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96)화 (295/366)



〈 29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모르쇠 작전의 효과는 썩 나쁘지 않았다. 벽에 찰싹 붙어있는 둘 중에서 적어도 바이올라만큼은 움찔하고 반응을 보여주었으니까.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상황에서 내가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니 그걸 무작정 걱정하기도 좀 그랬던 것일까.

"얼른요."

왠지 한 번  부추기면 그대로 넘어올 것만 같아서 다시 한 번 자리에 앉을 것을 권해봤더니 재차 이어지는 권유를 배겨내지 못한 바이올라가 쫄쫄쫄쫄 걸어와 비어있는 자리에 앉았다.

물론, 그런 그녀의 귀와 꼬리는 축 쳐져있었다.

저걸 보고 과연 누가 늑대를 떠올릴 수 있을까?


강아지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게 두 번만에 넘어온 누구누구 씨와는 다르게 레이시아의 저항은 제법 완강했다.

그래서였다.


"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냐는 것처럼 그녀를 부르면서 눈짓을 통해 은밀하게 신호를 보냈던 것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대충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무사히 전해진 듯 했다.


그런 내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던 그녀가 마침내 벽을 떠나 마지막 한 자리를 채웠으니까.

그렇게 빈 자리라고는  하나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채워진 접객용 소파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내심 카트린느가 기절해줘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분명 자리가 모자랐을테니까. 덩달아 분위기또한 어색해졌을 것이고.

'자..'


그럼 이제 무슨 말을 하는  좋을까.

아니, 무슨 말을 해야할까.

일단 급한대로 한 자리에 앉혀놓고 봤는데 생각해보니 그게 마땅치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 말이나 꺼내자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만큼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의 면면이 하나같이 만만치가 않았으니까.

그렇다보니 생각없이 던진 말이 무슨 사태를 초래할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어쩐다..'


잠시동안 고민하다가 침묵상태를 이렇게 오래 끌고 가는 것도 좋지 않을  같아 일단은 노말하게 시작해보기로 했다.


우선 입을 열기에 앞서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을 향해 한 번씩 시선을 주었다.

그랬더니 꽤 다채로운 반응이 돌아왔다.

내 시선을 받고서 뭐 할 말이라도 있냐는 것처럼 진중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채 시선을 마주던져오는 이가 있는 반면, 바이올렛처럼 보란듯이 씩하고 미소를 지어보이는 이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바이올라나 레이시아처럼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내 시선을 감당치 못하고 슬쩍 시선을 피하는 이들도 있었고.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침대 위에 기절해있는 카트린느에게까지 시선을 한 번 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슬며시 지어보인 미소는 덤이었다.


"다들 무사해보여 다행이네요."

그러자 미리 짜기라도  것처럼 움찔거리는 반응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그렇겠지.


걱정을 받아야할 대상이 오히려 자기들을 걱정했노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방금 그 한 마디로 인해 그들의 안에서 날 걱정하는 마음이  커지지 않았을까?

차마 말은 하지 못하고 움찔대기만 하는 이들을 쭉 둘러보다가 내 오른편에 자리를 잡은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는 마침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보니까 팔은 괜찮아요?"

"...그래."


내 물음에 답을 하는 디아나의 목소리 안에는 뭔가가 잔뜩 뭉쳐져있었다.


그런 그녀를 상대로 다 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동시에 그녀의 무릎 위에 자리한채 안쪽으로 꼬옥하고 말려들어가있는 그녀의 손위로 조심스레 내 손을 포갰다. 그리고는 아까 그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을 조심스레 토닥거렸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대놓고 바람피는 거야?

차마 그냥 흘려넘길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강타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앉아있는 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던  사실 그 탓이 컸다.

그렇게 바이올렛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돌아온 건 태연함의 수준을 넘어서 뻔뻔함의 경지에 다다른 반응이었다.

분명 자기가 먼저 이쪽의 관심을 끌어놓고서는 저렇게 무슨 일이냐는 듯한 반응이라니.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일단 그녀의 장단에 맞춰주기로 했다. 이렇게 대놓고 시선을 던졌는데 이제와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둘러대기도 애매했으니까.


"그.. 성녀님께 들었습니다."

