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300)화 (299/366)



〈 30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솔직히 말하자면 생긴  보자마자 감이  왔다. 저게 뭐하는 물건인지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색부터가 너무 특징적이었으니까. 저거랑 똑같이 생겨먹은 걸 매일마다 보는데 모르면 기억력이 붕어급이거나 머저리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이건.."


그럼에도 사라가 건넨 것을 받아들며 슬쩍 말끝을 흐렸던 건 말 그대로 혹시 모를 가능성 때문이었다.


막말로 저렇게 누가봐도 마시는 것처럼 생겨놓고서 의외로 몸에다가 바르는 식일 수도 있었으니까.

뿐만아니라 너무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너무 멍청하지도 않은 말 그대로 평범한 수준이라는 이미지를 성녀의 최측근이라 할  있는 그녀에게 심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일부러 그리 물었던 것인데-

"성녀님께서 직접 축성하신 물입니다. 돌아다니시다가 어지러운 느낌이 들거나 몸이 축 처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 들이키면 될 거라고 하셨습니다."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이 사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내가 스마트폰이라면 저건 보조 밧데리란 소리였다.

사양할 이유?

없었다.

이번 외출이 얼마나 걸릴지 그것을 추진한 나조차도 감히 예상이 안 갔으니까.


성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그것을  안으로 갈무리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여차할  충전기 역할을 해줄 녀석까지 챙기고 나니 마음이 그리 든든할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심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레이시아는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데 내가 먼저 방전되서 퍼져버린다는 그런 사태 말이다.

헌데 이게 있다면?

기회가 적어도 한 번은 더 주어진단 소리 아닌가.

'얼마나 채워주려나..'

개인적인 소망은 역시 성녀에게  신성력을 주입받았을  정도로 충전되었으면 좋겠다였지만 실제로 그리 될 가능성은 적겠지.


상황상 이쪽은 성녀가 직접 신성력을 주입해주는 방식의 열화판일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래도 반 정도는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오늘의 외출 복장을 단단히 동여맸다.

당연히  옷은 아니었다.

가지고 있는 옷들따위  맞게 된지 오래니까.

그런  위해서 성녀가 특별히 구해다 준 물건으로 애매하게 줄어든 내 몸에 딱 맞았다.

다만, 딱 하나 불만인 부분이 하나 있다면..


'좀.. 끼네.'

다른 곳은 다 괜찮은데 사타구니 부분이  그랬다.

화가 전혀 안 난 상태에서도 이 정도인데 나중에 제대로 빡치면 어느 정도일지 벌써부터 두려웠다.

'설마 바지가 찢어지는 건 아니겠지?'

아닐 거라 믿기로 했다. 수수해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보기보다 꽤 질긴 듯 했으니까.

살짝 불편한 느낌이 드는 부분을 손으로 잡아서 늘려준 뒤, 마지막으로 로브를 뒤집어 썼다.


이건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었다.

덕분에 좀 많이 헐렁하긴 했다. 어떻게 잘만 하면 안에 사람 한 명 정도는 숨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정말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면 이곳을 쓰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러니까 정말로 몸을 숨길만한 곳이 보이지 않을 때는 말이다.

그렇게 외출 복장을 모두 갖춰입은 다음에 그새 방을 빠져나간 사라를 다시 호출했다.

"벌써 출발하시는 겁니까?"


줄이 잡아당겨지는 소리에 반응하여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내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리 물었다.

아직 내가 외출하겠다고 통보한 시간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벌써 나갈 준비를 끝내놓고 있으니 뭐 때문에 이리 서두르나 싶었던 걸까.


"네, 아무래도 호위 분들하고 미리 합류하는 게 좋을 듯 해서요."


그런 그녀를 상대로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을 입에 담았다.


그랬다.

나는 성녀를 상대로 한 가지 거짓말을 했다.


내가 바깥을 돌아다니는 동안 내 호위를 맡아줄 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성녀에게 외출하겠다고 통보한 시간은 저녁하고 밤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있는 시간대였고, 그녀는 그런 내 선택에 난색을 표하며 그래도 낮에 돌아다니는 게 안전하지 않겠냐는 식으로 날 설득하려 들었다.

