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95)화 (294/366)



〈 29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성녀 시점****

콩닥콩닥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 느낌을 뭐라 표현하면 좋을까.

확실한  난생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라는 것이었다.


꿀꺽-


어느새 입 안 가득 차오른 침을 조심스레 삼켰다.

성녀의 위치에 있다 해서 성적인 걸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알  다 알았다. 다만, 여태껏 이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

자신에게도 욕구와 욕망은 존재했다.


다만 여태껏 그걸 억눌러왔을 뿐이다.


여신의 대행자인 자신이 방만하게 행동하면 여신께 폐가 될 뿐이니까.


그래서 억누를  있는 만큼 억눌렀다.


그러다가 이따금씩 참기 힘들 정도로 욕구가 치밀 때면 신성력의 힘을 빌렸다.

손에 신성력을 듬뿍 두른  스스로의 머리를 주무르다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욕구가 싹 가라앉곤 했으니까.

늘 그렇게 참아왔는데..


단 한 사람에게만이라고는 하지만 더이상 참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허탈한  하면서도 몸 안쪽에서부터 뭔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다고 해야할까.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듯한  현상에 문득 두려움이 왈칵 치솟았다.


자신이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


황급히 몸을 일으켰던 건 그 때문이었다.

왠지 여기 더 있으면 안 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몸을 일으켰던 것인데..


깜빡해버렸다.

바로 조금 전이 신성력을 이안이라는 사내의  안에다가 전부 털어넣은 상태라는 걸.

 때문일까.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현기증이 일었다.

허나 균형을 잃고 쓰러질 정도는 분명 아니었다.

-지금이다! 그대로 쓰러지거라!


그럼에도 어지러운  하며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던 건.. 그분께서 그것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분의 바램에 따라 우연을 가장하여 그와 몸을 포개게  순간.

그제서야 깨달았다.

바로 조금 전까지 느꼈던 건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걸.

가녀린  하면서도 남자의 것임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는 은근히 탄탄한 육체가 몸에 와서 닿은 순간 지식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것들이 온갖 망상이 되어 머릿속을 내달렸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빌만하면 새로운 내용의 망상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니까.

온통 살색 뿐인 그 풍경 속에서 자신은 이안이라는 사내의  위에 올라타 천박하게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그가 힘들다며 애원하든 말든 한껏 들어올린 엉덩이를 힘껏 내리찍어 그의 물건을 삼키는 자신의 모습에서 세계의 구원자를 잉태해야만 한다는 의무감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욕망에 취한 인간이 보일 법한 정욕만이 가득할 뿐.

그의 위에 쓰러진 채 옴짝달싹 못했던 건 그래서였다.


그만큼 두려웠다.


지금은 상상에 불과한 그 광경이 현실로 변해버릴까봐.


그래서 얼른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엎어진채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었는데..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성녀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듣자마자 기억해냈다.

그 목소리가 디아나라는 여성의 것이라는 걸.

그리고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디아나라는 여성은 이안과 상당히 밀접한 사이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번거로움까지 감수해가며 매일같이 병문안을 올 이유가 없으니까.


심지어 하루에 한 번이 아니라 두세 번 들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떠올린 탓이었을 거다.


바로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온갖 난잡한 망상들이 그대로 까발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건.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끝을 모르고 폭주하던 온갖 망상들 때문에 안 그래도 뜨끈뜨끈하던 얼굴이 이제는 숫제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동시에 눈앞이 팽글팽글 도는 듯 헀다.

이제는 정말로 일어서야 한다고 속으로 되뇌이기까지 해놓고서 꼼짝도 못했던 건 그 탓이 컸다.

왠지 모르게 지금 몸을 일으키면 그대로 다시 엎어질  같았으니까.

그랬는데..

"조심하셔야죠."


그 말과 함께 앞으로 엎어져있던 몸이 이쪽의 의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번쩍 들어올려졌다.

그리고 나서야 볼 수 있었다.

