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99)화 (298/366)



〈 29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도달하긴 했구나.

내가 건넨 쪽지를 조심스레 품 안에 갈무리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가는 사라의 뒷모습을 보며 감개가 무량하다는 느낌으로다가 그리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으니까.

혹자는 까짓거 외출 한 번 하는 건데 뭐 그리 어려울 게 있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거야말로 몰라서 할 수 있는 소리였다. 더럽게 어렵더라. 외출 허락 하나 받아내는 게 말이다.


그 탓에 중간중간에 '거 꼭 이렇게까지 해야하나?'라는 회의감어린 생각마저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허락을 구하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성녀가 내 자유를 억압하거나 그런 건 분명 아니었지만 그녀나 그녀의 시녀인 사라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이 성역이라는 공간을 빠져나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디아나가 들려준 게 사실이라면 그랬다.


물론, 그게  이 안에 붙잡아두기 위한 그녀의 거짓말일 가능성도 없잖아 있긴 했지만..

솔직히 거짓말일 것 같지는 않았다.


애초에 디아나는 그런 걸 가지고 거짓말을  성정이 못 되니까. 그때 표정도 굉장히 자연스러웠고 말이다.


만약 그게 연기였다면?

농담 안 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물구나무를 선 다음에 발바닥을 서로 격하게 맞부딪히며 발박수를 쳐주는 식으로 일취월장한 그녀의 연기력을 극찬해줄 용의가 있었다.


그 정도로 당시 디아나의 얼굴은 누가봐도 혹시 모를 사태를 걱정하는 이의 그것이었고, 그렇기에 모험을 시도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몸이라도 멀쩡했다면 정말 그리될지 확인해보자는 마음으로다가 한 번 부딪혀보기라도 했을텐데 한 4년 넘게 사용한 스마트폰마냥 밧데리가 순식간에 달아버리는 몸을 가지고 차마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밧데리가 떨어진 순간 휴대폰 전원 꺼지듯 내 몸도 작동을 멈출텐데 그 상태로 어딘지도 모르는 공간 속에 방치된다?

피라미드 속에 안치된 미라마냥 말라비틀어져서 뒤지는 엔딩밖에는 떠오르질 않았다.

그 꼴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성녀에게 외출 허락을 따내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굳이 외출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일전에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다들 우르르 몰려왔을 때, 레이시아에게 은근슬쩍 금이간 것을 다시 붙일 수 있을 법한 여지를 보여준 다음에 시녀인 사라를 이용해 상황을 흐지부지하게 만들었던  어디까지나 그녀가 더욱 간절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게 적당히 익었다 싶었을 때 '마음 넓은 내가  이해해드릴게.'라는 느낌으로 포용력과 부성애를 한 껏 드러내며 파팡미를 과시하는 식으로 그 건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아니, 뭔 놈의 타이밍이..'


어째  틈이 나질 않았다.

계획한대로 하려면 기본적으로 레이시아와 내가 단둘이 있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런 상황 자체가 오지를 않더라.

레이시아가 병문안을 올 때면  다른 이가 먼저 자리를 지키고 있곤 했으니까.


그런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 보니 처음에는 레이시아를 제외한 다른 이들끼리 몰래 짜고 그녀를 견제하는 건 아닐까하는 이상한 음모론까지 머릿속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게 대두된 음모론이 단순한 내 망상에 불과할지 아니면 진실일지는 아직 그럴만한 기회가 없어서 확인하진 못했지만, 딱 하나만큼은 확실해보였다.

이대로 병실에 틀어박혀 있으면 될 일도 안   같다는 것 말이다.


밖을 나돌아다닐만한 몸 상태가 아니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출을 결심했던 건 다름아닌 그 탓이 컸다.


해서 결심이 서자마자 성녀를 상대로 외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는데-

"제가 허락할 거라 생각하시나요?"


당연히 까였다.

아니, 그냥 까인 수준이 아니라 아주 대차게 까여버렸다.


교리에 성녀는  얼굴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조항같은 거라도 있는 것인지 불편할 법도 한데 맨 얼굴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녀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인 것도 바로 그때였다.

베일을 젖혀서 맨 얼굴을 드러낸 다음에 지금 그게 말이 되냐는 식의 눈빛을 이쪽을 향해 던져오는데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녀의 입장이었어도 그리 대응했을테니까.

언제 어디서 픽하고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을 바깥으로 내돌린다?


그걸 허락하면 의사, 아니 성녀 직함 떼서 반납해야지.


물론, 그렇다고 외출에 대한 것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몇 번이나 말했듯 나는 지금 현 상황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게임으로 따지면 다음 루트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이 꽉 막힌 거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그러니 당연히 다른 루트를 물색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성녀가 내게 신성력을 주입해주기 위해 찾아올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설득을 시도했다.


