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오케이 무슨 말 하는 지 이해했어.'
지금 상황을 따져보면 딱 거기까지는 나온 상황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바이올렛을 향해 촉각을 기울였다.
진짜로 중요한 건 그 다음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어쩌지? 그건 좀 힘들 것 같은데."
이윽고 바이올렛의 분홍빛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건 어찌보면 예상했던 범위 내에 드는 것이었다.
원하는 대답과는 정반대에 서 있는 그녀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실망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 시도가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따위 애초에 품은 적조차 없으니까.
그럼에도 굳이 얼굴근육 당기도록 연기를 펼쳤던 건 그렇게라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내게 있어 리파는 태풍과도 같았으니까. 한 번 상륙하면 모든 걸 초토화시킬 수 있는 그런 강력한 태풍 말이다.
'역시..'
한낱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의 위대함을 어찌할 수 없는 걸까.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흘러갔다면 오히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리되면 바이올렛이나 레이시아의 판단력을 의심해볼 수밖에 없었을테니까.
국가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일을, 그것도 여러 곳이서 손을 잡고 단체로 추진하고 일을 내 말만을 듣고 엎는다?
그 정도가 되려면 내가 대충 달기쯤 되는 요부의 경지에 올라 상대방을 내 입맛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하지 않을까.
아무튼 리파라는 이름의 태풍이 이 땅에 상륙하는 것 자체를 막는 시도는 시도하기 무섭게 수포로 돌아가버린 상황.
그렇기에 이제는 태풍대비책을 강구할 차례였다.
'뭐..'
여기서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역시 레이시아를 비롯한 이들은 리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 정도겠지.
내가 그쪽으로 끌려갔을 때 리파네 부족과 직접 충돌해서 날 구해내는 식으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당시 나는 내 자력으로 탈출한 척을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당시에 날 납치한 부족의 이름조차 모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간극을 잘만 찌르고 들어간다면?
태풍이 상륙하더라도 아무 피해없이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그 점만 믿고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딱 한 명뿐이긴 해도 요주의 인물이 존재했으니까.
바로 진 말이다.
물론, 그녀또한 리파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진이 도망치고 난 후에야 리파가 모습을 드러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녀는 리파네 부족원이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보지 않았던가. 부족원 중 몇몇의 얼굴도 봤었고 말이다.
헌데 만약 그러한 요소들이 재수없는 방향으로 작용한다면?
이를테면 리파가 수행원이랍시고 데려온 이들 중에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이들이 포함되어 있거나 그렇다면?
대참사가 터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리파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그녀와 쇼부를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그래서였다.
'문제는 그게 먹히냐는 건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헤어진지 너무 오래된 탓에 리파가 날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으니까.
날 오매불망 그리워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족장씩이나 되는 자신이 그토록 간절하게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차갑게 자길 버리고 떠난 쌍놈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겠냐만은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 가능성이야 충분했다.
그녀의 간청을 외면하고 떠난 입장인 내가 봐도 그 정도인데 남겨진 입장에서는 뭐.. 그리움에 젖어서 지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그 다음부터는 말할 것도 없겠지.
어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느낌이라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당연히 그렇게라도 해서 머릿속에 그득하게 들어찬 것들을 털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래 뭐..'
그 대족장이라는 작자가 리파가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속으로 그리 되뇌이면서 억지로 머릿속을 비워낸 순간이었다.
"어디 안 좋아?"
바로 옆에서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태껏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앨리스의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뜬금없이 뭔 소린가 싶었다.
멀쩡히 잘 앉아있는 사람한테 갑자기 어디 안 좋냐니.
그만큼 내 안색이 나쁘기라도 했던 걸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알아차렸다. 앨리스로부터 그런 질문이 날아온 건 내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머리를 흔들어댄 탓이 크다는 것을.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마침 잘 됐다 싶었다.
