퍼진 건 전의 것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차마 무시하고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일까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어가던 레이시아의 얼굴이 다시금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 으.. 그, 이건.."

방금 그걸로 그녀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는 그녀의 반응을 보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아나에게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반응이 무려 레이시아에게서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그런 식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녀를 상대로 조심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죄송해요. 당혹스러우시죠? 제가 갑자기 이래서.."


 말에 쉬지 않고 달싹이며 뚝뚝 끊어지는 소리를 내뱉던 레이시아의 입이  다물어졌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면 확실히 당혹스럽기는 한 모양.

차마 내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레이시아의 고개가 아래를 향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아래쪽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렇게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다보니 알게되었다. 레이시아가 시선을 내리깐 게 꼭 내 얼굴 보기 민망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는 걸.

그 사실을 내게 들키기 싫었던 것일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도망치듯 움직였다.

앙큼하기 그지없는 행동.


그렇지만 모르는 척 해주기로 했다.

지금 그걸 지적해봐야 득될 게 없었으니까.

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아까 하려던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이해하고 싶었어요. 레이시아 님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행동을 하셨던 건지를."

내가 이러는 건 어디까지나  이해하기 위해서다.

 얼마나 숭고한 말인가.


그만큼 효과또한 확실했다.


레이시아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그녀의 입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물어졌으니까.


말문이 막힌 상태라는 것쯤은 딱봐도  수 있었다.

바라마지 않던 반응이었고, 그렇기에 주저할 이유또한 없었다.

"저.. 이상하죠?"

포인트는 나도 다 안다는 것처럼 내뱉는 것이었다.

세심하게 공을 들여 내뱉어진 그 말에 레이시아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반응을 보여주었다.


"아, 아냐..!"

많이 급했나 보다.


내 어깨를 움켜쥔 손에 이리도 힘이 바짝 들어간 걸 보면.

"윽.."


"미, 미안!"


어깨 쪽에서 느껴지던 압박감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녀와의 거리를 조금 더 좁혔다.


한 걸음 남짓하던 것이 제로가 된 순간, 나는 로브로 감싸인 레이시아의 품 안에 있었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그녀는 어쩔 줄 몰라했다.


등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렇다고 레이시아는 날 밀어내지도 못했다.


로브 아래로 느껴지는 그녀의 몸은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말캉하고 부드러웠으며, 동시에 따뜻했다.

그렇게 그녀의 품에 포옥하고 안긴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실은 저 오래 전부터 드리고 싶은  있었어요."


갑자기 선물이 있다고 말을 하니 순간적으로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레이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나 몸을 떨어뜨렸다.


내가 떨어져나가는 게 아쉬웠던 걸까.

연분홍빛 입술이 슬며시 벌어지며 그 사이에서 '아..'하고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것도 잠시, 그녀가  향해 시선을 던져왔다.

내 선물이 뭔지  번 확인해보겠다는 것처럼.

나름대로 강렬한 레이시아의 눈빛을 받으며 로브 안에서 손을 움직였다.


당연히 그 안에 숨기고 있던 것을 꺼내들기 위함이었다.

헌데 그런 내 행동이 레이시아에게는 조금 다르게 비춰지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꼴깍하고 침삼키는 소리와 함께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내 손의 움직임을 쫓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여기서 한꺼풀 더 벗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뭐, 그럴 생각이 아예 없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런데 저렇게 김칫국부터 들이키고 있는 꼴이라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싹 도는 모양인지 자꾸만 침을 삼켜대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새어나오려 했지만  눌러 참았다.

그리고는 목을 따라 둘러놓았던 것을 풀어 손에 쥐었다.

스륵-


천과 천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그에 아까전부터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리던 레이시아의 목울대가  어느 때보다 강렬한 움직임을 선보였다.


처음과 비교하면 몇 배는  강렬해진 시선, 그것을 느끼며 로브 속으로 밀어넣었던 손을 조심스레 꺼내들었다.


그렇게 나름 오랫동안 간직했던 것을 레이시아를 상대로 공개한 순간-


"아..?"


