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이것 참..'
하필이면 질문을 던지려던 찰나에 터져나온 꼬르륵 소리 때문에 그 순서는 잠시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한 번 배고픔을 자각하고 나니 뱃가죽과 등가죽이 서로 끌어안기라도 한 것마냥 극심한 허기가 몰려왔으니까.
그리하야 내 앞으로 등장한 건..
"우선 이거라도 들어요. 부족하면 얼마든지 더 가져다줄테니 말하고요."
꽤나 급하게 끓인 듯한 말간 스프였다.
건더기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게 어찌보면 콘소메같기도 했다.
그걸 본 순간 직감했다.
내가 꽤나 오랫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녀의 씀씀이가 그만큼 검소하다는 거겠지.
스프에 그 흔한 고깃덩어리 하나 넣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뭐, 간소하기 그지없는 생김새와는 별개로 냄새 하나만큼은 죽였다.
뜨끈한 김을 피워올리는 스프의 향기가 콧속으로 파고들어온 순간, 안 그래도 난동을 부리고 있던 위장이 거기에 반응해 미친듯이 날뛰기 시작했으니까.
해서 다른 건 다 집어치우고 일단 배부터 채우려고 숟가락을 집어들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안되겠어요."
의미를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바로 조금 전까지 스프 그릇 옆에 놓여져있던 숟가락이 그대로 증발했다.
그에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너무나도 당당하게 내 몫의 숟가락을 들고 있는 성녀의 모습이었다.
설마 이제와서 내게 스프를 내어주는게 아까워지기라도 한 걸까.
상식적으로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뭐가 안 되겠다는 걸까.
맥아리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 성대를 대신해서 위장이 가열차게 항의를 표출하는 걸 느끼며 성녀를 향해 항의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랬더니..
"먹여줄게요."
"..예?"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발언이 베일로 가려져있는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걸까.
표정이라도 확인할 수 있었다면 나름대로 추측이라는 걸 해볼 수 있었겠지만 암만 그녀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던져봐도 눈에 들어오는 거라고는 회색빛 천으로 된 베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러한 발언을 했는지를.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을 그녀를 향해 던졌던 건 다름아닌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하면 뭐라도 반응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다.
"걱정이 되서요."
그 말과 함께 성녀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마치 시선을 다른 곳으로 향한 것같은 그 움직임에 나름대로 그것을 추격해보니 그녀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내 손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에 덩달아 그쪽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눈에 띈 것은 무슨 금단증상이라도 온 것마냥 달달달달 떨리고 있는 누군가의 손이었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대며 반응하는 걸 보면 분명 내 손이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리 낯설게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크기가 달랐다.
지금 내 눈에 비춰지고 있는 크기는 꼬맹이 모드일 때도, 원래 몸일 때도, 하다못해 바이올라가 건네준 걸 들이키고 살짝 성장했을 때도 본적이 없는 크기였다.
확실한 건 원래 몸일 때보다는 줄어든 상태라는 점이었고.
그렇기에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절해있는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리 애매한 크기가 되었나 싶었으니까.
그리고 마침 내 앞에는 그런 의문들을 해소시켜줄 수 있을만한 이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자기가 먹여주겠다는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펼치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음, 하긴..'
이리 달달 떨리는 손을 보면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게 이해가 되기도 하고..
막말로 손이 이렇게 달달달달 떨리는데 혼자 먹으라고 내버려뒀다가 흘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쓸데없이 일거리만 늘어날테니까.
그리고 흘리는 수준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지 대차게 엎기라도 하는 날에는 안 그래도 안 좋은 몸에 치료할 상처만 늘게될테니 당연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겠지.
"민망한 건 알겠지만 부디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뭣보다 성녀 씩이나 되는 위치에 있는 이가 저리도 간곡하게 부탁을 해오니 어쩌겠는가?
알겠다고 해야지.
아까 성녀에게 신성력을 주입받았을 때 느껴졌던 감각을 떠올려보면 앞으로도 그녀에게 신세를 지게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대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진이라는 대안이 존재하긴 하니까. 비록 그 기량이 전회차에서 보여주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할테지만 그래도 단순하게 신성력을 주입하는 것쯤이야 그녀에게는 일도 아닐 터.
그렇지만 그쪽은..
'어째 찝찝하단 말이지.'
솔직히 좀 그랬다.
진이 전회차의 그 성녀가 맞다면 내게 원한이 없을 수가 없으니까.
막말로 처음 몇 번은 협조해주는 척 하다가 성녀의 관심이 내게서 멀어졌다 싶을 때 갑자기 돌아서기라도 하면 결국 곤란해지는 건 나였다.
그렇기에 그쪽을 의지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쪽이 더 나아보였다.
어찌되었건 내가 사건 당일날 해준 게 있으니 교국으로서는 내게 어느 정도 부채감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증거?
의식을 회복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게 성녀인데 굳이 그런 게 필요할까?
'그래, 차라리 이쪽이 나아.'
왜 먹여주기를 고집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의도도 본심도 알 수 없는 진보다야 차라리 이쪽이 백배천배 낫겠지.
다만 딱 하나 찝찝한 구석이 있다면 성녀가 진이 언급했던 나와 반드시 접촉시켜야만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인데..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바이올라나 바이올렛의 근처에서 얼쩡거리는 모습을 보였을 때 진이 이렇다할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던 점을 떠올려보면 진의 언급 속에 등장한 그 여성은 눈앞에 있는 여성일 가능성이 큰데 그렇다면 성녀와 가까이 지내는 모습을 보일 경우 뭐라도 반응이 있을테니까.
그러다가 일이 잘 풀리면 진의 꿍꿍이 속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고.