웃고 있으나 웃고 있는 게 아닌 디아나의 얼굴을.

그 얼굴을 본 순간 깨달았다.

자리를 비워줘야할 때라는 걸.


동시에 안도했다.

평소에 귀찮게만 여겼던 베일이 없었다면 수치심을 비롯한 이런저런 감정들로 새빨갛게 변한 얼굴을 꼼짝없이 들키고 말았을테니까.


그렇게 이안이라는 사내에게 내어준 방을 빠져나왔다.


왠지 모르게..


 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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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났다고 기뻐해주는 건 고마운데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생각인걸까.

디아나의 포옹이 싫다거나 부담스럽다는  아니다.

다만..

'음..'

하도 오래 끌어안겨 있었더니 슬슬 좀 숨이 막혔다.


혹시 아까 목격한 현장의 복수를 이런 식으로 하는 걸까.


이만하면 힘이 빠질 법도 한데 어째 내 몸을 끌어안은 디아나의 팔은 힘이 빠지기는 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힘을 더해가고 있었다.


조금씩 숨이 막히기 시작한 것도 사실 그 탓이 컸다.

아무튼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언제까지고 다키마쿠라 신세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조심스레 손을 들어올려 디아나의 어깨를 두어번 정도 두들겼다.

어쩌면 몇   두들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두 번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다.


 손짓 속에 담긴 뜻을 알아준 것인지 내 몸을 감싸고 있던 그녀의 두 팔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끌어안은 자세만큼은 여전했다.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날  끌어안고 있던 디아나가 포옹을 풀자마자 날 향해 던진 건..

"밥은?"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을 듣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여기서 내가 아직 안 먹었다고 답을 한다면 어떻게 할 생각인걸까 하고.

설마 직접 만들어주기라도 할 생각인걸까.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은 잠시 뒷전으로 미뤄놓기로 했다.


"네, 성녀님께서 챙겨주셨어요."


"그래, 그렇구나. 목은?  말라?"

그 말을 듣고 보니 살짝이지만 목이 마르긴 했다.


그에 솔직히 답을 하니 디아나가 침대 옆에 달려있던 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렇게 등장한 시녀를 상대로 물  잔을 부탁한 그녀가 이윽고 전달된 그것을  향해 내밀었다.

디아나를 향해 손을 뻗었던 건 그걸 받아들기 위함이었다.


헌데 손을 뻗기 무섭게  앞까지 들이밀어졌던 것이 언제 그랬냐는  다시 물러갔다.


"아니다. 그냥 그대로 있어. 내가 해줄테니까."

그녀를 향해 내뻗는 손이 살짝 떨리긴 했는데 그녀의 눈에는 그게 너무나도 불안하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저리도 단호하게 말하는 걸 보면.


어차피 직접 마시나 남의 도움을 받아서 마시나 그게 그거였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가 지시하는대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컵 안에 가득 차있던 것이 바닥을 보일 때까지 내 갈증 해소에 협력해준 그녀가 텅 비어버린 컵을 내려놓고는 그것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조심스레 내 손 위에다가 포갰다.

바로 조금 전까지 물컵을 들고 있었던 탓일까.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듯한 그녀의 손길은 따뜻하다기 보다는 서늘했다.

그렇게 디아나는 한참동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뭔가를 참고 있는 걸까. 꾹 다물어져있던 분홍빛 입술이 이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괜찮을 거다."

 말하는 걸까. 내가 속으로 그런 의문을 품든 말든 디아나는 날 위로한다는 역할에 충실했다.

몸 상태 때문에 내가 많이 상심했을 거라고 그리 판단한 것일까?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보이며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볼을 조심스레 건드리며 상대방을 안심시키기 위한 목적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괜찮으니까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솔직히 상심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이 정도면 몸이 망가진 수준 정도가 아니라 여태껏 숨이 붙어있는게 용한 수준이었으니까. 그럴 수 있었던  아마 내가 위험할 때마다 아까처럼 성녀가 제 신성력을 아낌없이 퍼부어 준 덕분일 것이다.