언제 빨갛게 물들어 있었냐는 듯 레이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솔직히  놀랐다.

설마 한 번에 알아볼 줄은 몰랐으니까.

'뭐..'


덕분에 이게 뭔지 가타부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좋긴 했지만.

내 손에 고정되다시피한 레이시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찌나 거친지 그녀의 야외노출 현장을 덮쳤을 때가 생각날 정도였다.

흡사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날 것 그대로의 반응을 보여주던 레이시아가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던 것일까.


그렇게 몸을 잘게 떨어대는 레이시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때 그녀의 야외노출 파트너였던 로브를 손에 꼭 움켜쥔채 다시금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저벅-

크지도 작지도 않게 울려퍼진 발자국 소리에 레이시아의 어깨가 흠칫하고 튀어올랐다.


안 그래도 질끈 감겨있던 눈에 주름이 지며 힘이 바짝 실렸다.


세간에 알려지게 되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짓을 받기에 충분한 변태짓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걸린만큼 내가 자신을 상대로 경멸의 반응을 내비칠 거라 생각하기라도  것일까?


뭐, 이 세계 기준으로 보통 남자였다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알몸으로 바깥을 돌아다니는 것만 해도 충분히 상식 밖의 일인데 레이시아는 개처럼 네 발로 기고, 아무데서나 오줌을 싸기도 했으며, 심지어 손가락으로 제 보지를 쑤셔가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으니까.


그야말로 변태짓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행위들이었고, 그렇기에 경멸당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성벽이 좀 뒤틀려있고, 한 번 폭주하기 시작하면 끝을 모르고 폭주해서 그렇지 그녀는 평소에는 의외로 상식적인 인물이니까.


허나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새끼일 때의 이야기고..


로브로 덮여있음에도 그 굴곡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는 그녀의 몸을 눈으로 쭉 훑으며 조용히 입맛을 다셨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오래도 걸렸다 싶었으니까.


그렇지만 후회는 없었다.


아끼고 아꼈다가 맛보는 것인만큼 더욱 각별한 맛이 날테니까.

"저..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리 말하며 눈을 질끈감고 있던 레이시아의 품에 안긴 건 다 그것을 위한 밑작업이었다.


"레이시아님께.. 그런 비밀이 있다는 거."

"..."

"그런데 참 이상하죠..? 보통 그런 광경을 봐버리면 경멸하는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안에 갇혀있던 레이시아의 몸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경멸이라는 단어에 움찔하며 반응을 보였다.

"이상하게.. 눈을 뗄 수가 없더라구요."


두근두근-하고 맞닿은 몸을 통해 내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의 박동이 전해져왔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쏟아지는 달빛을 맞고 있는 레이시아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져서.."

"..."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당황스러울 정도로 흥분하고 있는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

"혼란스러웠어요."

 피해다녔던 건 그래서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됐거든요.."

네가 경멸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보고 흥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랬던 것이다.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레이시아가 질끈 감고 있던 눈을 크게 치떴다.

"지금도 사실은.."


슬쩍 말끝을 흐리며 어정쩡하게 허공에 머물러 있던 레이시아의 오른손을 잡아 내 사타구니 쪽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잔뜩 화가 나 있는 물건의 상태를 그녀에게 확인시켜주면서-

"이렇게 잔뜩 흥분한 상태에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이렇게 흥분한  널 기다리는 동안 그  있었던 일을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아마도  순간이었을 것이다.

로브 위로 살짝 도드라진 내 물건과 맞닿아있던 레이시아의 손이 움찔하고 떨렸다.

허나 그 이상의 액션은 없었다.

여전히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는 모양.


"..이런 제가 경멸스러우신가요?"


레이시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그리 물었던  그녀에게 확신이라는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런  물음에 퍼뜩 정신을 차린 레이시아가 격렬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다시금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이거- 입어주실 수 있나요?"


손에 꼬옥하고 움켜쥐고 있던 로브를 그녀 쪽으로 내밀면서.

"또.. 보고 싶어요."

레이시아의 고개가 천천히 흔들렸다.

위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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