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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이 되기 전에 (298)화 (297/366)



〈 29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레이시아 시점****

"..죄송해요."

그 말이었다.

따지고보면 정말 별 것도 아닌, 그저 누군가에게 사죄를 하기 위해 쓰이는 것 외에는 다른 용도조차 존재하지 않는 하잘 것 없는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주제도 모르고 콩닥콩닥 뛰어대고 있던 심장이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그게 자신의 입이 아닌 이안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었다.


대체 뭐가 그리도 죄송하기에 목소리가 저런 걸까.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안했다.


정확히 그때부터였다.


물 속 깊숙히 잠수라도 한 것처럼 귓속이 먹먹해지기 시작한 건.

그렇게 아까부터 들려오던 온갖 소리들이 서서히 멀어져갔다.

동시에 발밑이  꺼지는 듯한 느낌이 몸을 타고 엄습해왔다.


"그동안 저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런 식으로 어딘지도 모를 곳을 향해서 침잠하던 자신을 건져올린 건 다름아닌 이안의 목소리였다.


스스로의 행동을 책망하는 듯한 그 목소리가 수렁마냥 질척이는 것들 속으로 빨려들어가던 자신의 몸은 그대로 건져올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맞다면 이안은 지금-


그런 생각이 절로  정도로 믿기 힘든 발언이었고 그 탓에 반사적으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 그게 무슨.."

그의 입을 통해 정확하게 듣고 싶었다.

방금 그 사죄가,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헌데 하늘은 그걸 허락할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똑똑-

"가시죠."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스스로를 이곳의 시녀라 소개했던 이의 목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꼭 마치 여기까지라고 속삭이는 듯한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어느새 마음 속에서는 원망과 함께 정체모를 시커먼 것들이 막 분화하기 시작한 화산마냥 솟구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것들이 입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미친 듯이 솟구치는 것들을 있는 힘껏 억누르면서 이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말하려 했다.


저건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니까 내 물음에 답을 해달라고.

그렇게 말하려 했다.

막 입을  순간 이안이 조심스럽게 자신을 밀어내지만 않았다면 필시 그리했을테지.

그의 손에 떠밀려 살짝 밀려난 순간 깨달았다.

자신은 괜찮아도 그는 괜찮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릿속이 아연해진 건 다름아닌 그 때문이었다.


또.

또 실수를 할 뻔 했으니까.

그렇게 단념을 배웠다.

"..이만 가봐야겠네."


혹시라도 그게 얼굴 위로 드러나지 않도록 두터운 가면을 얼굴 위로 눌러썼다. 어렵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스스로의 감정을 숨기는 건 어렸을 때부터 질릴 정도로 해온 일이니까.


그렇게 자리를 떠나려 했는데..

꼬옥-

옷깃을 붙잡아오는 손길이 하나 있었다.

너무나도 미약해서 살짝만 움직여도 그대로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것이 나름대로 처절하게 옷깃에 매달려왔다.

"또.. 만날 수 있는 거죠?"


그 말에 뭐라도 답을 했어야 했을까.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딱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그가, 이안이 그걸 바란다면 분명 이루어질 거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아쉬운 듯 자신을 배웅하는 이안을 뒤로한채 방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나온 걸 확인한 시녀가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곤히 잠든 카트린느를 품에 안아든채 다시금 모습을 드러넀다.

그녀보다 카트린느쪽의 체구가 한결 커보이는데 버겁지는 않은 걸까.


괜찮냐고, 혹시 무겁지는 않냐고 묻기에는 시녀의 얼굴이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보여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그리 묻는다면 실례가 될 것 같았으니까.

뭣보다 지금 자신은 그녀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중간에 끊어져버린 이안과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복잡했다.


그렇기에 그쪽은 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잘 따라오라는 것처럼 앞서 걷기 시작한 시녀를 따라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사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갖가지 상념들은 갖가지 상상들로 발전해있었다.