꽤 다양한 방식이 동원되었고,  중에 대부분은 내가  눈에 보이는 것보다 건재하다는 걸 어필하는 식이었다.

 번 찍어서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 했던가?

내가 볼 때는 틀린 말이었다.

시도가  번을 넘어섰음에도 성녀의 대답은 처음과 같았으니까.

허나 그동안의 시도들이 아예 효과가 없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렇게 말해도 안 돼요.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함을 넘어서서 어처구니 없다는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던 처음의 것하고는 다르게 내 말을 받아치는 성녀의 목소리에 망설임이 늘었으니까.

그러한 변화가 생긴데에는 '안에만 있으려니 너무 답답하다.'라는 핑계와 '사람들이 날 정말로 영웅 취급하는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다. 그걸 확인하면 왠지 위안이  것 같다.'라는 식의 논리도 한몫했지만..

"네? 정말 안 될까요?"


내가 성녀의 약점을 알아차린 덕도 컸다.

그랬다.

위치가 위치다보니 평생 이성과 연을 끊고 금욕적인 생활을 해온 그녀는 남녀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스킨십에 관한 면역이 심각할 정도로 없었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 이렇게 내가 그녀의 손 위에다가 손을 포갠 것만으로도 귀하고 목덜미가 빨갛게 변할 정도로 심각했다.

그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이왕 얼굴을 깐 거 내 앞에서는 더는 불편한 베일을 뒤집어 쓰고 있기 싫었는지 내 말을 대차게 깠던 그 날 이후로 성녀는 베일없이 모습을 드러내곤 했는데 그런 그녀에게 치료를 받다보니  몸에 손을 댈때마다 그녀의 얼굴 위로 작게나마 홍조가 서리는 걸 발견할 수 있었으니까.

내게도 그녀에게도 방해밖에 되지 않던 베일이 사라진 덕분에 알게된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그녀를 보며 자애로움이 넘치는 타입의 눈나를 상상하곤 했는데 그런 내 상상하고는 달리 성녀는 천진난만한 느낌이 훨씬 더 강했으니까.

자애로움이 아예 없는  아닌데 얼굴 위에 자리한 백치미가 워낙 거대하다보니 그것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성녀가 스킨십에 약하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걸 굉장히 요긴하게 써먹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노골적으로  부분만 파고들지는 않았다.

스킨십에 면역이 없다는 약점을 이용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가 자칫 '선'을 넘어버리게 될 경우 오히려 역효과만 날 가능성이 컸으니까.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건 어디에 그어져있을지 모르는 그녀만의 선을 넘지 않는 것이었고, 덕분에 스킨십은 어디까지나 보조 역할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성능 하나만큼은 메인이 되는 것들 못지 않게 확실했지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면 되는데.."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손등 위에 포개고 있는 손에다가 있는 힘, 없는 힘 죄다 쥐어짜내서 몰빵했는데 내 몸 상태가 어떤지 나보다도   알고 있는 입장에서 차마 그걸 떨쳐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닌가? 그냥 즐기고 있는 건가?'

입꼬리가 움찔움찔대는 걸 보면 어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 안 되는데.. 위험한데.."


금방이라도 위를 향해 치솟을 것처럼 열심히 움찔대고 있는 입꼬리와는 다르게 성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어찌나 정신없이 움직여대는지 보는 내가 다 어지러울 정도였고, 덕분에  번 더 그녀를 밀어붙일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정말로 안 될까요..?"

때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는 것이 더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

크게 실망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며 그에 걸맞는 목소리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동시에 성녀의 손 위에다가 포개고 있던 손을 금방이라도 떼어낼 것처럼 움찔거렸다.

그랬더니..

"..아, 알겠어요."

내가 실망이라는 감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린 즉시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사람마냥 안절부절 못 하며 내 눈치를 살피던 성녀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소망하니 어쩔 수 없이 수락한다는 듯한 태도였고, 그 모습에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나올 뻔했다.

그동안 그녀가  그토록 베일을 고집했는지 알 것도 같았으니까.

'표정관리가 엉망이구만.'

아니, 이건 엉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아주 가끔 생각이 얼굴 위로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볼 때는 성녀가 딱 그랬으니까.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이건  심각한 문제다.


성녀쯤 되면 그녀가 하는 행동이나 짓는 표정 하나하나에 의미가 부여되기 마련인데 그런 이가 표정관리를 못한다?


분명 거기서 오는 손해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지금도 봐라.


표정 하나를 관리 못해서 결국 내게 외출을 허락해주지 않았나.


