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생각할수록 신기하다는 투로 내뱉어진 성녀의 말을 들은 순간, 등골을 따라 내달린 그건 분명 식은땀이었을 것이다.
왕국 남부의 유목민족이라고 하니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었으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나는 얼굴 자체가 하나밖에 없었던 것이었지만.
그렇게 리파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친 순간 내가 그녀를 상대로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또한 자연스레 재생되기 시작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대충 날 차지하고 싶거든 강해져서 돌아오라는 식으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설마..?'
진짜로?
물론, 그 대족장이니 뭐니 하는 이가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와 동일인이 아닐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하긴 했다. 뭣보다 리파는 그.. 나이가 좀 많이 젊지 않은가?
대족장이라는 늙수그레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칭호는 야생마와 같은 생생함을 자랑하는 그녀하고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지만 자꾸만 불안한 예감을 지울 수가 없는 건.. 그만큼 상황하고 타이밍이 공교롭기 때문이겠지.
내 활약과 함께 내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 대륙에 널리 퍼진 이 타이밍에 그쪽에서 동맹 제안이 들어온다? 초원 밖의 일에는 단 한 번도 개입한 적 없다는 전통 비스무리한 것까지 깨뜨려 가면서?
그런 내 속내를 아는 지 모르는 지 성녀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들어보니까 그쪽도 알게 모르게 피해가 상당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저나 바이올라 양은 그쪽의 참가 의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다름아닌 레이시아가 반대하고 나섰단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그녀라면 남부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 잊지 않았을테니까.
살짝 의외였던 건 다름아닌 바이올라가 찬성하고 나섰다는 부분이었다.
전에 내게 와서 말했던 것들을 떠올려보면 내가 그쪽하고 어떤 식으로 엮였는지 모르지 않을텐데 그럼에도 그쪽의 참가를 찬성하다니.
케케묵은 원한보다는 일단 최신의 것부터 어찌하는 게 먼저라 판단한 걸까.
'하긴..'
은근히 효율을 따지는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만 했다.
왕국 남부의 유목민족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사교의 잔당들이 대초원을 경유해서 왕국 연합 측 영토로 도망치는 걸 효율적으로 차단할 수 있을테니까. 초원에서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직 그쪽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는지 어쨌는지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 점을 고려하면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컸다.
찬성 두 명에 반대 한 명인 시점에서 일단 머릿수에서부터 밀릴 뿐더러 반대논리를 펼치는데 써먹을 논리도 마땅치 않았을테니까.
그에 비해 찬성 측은 내세울 논리가 한두 가지가 아닌만큼 아무리 레이시아라해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밀려버렸을 거다.
"뭐, 지금은 결국 그쪽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결정이 난 상태지만요."
아니나 다를까 생각이 그곳에 다다르기 무섭게 성녀의 입에서 비슷한 뉘앙스의 말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율을 위해서 제안을 전해온 대족장이라는 이가 이 땅에 방문할 예정이란다.
그 말까지 들은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도망칠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대족장이라는 작자가 리파가 아닐 가능성이 너무나도 적었다.
대족장쯤되면 사실상 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인데 아무리 먼저 제안을 한 처지라 해도 홈그라운드라 할 수 있는 대초원을 벗어나 이 멀리 떨어진 교국까지 직접 방문한다?
그것도 사실상 적국이나 다름없는 왕국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위험하기 그지없는 일까지 벌여가면서?
상식적인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런 짓을 시도하려 든다는 건.. 둘 중에 하나겠지.
그 대족장이라는 작자가 필요 이상으로 오만한 성정이거나..
혹은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던가.
그게 뭘까.
알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리파하고 헤어진지 거의 1년이 다 되어가니까.
그동안 딱히 교류같은 것도 없었고 말이다.
설마 내 얼굴을 보기 위해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릿속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있으니 걱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괜찮아요? 혹시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는 건.."
그런 거라면 바로 조치를 취해주겠다는 듯 어느새 들어올려진 성녀의 손이 예의 그 말간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 아뇨. 괜찮습니다."
물론, 사양했다.
그랬더니 왠지 모르게 아쉬워하더라.