안 그래도 슬슬 할 말도 다 떨어져가던 참이었으니까. 상당히 오랫동안 기절해있다가 깨어난 탓에 할 말이 꽤나 많긴 했다. 많기는 했지만.. 그 중 대부분이 이렇게 다 같이 모여있는 상태에서 꺼낼만한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이 자리를 마무리할지가 고민이었는데 마침 앨리스가 내어준 명분을 이용하면 자연스레 자리를 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머리가 좀.."
즉시 인상을 찌푸리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보란듯이 행한 행동들의 효과는 확실했다.
사방에서 움찔거리는 반응이 터져나왔으니까.
맘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내 상태를 확인하고 싶은데 자리에 앉아있는게 한둘이 아니다보니 옆에 있는 이들의 눈치가 보이는 걸까.
"윽.."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이번에는 앓는 소리까지 내가며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더니 자리의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파장 쪽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물론, 막 의식을 되찾은 탓에 상태가 불안정안 날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의외로 가장 먼저 그 말을 꺼내든 건 여태껏 내 눈치만 살피고 있던 바이올라였다.
혹시 내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 됐던 걸까.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그녀가 곧장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그 위에 누워서 퍼질러 자고 있던 카트린느의 몸 밑으로 손을 밀어넣더니 그대로 그녀의 몸을 안아들었다.
"여, 여기.."
저 말은 얼른 침대에 누우라는 거겠지.
무슨 적장의 목이라도 베어올 것처럼 기세좋게 나선 것 치고는 마무리가 영 맥아리가 없어서 그 모습이 은근히 귀엽게 느껴졌다. 여전히 꼬리하고 귀는 축 쳐져있는 상태라 더더욱 그랬다.
그런 바이올라의 배려를 굳이 사양하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보여준 행동이 남들이 보기에는 별 것 아닐 수 있어도 그녀에게는 그렇지 않았을테니까. 분명 그걸 위해 엄청난 용기를 쥐어짜냈어야만 했을 터.
그걸 어떻게 거절하겠는가?
"그럼.."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하니 내가 부탁을 건네기도 전에 먼저 뻗어온 디아나의 손이 등뒤에서부터 내 몸을 받쳤다.
디아나의 급습으로 인해 쫓겨나다시피 한 성녀가 채워주고 간 신성력이 아직 건재한 상태였기에 솔직히 부축까진 필요치 않았지만 그또한 사양하지 않았다.
그렇게 침대에 눕고 나니 비로소 다들 돌아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물론, 한 번에 우르르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듣자하니 지금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은 굉장히 특이한 공간이라서 혼자 무턱대고 돌아다니면 굉장히 위험하다나?
그래서 이곳으로 들어올 때 뿐만 아니라 빠져나갈 때도 시녀의 안내를 받는 건 필수란다.
새로이 알게된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겼다.
동시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까딱 잘못하면 이상한 공간에 내동댕이쳐질 뻔 했으니까.
"아, 그리고 한 번에 네 명이상 몰려다니는 것도 안 된다고 그러더라."
"왜요?"
"세 명까지는 괜찮은데 그걸 넘어가버리면 개중에 한 명은 꼭 길을 잃어버린다던데?"
"굉장히.. 까다롭네요."
성역이라 불리우는 공간을 경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양한 조건이 걸려있는 곳은 나도 처음이었다.
그동안 내가 접했던 성역들은 끽해봐야 부정한 것들이 범접치 못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에게는 이로운 기운을 선물해주는 식이 전부였으니까.
"그래도 이 안에 있으면 안전하긴 하겠네요."
"그렇지."
성녀가 배신을 할 리는 없으니 성역관리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그 시녀가 뜬금없이 배신이라도 하지 않는 한 필시 그럴테지.
그런 식으로 내게 성역에 관한 이모저모를 들려주던 디아나마저 앨리스와 함께 시녀를 따라 방을 빠져나가니 방 안에 남겨진 건 소파 위에 곤히 잠들어있는 카트린느와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레이시아, 그리고 나뿐이었다.
그나마 신경이 쓰이는 상대라 할 수 있는 카트린느는 기절하다시피 잠들어있는 상황.