모처럼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거기서 다른 여자에 관한 화제가 튀어나오니 그게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가늘지만 또렷함을 갖추고 있던 바이올렛의 눈썹이 순간 꿈틀하고 경련을 내보이며 그런 그녀의 감정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물론, 그 상태 자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 판단한 건지 금세 그걸 얼굴 위에서 지워버렸으니까.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누가봐도 의례적으로 짓는 거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린 듯한 미소였고.

"듣다니요? 뭘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숭도 이런 내숭이 또 없었다. 덕분에 살짝이지만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바이올렛이 황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희대의 사기꾼이나 배우로 이름을 날리지 않았을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더라.

"사교의 잔당을 소탕하기 위한 동맹을 제안하셨다고요."


그렇게 속으로 혀를 내두르면서 겉으로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유지하며 삼국동맹에 관한 건을 꺼내들었다.


그런  선택이 바이올렛에게는 상당히 의외였던 모양이다.


그녀가 뒤집어 쓰고 있던 가면이 한꺼풀 벗겨지더니 다시 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물론, 그또한 오래가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받은만큼 갚아줘야 하니까요."

복수심이나 뭐 그런 점을 떠나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라는 것처럼 내 말에 답을 하는 바이올렛의 태도에서 찌르고 들어갈만한 틈은 보이지 않았다.

"그.."


그럼에도 그런 그녀를 상대로 반대의사를 내비쳤다. 그러지 말고 이쯤에서 멈추는 게 어떻겠냐는 식으로.

당연히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왜죠?"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리 묻기는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단호함 그 자체였으니까.

그야말로 '어차피 들어주지는 않을 건데 그래도 들어는 드릴게'라는 식이랄까.

아마 어지간한 이는 여기서 바짝 쫄아가지고 더  못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난 아니었다.


"..걱정이 되서 그렇습니다."

아무리 바이올렛이라 해도 이 이유는 예상 못했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내뱉고 난 후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해보니 단호하기 그지없었던 얼굴에 약간이지만 틈이 생겨있었다.


"제국, 왕국, 그리고 교국.. 거기에 왕국 남부의 유목민족들까지."

누군가에게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이름이 포함된 탓일까. 내 입에서 유목민족에 관한 언급이 흘러나온 순간 정확히 세 명이 몸을 움찔거렸다. 말할 것도 없이 디아나, 앨리스, 그리고 레이시아였다. 아마 카트린느가 깨어있었다면 그녀도 저 대열에 껴있었겠지.


아무튼 그런 그녀들의 반응을 못본  하며 하려던 말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넷이 손을 잡는다면 잔당을 소탕하는 것쯤이야 못할 것도 없겠지요. 어쩌면 여태껏 드러난 적이 거의 없는 놈들의 머리까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럼 왜.."


반대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것일까.

막 입밖으로 내뱉어지기 시작한 바이올렛의 말을 중간에 가로챘다.

"그런데 놈들이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해주기만 할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을 거다.

테러까지 하는 놈들이 이제와서 비폭력주의를 제창할리도 없으니까.


바보가 아니고서야 잡히게 되면 어차피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테니 분명 극렬하게 저항할 거다.

놈들 입장에서는 저항하다 칼에 맞아서 죽으나 끌려가서 고문을 받다가 죽으나 그게 그거일테니까.


'아니지..'

사교도 놈들의 논리회로가 하나같이 맛탱이가 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순교라는 명목으로 저항하다  맞고 죽는 쪽을 선호할 가능성이 컸다.

그리되면?

그때부터 시작되는 거다.


서로간의 자원을 갈아넣는 치킨게임이 말이다.


그러면서 갈려나가는 '자원' 중에는 당연히 소탕 작전에 투입되는 이들의 목숨또한 포함되어 있겠지.


물론, 결국 승리를 차지하는 쪽은 동맹 쪽이  것이다.

놈들이 아무리 일개 사이비 집단치고는 유서깊은 역사를 지닌 곳이라해도 이쪽은 국가와 그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 집단이 모여 만든 연맹체니까.

이대로 가면 승산이 없다는  사교도 놈들이라고 해서 모를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다.


따지고보면 그 누구보다 생존에 민감한 놈들이 사교도 놈들이니까. 그런만큼 자신들의 미래가 갓 자대배치 받은 이등병마냥 깜깜하다는 것 정도는 진작에 인지했을 것이고, 당연히 그 어두컴컴한 미래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컷 뇌를 쥐어짜고 있겠지.