그렇게 궁금해하지 않았던 정보들까지 싸그리 모아서 내게 전해준 성녀가 묘하게 몸을 움찔대기 시작했다.
대화를 더 이어나가고 싶은데 마땅한 화제가 떠오르질 않아서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두터운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저 베일부터 어떻게 해야겠는데..'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길어지는 침묵때문에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성녀를 구원해주기 위해 그녀에게 던질만한 질문을 머릿속으로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때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고, 그것을 그대로 입에 담았다.
"그런데 혹시 제 몸은.."
내 몸이 어쩌다가 이렇게 애매한 몰골이 되어버렸느냐.
몸이 이도저도 아닌 상태라는 걸 깨달은 직후부터 줄곧 품고 있었던 의문을 성녀를 향해 내비치니 그게 그리도 반가웠는지 베일로 가려져있는 성녀의 입에서 '아!'하고 탄성이 새어나왔다.
"그게 그러니까.."
이윽고 듣게 된 것은 시간이 지나도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날 치료하기 위해 행해졌던 갖가지 시도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개중에는 카트린느와 관련된 것또한 존재했다.
시시각각 죽음에 가까워지는 내 몸을 어떻게든 하기 위해 카트린느는 그야말로 온갖 시도들을 다 했다고 한다.
허나 뭔가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기에는 내 몸에 허락된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고,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다가 나온 결론이 내 원래 몸은 유지비가 너무 크니 일단 그걸로 빠져나가는 거라도 좀 줄여보자는 거였다는 것.
다만 꼬맹이 모드일 때처럼 극단적으로 줄여버리게 되면 역으로 몸이 버티질 못하게 될테니 타협을 본 것이 지금의 사이즈였다고.
"정말 놀라운 광경이었죠."
그 날 자신이 봤던 광경에 대해 말하는 성녀의 목소리는 아련한 느낌을 물씬 풍겼다. 그렇겠지. 살면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은 분명 아니었을테니.
"그리고 이렇게 깨어난 걸 보면.. 카트린느 양이 취한 조치가 맞았다는 거겠죠."
그러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기뻐할 거라고 말을 하는 걸 보면 내가 쓰러져있는 동안 카트린느와 적지않은 친분을 쌓은 듯 했다. 내 회복이라는 공통의 목표 덕분에 그 새 친해진 걸까.
"성녀님께서 성심성의껏 돌봐주신 덕분이죠."
거기에 대고 한 마디를 덧붙이니 성녀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쳐댔다.
"다들 최선을 다한 결과죠. 다른 분들도 꾸준히 병문안을 와주셨거든요."
이윽고 성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하나같이 익숙한 이름들 뿐이었다.
디아나부터 시작해서 앨리스와 레이시아, 카트린느, 클레어, 그리고 바이올렛과 바이올라까지.
"진.. 양도 도와줬구요."
"그렇습니까?"
그건 좀 의외였다.
내가 진이었다면 도와주는대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뒤지도록 그대로 방치해뒀을테니까.
'흐음..'
대체 의도가 뭘까.
그 부분을 알 수가 없으니 감사함을 느끼려 해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대놓고 이쪽을 적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면 걱정은 될지언정 이렇게까지 답답할 일은 없었을텐데.
맘 같아서는 난죽택이라도 시전해서 그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날라버리고 싶었지만 전생의 업보에 대해서 알게 된 지금은 그 방법을 시도하는 게 굉장히 꺼려졌다.
그러다가 그 정체모를 년이 갑자기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날에는.. 좋은 꼴 보기는 힘들테니까.
주시당한 상태이니만큼 나중이라면 몰라도 당장은 사려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한시라도 빨리 진의 의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든 얼굴에 철판을 깔고 정면돌파를 택하든 할 수 있을테니까.
여전히 내 앞에서 버티고 있는 성녀와 친분을 다질 필요가 있겠다는 결론을 내린 것도 사실상 그것의 연장선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때문에 이렇게 계속.."
앉아있어도 되냐고 성녀를 향해 우려 비슷한 것을 내비췄던 것도 그래서였고.
그랬더니 돌아온 건 상당히 격렬한 반응이었다.