개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역시..


'혹시-'

스스로가 너무 절박했던 나머지 환청이나 환각같은 걸 경험했던 건 아닐까하는 내용의 상상이었고.


물론, 상상은 어디까지나 상상에 불과할 뿐 그럴 리 없다는  정도는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그의 온기가, 조심스레 옷깃을 붙잡아오던 손길이 선명한데 그런  환각이나 환청일리 없었다.


만약 그게 정말 환각이라면?


차라리 남은 평생을 거기에 빠져서 지내고 싶었다.

그 정도였다.


최근 자신이 살아왔던 현실이라는 곳은  그 정도로 가혹했다.

'나중에..'


사람이 없을 때.

그래서 이안이 마음 편히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을만한  다시 찾아오자.

그리고 그때야말로 끝까지 듣는 거다.

자신을 이 가혹하기 그지없는 현실 속에서 건져내줄  있는  마디를.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그렇게 다짐했다.

그렇게 다짐했건만-

현실이라는 것이 그걸 허락해주지 않았다.


이안을 그리 만든 것들을 싸그리 다 잡아다가 죽이기 위해 만든 동맹이건만 정작 그것이 그를 찾아가는  방해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이곳으로 달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대족장인지 뭔지하는 것또한 방해가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고작 그년 하나 때문에 처리해야할 일거리가 배로 늘어났으니까.


미친듯이 일처리에 몰두해서 간신히 병문안을 갈만한 틈을 낸 뒤에 그를 찾아가면?

마치 누군가 그런 자신을 감시라도 하는 것처럼  그 시간대에는 선객이 버티고 있었다.

답답했지만 먼저  있는 이를, 그것도 제국의 황녀 씩이나 되는 이를 쫓아낼 수도 없어서 애꿏은 속만 삭혀야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다보니 눈이 돌아버린다는게 어떤 느낌인지  것도 같았다.

그 정도로 미칠 것 같았다.

맘 같아서는 동맹 일이고 뭐고 죄다 때려치고 싶었지만 이안의 복수를 위해서라는 명분 탓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렇게 초조함으로 마음이 바짝바짝 메마르는 걸 느끼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전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교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호위를 책임져주기로 한 이이자 디아나의 어머니이며, 한때는 자신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기도 했던 스승의 목소리에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슬며시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상태로 누군가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손님이 찾아오거든 적당히 돌려보내달라고 말을 했던  불과 몇 시간 전의 일이었으니까.


근위대장씩이나 되는 이가 그 잠깐 사이에 그 사실을 까먹었을리는 없으니 그만큼 중요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뜻일텐데-


누굴까.


솔직히 말하자면 불쾌함부터 앞섰다.


오늘 방문하겠다는 언질따위 받은 기억 없으니까.


그 말은 상대방이 아무런 약속조차 잡지 않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뜻이었고.


찾아온게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일국의 왕녀를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꾸만 불쾌함이 차올라서 그것이 얼굴 위로 드러내지 않도록 힘쓰는 것이 꽤나 고역이었다.

"..누군가요?"

그렇게 표정관리에 힘쓰며 찾아온 이의 정체에 대해 물었다.

그랬더니 돌아온 건-

"그, 시녀로 보이는 여성인데 성역에서 왔다고 합니다."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내용이었다.

성역, 그리고 시녀.


어찌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그 단어를 한몸에 품을 수 있을만한 이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  한 명 뿐이었다.

그렇기에 손님의 정체에 대해 들은 순간 심장이 쿵하고 크게 뛰었다.

동시에 불안한 예감이라는 것이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그 역할이 성역을 관리하는 것이기에 성역 밖으로 나오는 일이 거의 없는 이가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다?

혹시 이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아닐까.


아직 들은  하나도 없는데  생각부터 들기 시작했다.

'분명 어제는..'

어제 잠깐 짬을 내서 병문안을 갔을 때는 그럭저럭 괜찮아보였다.