내게 말을 걸기에는 이만큼 좋은 상황이 또 없었기에 나는 필시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올거라 생각했다.
헌데 이게 왠걸?
디아나와 앨리스를 데리고 나간 시녀가 돌아올만한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앙 다물어진 그녀의 입은 벌어질 줄을 몰랐다.
설마 떨어져있는 사이에 내게서 마음이 떠나기라도 한 것일까?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런 거라면 아까 전부터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오물거릴 이유가 없으니까.
단순히 결심이 부족한 걸 뿐일 거다.
'안 되겠네..'
고장나기 직전이나 다름없는, 아니 사실상 고장난거나 다름없는 이 몸을 가지고 예전처럼 바깥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건 무리일테니 이만한 기회가 언제 또 찾아올지 몰랐다.
그런데 이 정도로 완벽한 기회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낸다?
그럴 수 없다 생각했고, 손으로 침대를 짚어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던 것또한 그 때문이었다.
분명 별거 아닌, 못 하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동작인데..
"끄응..!"
체력측정을 위해 1분동안 전력으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난 것처럼 침대를 짚은 팔이 파들파들 떨렸다.
그것의 주인인 내가 보기에도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퍽 불안정해보이는 모습이었고, 그걸 못 본척 하고 넘어가기가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조, 조심..!"
내가 금방이라도 침대 위로 엎어질 것만 같았던 걸까.
언제 벽에 착 달라붙어 있었냐는 듯 순식간에 내 옆까지 도달한 레이시아가 내 팔만큼이나 가는 팔로 위태로이 흔들리던 내 상체를 떠받쳤다.
그렇게 그녀의 품 안에 껴안기다시피 한 순간, 여전히 파르르 경련하기 바쁜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힘이라고는 단 한 줌도 느껴지지 않는 움켜쥠이었고, 그렇기에 레이시아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떨쳐낼 수 있을만한 수준이었지만 오히려 그게 포인트였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힘과 팔에 남아있는 잔떨림이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족쇄로 화해서 그녀를 내 옆에다가 붙들어놨으니까.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자신의 옷깃을 움켜쥔 손을 풀지 않는 날 차마 떨쳐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것 같은 레이시아의 몸이 날 자기 품 안에 가두다시피 한 자세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레이시아에게서는 내가 기억하는 그녀의 향기와 똑같은 향기가 났다.
우유에 설탕을 섞어놓은 듯한 그런 냄새라고 해야할까. 본국이 아닌 이곳에서도 똑같은 걸로 몸을 씻는 걸까.
자연스레 콧속으로 흘러들어오는 그 향기를 만끽하고 있으려니 거기에 그대로 취해버릴 것만 같았다.
"참.. 오랜만이네요."
그 감상을 고스란히 입으로 옮기니 다시 한 번 그녀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럽기 그지없는 내 행동에 어떤 식으로 대응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던 걸까.
레이시아는 그토록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녀의 품 안에 안겨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숨결또한 점차 뜨겁고 촉촉하게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나름대로 숨을 죽여본다고 죽여보고 있는 것 같은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거리가 하도 가까운 탓에 중간에 누락되는 것 없이 다 들렸다.
그렇게 뜨겁고 촉촉하면서도 살짝 거칠은 것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노니는 걸 느끼고 있다가..
"..죄송해요."
웅얼대는 듯한 목소리로 레이시아를 향해 사과를 건넸다.
갑작스레 내뱉어진 내 사과에 당황한 걸까 아까 전부터 등에 닿을 듯 말 듯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던 그녀의 손이 크게 움찔거리며 내 등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문득, 아주 문득 궁금해졌다.
레이시아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 지가.
거기에 대고 호응하고 나선 호기심이라는 놈이 당장이라도 고개를 치켜들라고 충동질을 해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무시하고는-
"그동안 저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레이시아가 가장 듣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는 말을 그대로 입에 올렸다.
다시 한 번 움찔거림이 그녀의 몸을 타고 번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