만약 그게 아니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하루도 못 넘기고 그대로 명줄이 끊어지지 않았을까.

분명 그랬을 거다.

그렇기에 이렇게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대충 그런 뉘앙스로 답을 한 것인데 그게 디아나의 귀에는 자길 안심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괜찮을 척을 하는 것처럼 들리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분홍빛 입술이 이지러지더니 그녀의 눈썹이 순간 아래로 축 처졌다. 그 상태로 눈썹 끝부분을 파르르 떨어대던 디아나의 입에서 이윽고 흘러나온 건 울컥하고 솟구치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한 그런 음성이었다.

"분명 방법이 있을 거다. 방법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금의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되뇌이는 그녀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입을 열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시고요."


그리 말하고 나니 뭐랄까..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여주인공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성별이 다르다는 점만 빼면 지금 내 상황이  그렇긴 했으니까.


그렇게 위로를 받는 대신 역으로 디아나를 위로하고 있으려니 한 발 늦게 내 소식을 접한 이들이 줄지어 방으로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러니까 디아나 다음으로  병실을 찾아온  말할 것도 없이 앨리스였다.


그리고 카트린느와 클레어, 바이올렛과 바이올라가  뒤를 이었다.


마지막을 차지한 건 레이시아였고.

불과 몇 분만에 복작복작하게 변해버린 방 안을 보고 있으니  많이도 꼬시고 다녔다 싶더라.

아무튼 그렇게 디아나의 뒤를 이어 찾아온 이들 중에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건 다름아닌 카트린느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던 걸까.


   만에 보는 폐인이 다 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산발이긴 해도 윤기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잃지 않았던 주홍빛 머리칼은 퍼석퍼석하게 변해있었고, 원래도 심한 편이던 다크서클은 한층 더 깊어진 채 그녀의  눈을 퀭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한채 병실로 들이닥친 카트린느가 그대로 날 덮쳤고, 그 다음은 뭐..

말 그대로 펑펑 울더라.


덕분에 입고 있던 옷의 앞섬이 축축하게 변해버린 건 덤이었다.

물론, 카트린느의 행패(?)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라며 병실이 떠나갈 기세로 울어제끼던 것도 잠시 기력이 다했는지 날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탈진해버렸으니까.

피골이 상접한 채 눈물하고 콧물로 범벅이 되어있는 카트린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그녀가 환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뭐, 덕분에..'


무슨 초상이라도 난 것마냥 어두침침했던 분위기가 살짝이지만 밝아지긴 했다.

표정을 보니 다들 울고 싶은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카트린느가 하도 서럽게 울어대서 나오려던 눈물도  들어가버린  같더라.

곤히 잠든 카트린느가 바로 옆에 있는데 거기서 이야기를 나누기엔 좀 그랬기에 일단은 자리부터 옮기기로 했다.


기절하다시피한 카트린느에게 침대를 내어주고,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의 특권을 십분 살려 줄곧 내 옆자리를 꿰차고 있던 디아나의 도움을 받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침대 반대편에 놓여있던 응접용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나니  자리에 모인 이들이 대충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거리낄 게 없는 이들과 거리낄 게 있는 이들이라고 해야할까.

전자에는 디아나와 앨리스, 바이올렛이 속해 있었고 후자에 속한 건..


말할 것도 없이 바이올라와 레이시아였다.

아마 카트린느가 의식을 잃지 않았다면 그녀또한 저쪽 소속이었겠지.


진작에  자리씩들을 꿰찬 앞의 세 명과는 달리 둘은 벽쪽에 찰싹 달라붙어 오도가도 못 하고 있었다.

깨어났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일단 달려오긴 했는데 지은 죄(?)가 있다보니 내 눈치가 보이는 걸까.


'저 둘을 어쩐다..'

잠시 고민하다가 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얼굴 위에 띄운 채 둘을 향해서 손짓했다.

"안 앉으실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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