물론, 내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을 귀담아듣는 척을 하면서도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으니까.


그런 식으로 이어진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자기가 여기서 아무리 날 설득하려 해봐도 내 선택이 달라질 일은 없을 거라 판단했는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노선을 갈아탔다.

외출하는 시간대를 바꿀 수 없다면 차라리 최대한의 안전을 확보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결과가 바로 호위를 붙여주겠다는 제안이었고, 내가 성녀를 상대로 거짓을 입에 담았던  다름아닌 그것을 거절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성녀는 이번 외출동안 왕국 측에서  호위를 담당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상태였다.


실은 협의된 거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뭐..'


문제될 건 없었다.

나중에 레이시아를 잘 구슬려서 있었던 사실로 만들어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안내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사무적이기 그지없는 태도로 날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인 사라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잘 따라오라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그녀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성역 밖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한 5분 정도 걸었더니 밖이었으니까.


"이 다음부터는.."

"혼자서도 괜찮습니다. 숙소에서 합류하기로 했거든요."


"아닙니다. 숙소라고 하셨지요."


숙소 앞까지 데려다 줄 생각인 걸까.

이쯤에서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서 대충 던진 말이었는데 귀찮게 됐다 싶었다.


이렇게되면 얄짤없이 우리 쪽 숙소까지는 걸어가야 할  같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럼, 전 이만.."


숙소까지 대략 5분 정도 남은 상황에서 사라가 몸을 돌려 떠나갔다.

미련같은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몸짓이었고,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숙소를 향해 내딛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만 저렇게 해놓고 몰래 뒤에 따라붙었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해서 원래 나아가던 방향대로 걸음을 옮기다가-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을 때 그대로 빙글 돌아섰다.


그리고는 그대로 약속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품 안에 숨겨놓은 것의 두툼한 존재감을 만끽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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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아 시점****


쿵쿵하고 심장이 뛰었다.

그만큼 초조했으니까.


또 실수를 해버렸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필이면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해버리다니.

스스로를 향한 원망이 가슴 속에 넘실거려서 미칠 것만 같았다.

'설마..'

벌써 돌아가버린 건..

순간 머릿속으로 떠오른 불안하기 짝이 없는 상상에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설령 그게 현실이 된다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이안을 원망할 자격이 없었으니까.

이안이 힘들게 기회를 마련해주었는데 늦어버리다니.


호위를 대동해봐야 방해밖에는 되지 않을 게 뻔했기에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혼자 몰래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다.

평소 호위를 맡아주던 이들과는 달리 지금 자신의 호위를 맡아주고 있는 건 그런 식으로 속이는 게 불가능한 인물이었으니까.

몰래 빠져나가려 하자마자 딱 걸려버렸고,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혼자 보내려 하지 않는 그녀를 떼어낸답시고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낭비해버리고 말았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몇  해본 적 없는 달음박질까지 해가며 약속장소를 향해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제발.. 제발..'


뭔가를 두고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해본 적이 있었던가.

턱밑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폐가 아팠다.


벌어진 입에서 새어나온 숨이 허연 김을 이루며 시야를 확보하는 걸 방해했다.


그럼에도 발을 내딛는 걸 멈추지 않았다.

힘들다고 멈춰서서 헉헉대버리면  잠깐 때문에 기껏 찾아온 이 기회를 날려버리게 될지도 몰랐으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뛰었다.

종아리 근육이 욱신거릴 때까지 뛰었다.


이안이 쪽지에다가 적어놓았던 약속 장소가 시야 끝에 걸리기 시작한 건 그쯤이었다.


보자마자 알아차렸다.

그곳이 약속 장소라는 걸.


그도 그럴 것이 쪽지에 적혀있던 그대로였으니까.

겨울이라 작동을 멈춘 상태지만 그럼에도 분수라는 걸 분명히 알 수 있는 특징적인 구조물.