허나 그 방법을 마련하는  결코 쉽지는 않을 거다. 설령 저쪽에 하늘이 내린 책사가 단체로 포진해 있다고 해도 그럴테지.

그만큼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그건 왕국 연합 측이 놈들에게 홀라당 넘어간 상태라 가정해도 그러했다.

그 어마어마한 차이를 뒤집기 위해선?

방법은 사실상  하나 뿐이었다.


도박수.


혹은 영혼의 한타라 부르는 그것, 그것을 시도해올 가능성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들의 명운을 놓고 도박을 하는 미친 짓거리를 하겠냐만은..


'이미 한 번 성공한  있으니까.'


 번은 못하겠냐고 생각할테지.


그렇다면 놈들은 어떤 식으로 영혼의 한타를 걸어올까?

그야 안 봐도 뻔했다.


이쪽의 수뇌부부터 노리고 보겠지.

그것만큼 성공했을 때 효과적인 게 또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러한 부분을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서 바이올렛을 비롯한 이들에게 설명했다.

이대로 가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명이 목표가 될 것이다.

그런 뉘앙스를 내포한  발언에 자리의 분위기가 자연스레 묵직하게 변했다.

"이번에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슬며시 어깨를 짓누르는 그 분위기를 느끼면서 얼굴 위로 쓴웃음을 띄워보였다.

"아무리 열심히 대비를 한들.. 막아내는 입장에서는 한 번이라도 뚫려버리게 되면 그게 너무나도 치명적으로 돌아오더군요."

내 발언에서 뭔가를 느낀 것일까.


여태껏 잠자코 침묵하고 있던 바이올라가 움찔하고 몸을 떨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만약 그녀가 당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하다못해 의식이라도 잃지 않았다면?

내가 그렇게까지 무리를  일도 없었을 거다.

어쩌면 내게서 건네받은 약을 통해 습격으로 입은 상처를 말끔히 치료한 바이올라와 협력하여 그 시커먼 놈을 빠르게 치워버린 다음 다른 곳에까지 도움의 손길을 내밀게 되었을지도 모르지.


조심스레 그 점을 언급하며 걱정스러운 내 심정을 얼굴 위로 내비췄다.


만약 사교도 놈들의 도박수가 먹혀들 경우 우리가 입게될 치명적인 피해는  자리에 모인 이들의 목숨이 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나로서는 그 혹시 모를 가능성이 너무나도 우려가 된다고 말을 하니  그래도 묵직했던 분위기가 한층 더 가라앉는 걸 느낄  있었다.


마치 누군가  어깨 위에다가 돌이라도 올려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무거운 침묵이 우리들 사이를 가로질렀다.

그 분위기를 느끼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 노림수가 제대로 먹혀든 듯 했으니까.


물론, 혹시 모를 가능성이 너무나도 걱정이 된다고 말했던 건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다만 그것이 겉으로 내비쳤던 것만큼 크지는 않았다.


이번에 당한 게 있는만큼 동맹과 관련된 주요 인물들의 경호 수준이 크게 상승할게 분명한데 사교도 놈들이 그걸 뚫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설령 뚫어낸다 하더라도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이들처럼 최상위 수뇌부에 속한 이들이 아니라 애매한 이들이 될 가능성이 컸고.

그럼에도 방금처럼 과할 정도의 우려를 내비췄던 건.. 당연히 내게 있어서 최악의 상황만큼은 면하기 위함이었다.


이대로 삼국동맹, 아니 사국동맹이 성사되도록 내버려두면 십중에 팔내지 구의 확률로 리파와 재회하게 될텐데..


'어우..'


나로서는 그 상황이 상상하기 조차 싫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리되면 내가 초원을 탈출하며 꾸몄던 온갖 연출들이 사실은 내 손에서 탄생한 거짓이었다는게 드러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리되는 것만큼은 막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리했던 것인데..

'효과가 있는 건가?'


쉬이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이올렛을 비롯해서 자리에 모여있는 이들의 표정을 보니 먹힌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나름 초조하게 바이올렛이나 레이시아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대가  걱정하고 있는지는 잘 알겠어."


모여앉은 이들의 얼굴을 한 차례 쭉 훑어본 바이올렛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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