무슨 그런 말을 하냐는 것처럼 순간 제자리에서 펄쩍 뛴 그녀가 날 향해 말했다.
"교국을 위기에서 구해준 영웅을 치료하는 일인데 당연히 시간을 내야죠."
영웅이라니.
테러 당시에 있었던 일들이 세간에 알려진 덕분에 그런 취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정말 몇 번을 들어도 적응이 안 되는 단어였다.
들을 때마다 얼굴이 미친듯이 근질거렸으니까.
몇 번 들은 것만으로도 이 정도인데 주인공이라는 놈들은 이 낯간지러운 느낌을 대체 어떻게 견딘 걸까.
머저리들이라 생각했던 이들이 실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철면피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동안 하고 있으려니 몸에서 힘이라는 것이 쭉 빠져나가며 대신 탈력감이라는 것이 그 자리를 메꾸기 시작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허윽.."
마치 오랫동안 사정을 참았다가 한 번에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근육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던 것들이 일제히 쭉 빠져나가는 느낌은 견디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더니..
"아, 이런.."
성녀가 말갛게 빛나기 시작한 손을 곧장 내 몸에 가져다댔다.
그 덕분이었다.
침대에 드러누워서 꼴사납게 허우적대는 꼴만큼은 면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두 눈을 버젓이 뜨고 있는 상황에서 가슴 쪽에 대놓고 손을 대긴 좀 그랬는지 지름길이나 다름없는 가슴팍 쪽을 피해 어깨 쪽으로 뻗어나간 성녀의 손이 그곳을 움켜쥔 순간, 맞닿은 곳을 통해 뭔가가 흘러들어오기 시작했고 덕분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축축 늘어지기만 하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힘을 되찾았다.
그 때 느낀 기분은 뭐라고 해야할까..
솔직히 좀 끔찍했다.
꼭 마치 건전지로 움직이는 장난감 로봇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해야할게 천지인데 몸 상태부터가 심상치 않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런 내 속을 아는 지 모르는 지 내 어깨를 꼬옥하고 움켜쥔채 열심히 신성력을 불어넣던 성녀가 이내 어깨를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이제 좀 괜찮을 거에요."
역시 신의 대행자, 성녀라고 해야할까.
척봐도 어마어마한 양을 뿜어냈는데 목소리에서 지친 기색이라고는 단 한 점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읏.."
그럼 이제 쉬라고 말하는 것처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던 그녀가 몸을 휘청거렸다.
문제는 휘청거린 타이밍도 그렇고 몸짓도 그렇고 어색하기 그지없다는 것 정도?
덕분에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게 연기라는 걸 말이다.
설마 뭐, 내가 자길 잡아주길 원하는 걸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서 당황한 듯한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올리며 그녀를 향해 황급히 손을 뻗는 척을 했다.
정확한 목적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녀와 어느 정도 친분을 쌓아야만 하는 상황인만큼 그녀의 장단에 맞춰줘서 나쁠 건 없을 듯 했으니까.
다만 딱 하나 간과한 점이 있다면.. 몸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 골수까지 치밀었던 독기의 영향때문인지 아니면 근 한 달동안 침대 위에 누워있기만 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몸은 숟가락 하나나 제대로 들어올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허약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성인 여성을 받아낸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할 리 없었다.
당연히 성녀의 몸이 허물어지기 무섭게 거기에 깔린 내 몸도 덩달아 허물어졌고..
펑퍼짐한 회색빛 법복에 가려져 그 실체를 숨기고 있던 것이 그대로 내 얼굴을 찍어눌렀다.
역시 성녀라고 해야할까.
느껴지는 볼륨감의 수준 자체가 달랐다.
이 정도면 최소 레이시아 급은 되지 않을까.
라고 속으로 되뇌이면서 뜻밖의 사고에 당황한 척 그녀의 밑에 깔려서 허우적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성녀님?"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한결 낮은, 그렇지만 분명히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가로질렀다.
꼭 마치 연인의 바람현장을 목격한 사람마냥 싸늘하게 변한 그 목소리에 내 몸을 깔아뭉개고 있던 성녀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진짜 그런 현장을 적발당하기라도 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