어찌보면 약점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만한 것의 존재를 본인이라고 해서 모르지는 않았을테니 그토록 베일을 고집하고 다녔던 거겠지. 어쩌면 그녀의 직속상사인 여신이 시켰을 수도 있고.

'어쩐지 베일이 과할 정도로 두껍더라니만..'

성녀가 쓰고 다니는 건 명백히 비정상적이었다.

보통이라면 그래도 앞은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약간 시스루 재질로  걸 뒤집어쓰기 마련인데 성녀가 쓰고 다니는 건 앞이 제대로 보이기나 할지 의문이 들 정도로 두터웠으니까.

그래서 볼 때마다 그게 의문이었는데 설마 그런 비밀이 숨겨져있었을 줄이야.

뭐, 단순하기는 해도 효과적인 방법이긴 했다.

아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려버리면 굳이 되지도 않는 표정관리에 심력을 낭비할 필요도 없을 뿐더러 눈이 보이지 않도록 가림으로써 상대방에게 위압감같은 것도 심어줄 수 있으니까.

상대가 성녀라면?

위압감대신 신비함을 느끼겠지.

뭐, 아무튼 그렇게 성녀에게 1일짜리 외출권을 받아낸 즉시 나는 그 점을 십분 활용하여 성역의 시녀인 사라를 전령 역으로 써먹었다.


나 혼자만 돌아다니면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몇 번이고 까여가면서 외출 허락을 받아낸  어디까지나 레이시아와 단둘이 만나기 위함이었는데 당연히 그녀도 초대해야하지 않겠는가?

약속 시간은 밤으로 잡았다.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하면 낮보다는 밤이 몇 배는 나았으니까.

그렇게 레이시아에게 일방적인 초대를 보내놓고  후에는 그녀와 만나서 할 것들을 준비하는데 집중했다.


개중에는 그 날 필요할 것 같은 준비물을 조달하는 것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나는 성역 안에서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

그렇기에 내 손발이 되어줄만한 이가 필요했고,  역할은 자연스레 디아나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녀에게 준비물을 부탁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말이 준비물이지 사실 내가 왕국에서부터 챙겨온  중에 하나였으니까.

디아나를 상대로  방에서 짐을 좀 가져다  수 있겠냐고 말했던 건 다름아닌 그래서였다.


"짐을?"

물론, 내가 처음 그 말을 꺼내든 순간 디아나가 내보인 반응은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고 반문까지 해왔으니까.


귀찮아서 그런 걸까.

표정을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살짝 섭섭해하는 느낌에 가깝달까.

내가  여기서 평생 지내겠다고 선언한 것도 아니고 그저 짐만 옮겨달라 했을 뿐인데 대체 뭐가 그리 섭섭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네, 이래저래 좀.. 불편해서요."

이미 말을 꺼내든 상황에서 무를 수는 없었다.


해서 그대로 밀고 나가니 아주 잠시동안 입술을 살짝 깨물고 있던 디아나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 전부  가져다주실 필요까지는 없고, 그..  방에 가보시면 가방 하나가 있을 거에요."


몸이 애매한 사이즈가 되어버린 탓에 원래 몸일 때 입던 것도, 꼬맹이 모드일 때 입던 것도 못 입게 되어버린 상황.


그렇기에 가방 안에 든 물건 하나 외에는 사실 전부 내게 불필요한 것들 뿐이었다.

해서 그것만  찝어서 부탁하니 아예 이곳으로 이사를 하는 게 아니라는  깨달은 디아나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알겠어. 가방 말이지?"


내가 디아나에게 부탁한 가방 안에는 레이시아가 보면 기겁하는 수준을 넘어 그대로 졸도해버려도 모자라지 않을 만한 물건이 자리하고 있었다.

굳이 챙겨올 필요까지는 없었던 물건이었지만 혹시나 내가 본국을 떠나있는 동안 레이시아가 그리움으로 폭주해  방을 뒤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차마 배제할 수가 없어서 챙겨온 것이었는데-


'흐음..'

덕분에 이번에 꽤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을 듯 했다.


아마, 디아나는 자기가 옮기는 게 무엇인지 꿈에도 모를테지만.

그렇게 외출 허가도 받아냈고, 디아나를 통해 필요한 준비물도 갖추었다.

그렇기에 남은 건 시간에 맞춰서 약속 장소로 향하는 것이 전부인 상황.


해서 그 시간이 도래하기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이안 님? 성녀님께서 혹시 모르니 챙겨가라 하신 물건입니다."


사라의 손을 통해 물건 하나가 전해졌다.


말갛게 빛나는 액체가 가득 들어찬,  손바닥만한 크기의 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