그것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는 분수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없..어?'


낮이었다면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들로 꽤나 붐볐을 것 같은 분수 주변에는 아무도  있지 않았다.

 사실을 차마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눈을 굴려봤음에도 눈만 아려올 뿐 그 사실만큼은 결코 변하지 않았다.

허탈감이 밀려왔다.

제멋대로 땅을 내달리던 두 다리의 속도가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랬구나.

자신은 늦어버린 거구나.


이만한 기회가 다시 주어질까?


알 수 없었다.

특별히 기회까지 줬음에도 바람 맞은 꼴이 되어버린 이안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없었으니까.


아무도 서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수대를 향해 나아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던 건 어디까지마 미련 때문이었다.


누가 봤다면 지가 늦어놓고 쓸데없니 미련을 부린다고 헐뜯기에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광경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을 향해 내딛는 걸음을 차마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게 정답이었다.

"..전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허탈함과 실망감에 젖은 자신을 한층 더 깊은 절망으로 밀어넣기 위해 누군가 악의적으로 꾸며낸 것이라 생각했었다.

"전하..!"

등뒤에서부터 뻗어온 손이 기계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던 걸음을 멈춰세우기 전까지는.

"하아- 하아-"

자신을 붙잡기 위해 뛰어온 것일까.

숨이 거칠었다.

거칠면서도 따뜻한 숨결이 숙소를 빠져나올 때 몸에 걸쳤던 로브의 한 부분을 펄럭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거친 숨을 내뱉던 이안이 분노한 듯한 목소리를 냈다.

그런 목소리로 자신을 꾸짖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분수대로 걸어들어가고 있었던 거냐고.


이 날씨에 미친 거 아니냐고.

듣는 입장에서 결코 기분 좋게 느껴질리 없는 말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입꼬리가 근질거렸다.


그렇기에 그를 향해 돌아설 수가 없었다.

지금  감정을 어떻게든 숨기고 싶었으니까.

꾸지람은  뒤로도 한참동안 이어지다가 한숨소리와 함께 끝을 맺었다.

"하아..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가 늦어서. 네가 돌아가버린 줄 알고.."


어찌되었든 무슨 말이든 해야했기에 살짝 기가 죽은 척을 하며 그의 의문에 답을 했다.


"늦을 수도 있는 거죠. 애초에 얼마 늦지도 않으셨고요."

말은 그리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렇겠지.

왕국의 겨울과 비교하면 따뜻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추운 건 매한가지다.


그런 날씨에 바깥에 서 있었으니..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이안의 몸상태였다.

한겨울에 얼음물을 뒤집어 쓰면 이런 느낌일까.

바로 조금 전까지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도감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싸한 느낌만이 몸에 가득했다.

그걸 느끼며 황급히 그를 향해 돌아섰다.


여차하면 자신의 온기를 나눠줘서라도 차갑게 식었을 게 분명한 그의 몸을 따뜻하게 해주려고 그리했던 것인데-

"자, 잠시만요."

용기를 내서 기껏 뻗은 손은 애꿏은 허공만 더듬었다.

그리고 그것의 목표였던 이는 어느새 살짝 뒤로 물러나 있었다.


마치 이쪽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걸 꺼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부의 의미가 아주 또렷하게 느껴지는 그 몸짓에 명치쯤 되는 곳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빠르게 맥박치고 있던 무언가가 쿵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역시 화가 난 것일까.


그 생각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어진 이안의 발언과..


"지금은 좀.. 부끄러워서.."

그의 모습으로부터 느껴지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얼굴이 붉었다.

단순히 추위 때문에 그런 거라 치부하기에는 좀 과할 정도로.

대체 뭐 때문에 저리도 민망해하는 것일까.

속으로 고개를 갸웃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펑퍼짐한 로브 속에서 뭔가가 꼼지락꼼지락하는 움직임을 선보이더니..

툭-

가볍기 그지없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바지라고 불리우는 물건이었다.

"이, 이건 그러니까.. 그게.."


그것의 등장과 함께 이안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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