힘이 없어보이긴 해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같은 느낌은 분명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루, 아니 몇 시간만에 상태가 나빠졌다고?

그럴 리 없다고 무작정 부정하기에는 이안의  상태가 너무 나빴다. 당장은 괜찮아보이더라도 잠깐 눈을 뗀 동안 확 나빠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혼자서 설레발부터 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손끝이 달달 떨리는 걸 차마 주체할 수가 없었다.

황급히 손을 책상 밑으로 숨겼던  왠지 그 광경을 남에게 들키게 되면 지금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광경이 그대로 현실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들여보내세요."

그렇게 살짝 떨리는 손끝은 무사히 감췄지만 목소리에 깃든 것까지는 차마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잠시동안 이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이가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의 안내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서는 시녀의 얼굴은 급박해보이지도, 그렇다고 참담해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덤덤했다.

네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온갖 풍경들은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속삭여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것도 꽤 짙게.

밀려오는 것의 농도가 어찌나 짙은지 마치 며칠동안 혹한의 추위 속에 방치되어 있다가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구면 대충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하는 생각마저  정도였다.

그렇게 마음 속 깊이 안도하면서-


"무슨 일로 찾아오신건가요?"

시녀, 사라를 향해 이곳까지 찾아온 용건에 대해 물었다.


혹시 성녀가 자신하고 따로 나누고 싶어하는 이야기같은 거라도 있는 것일까.


상대방이 성녀의 유일한 시녀이니만큼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사라가 대뜸 자신의 품 속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이쪽의 위치를 고려하면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행동.

사라를 자신의 앞까지 데리고 온 이가 몸을 움찔하며 허릿춤에  검을 향해 손을 가져갔던  그래서였을 것이다.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행동을 제지했다.

항상 긴장을 풀지 않고 있는  고마운데 사라의 행동과 지금 그녀가 우려하고 있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을테니까.


그렇게 목 밑에 칼이 들어올 뻔 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사라가  안에서 꺼내든 것을 책상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그것은 쪽지였다.


크기는 대충 손바닥 정도?

"그럼, 부탁받은 건 전해드렸으니-"


자신은 이만 가보겠다면서 이쪽을 향해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사라가 그대로 스르륵 물러나 방을 빠져나갔다.


그런 그녀의 태도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에게  쪽지를 보낸 건 성녀가 아니라는 걸.

그렇다면?


남는 건 딱 한 명 뿐이었다.

두근-


꺠달음과 함께 심장이 아까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뛰기 시작했다.


"쪽지군요."

혹시 모르니 자신이 먼저 확인해보겠다는 듯 손을 뻗는 여성의 행동을 손을 뻗어 제지했다.

 걱정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그의 쪽지를 다른 이가 먼저 확인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괜찮아요."

"하오나. 전하-"


 번 말하기는 싫었다.


"괜찮으니 나가보세요."


그래서 축객령을 내렸다.


다행히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다.

할 말이 많은 눈치였지만 기사이자 신하된 입장에서 모시는 이의 명을 무작정 거부하기도 그랬던 걸까.

이쪽을 향해서 꾸벅하고 고개를 숙여보인 여성이 방을 빠져나가자마자 책상 위로 올라와있던 쪽지부터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작성한 이의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곧고 반듯하게 접혀있는 것을 조심스레 펼쳐들었다.

물론, 그 안에 적혀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펼쳐든 쪽지 안에는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날짜, 그리고 구체적인 시각과 함께..

-OO에서 뵈요.


지정한 장소에서 만나자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언젠가 자신이 그를 상대로 한 적 있는 말과 함께.


눈을 굴릴 필요조차 없이  눈에 딱 들어오는 간략하기 그지없는 쪽지의 내용에-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가지런했던 호흡을 단 한 순간에 흐트러뜨리고, 느릿하게 뛰던 심장을 거칠게 맥동하게 만드는 감정, 그것의 이름은 기대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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