"아,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민망하다는 듯 말을 더듬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수락의 의사를 밝혔던 건 다 그걸 위해서였다.
일단 말을 던져놓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듯 하더니만 내심 내가 수락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 무섭게 이번에는 스프가 담긴 그릇을 압수당했다.
그렇게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앞에 놓여져있던 것을 쟁반 째로 앗아간 성녀가 진작에 압수했던 숟가락을 그 안에다가 담갔다.
그리고는 스프를 살짝 떠서 김을 풀풀 피워올리는 그것을..
"후- 후우-"
제 입 근처로 가져가 식히기 시작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성녀가 본인이 베일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는 것 정도?
덕분에 그녀의 입에서 바람 부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던 베일이 바람에 휘날리는 커튼마냥 앞뒤로 나부꼈고, 그렇게 흔들린 베일의 끝자락이 숟가락을 정확하게 직격- 숟가락 안에 든 것이 그대로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그 사방 중에는 당연히 내가 입고 있는 환자복과 내 얼굴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
정확히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성녀라는 직위에 앉아있는 것 치고는 조금 많이 안타까운 타입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눈치챘던게.
분명 바로 조금 전까지는 이상한데서 고집을 부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이상의 성녀처럼 보이던 이가 어느새 허당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성녀는 말 그대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덕분에 어색하기 그지없는 침묵만이 우리 둘 사이로 흐르고 있던 가운데 늪이나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건져낸 건 아까 전부터 열심히 물건을 날라다주던 시녀로 보이는 이였다.
분명 바로 조금 전까지 벽쪽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우리 근처까지 다가온 건지 그녀가 어디선가 꺼내든 깨끗해보이는 천을 성녀의 손 위에다가 올려놓았다.
물론, 그 전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스프 그릇과 숟가락은 어느새 시녀인 그녀의 손으로 옮겨간지 오래였다.
그렇게 약간의 헤프닝이 있기는 했지만 훌륭하기 짝이 없는 시녀의 대처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웃긴 건 그런 사고를 쳤음에도 불구하고 성녀는 끝끝내 먹여주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꼭 마치 누군가에게 그리하라고 명령이라도 하달받은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이 세상에 그녀를 상대로 명령을 내릴 수 있을만한 존재가 단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설마..?'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됐다.
정말 그런 걸 명령받은 거라면 여신이라는 작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명령한 건가 싶었으니까.
혹시 제 수족이 곤란해하는 걸 보며 즐기는 취미같은 거라도 있는 것일까.
신이라는 것들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리면서 성녀가 퍼날라주는 스프를 부지런히 받아마셨다.
뭔가를 농축시켜놓은 것 같은 외관과는 다르게 스프에서는 꽤나 가벼운 맛이 났다.
그래도 깨어난 후로 처음하는 식사이니만큼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것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좀 아쉬웠다.
맛이 없냐면 그런 건 분명 아니었는데 혹시 모를 가능성을 대비해 간을 최소화했는지 자극적인 맛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으니까.
나는 묵직하고 짭쪼름한 맛을 원했는데 말이다.
그래도 텅 비어있던 몸에 뭐라도 좀 들어가니 극심한 허기 때문에 어지럽기까지 하던 몸이 그나마 나아지는 것 같긴 했다.
'살짝 부족한데..'
그렇지만 한 그릇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끝끝내 먹여주기를 고집하는 성녀의 태도가 은근히 부담스러웠을 뿐더러 왠지 모르게 여기서 더 들어가면 탈이 날 것 같았으니까.
뭣보다 미친듯이 기승을 부리던 허기를 약간이나마 달래주고 나니 이번에는 호기심이라는 놈이 날뛰기 시작했다.
부족하면 한 그릇 더 하지 않겠냐고 은근한 시선을 던져오던 성녀를 상대로 거절의 뜻을 밝혔던 건 그래서였다.
처음에는 좀 민망해하는 것 같더니만 이 짓도 하다보니 나름대로 재미를 느낄만한 구석같은게 있었던 걸까.
여전히 베일로 가려져있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성녀는 왠지 아쉬워하는 듯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차 등장한 시녀에 의해 벌려놓은 것들이 싸그리 정리되었고, 그리고 나서야 기다리고 기다렸던 질문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음.."
뭐부터 물어보면 좋을까.
내 딴에는 그게 고민이 되서 잠시 망설였던 것인데 날 상대하는 성녀의 눈에는 살짝 다르게 비춰졌던 모양이다.
"궁금한게 있다면 어려워하지 말고 물어도 됩니다. 그대는 교국의 은인이자 사교도들의 음모를 분쇄한 영웅이니까요."
그러니 부담가지지 말라는 듯 성녀가 조심스레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포개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것을 토닥이는데 하마터면 거기에 깜빡 넘어갈 뻔 했다. 그만큼 자연스러운 스킨십이었으니까.
내 손등 위로 포개진 성녀의 손이 순간 움찔거리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랬겠지.
'먹여주기를 고집하는 것도 그렇고..'
이렇게 기회를 틈타서 스킨십을 시도하는 것도 그렇고 의도하는 바가 뭘까.
오랜 시간 솔로로 지내다가 이렇게 치료를 빌미로 남자의 몸을 잔뜩 터치할 수 있게 되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억눌러왔던 정념들이 폭발하기라도 한 것일까.
가능성이야 충분했지만 솔직히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성녀쯤되면 신이라는 생물이 가진 독점욕이 얼마나 거대한지 이미 알고 있을테니까.
그런데 사실상 신의 것이나 다름없는 자신의 몸을 신의 입장에서는 하등생명체나 다름없는 피조물에게 공유해주려고 한다?
자살희망자가 아니고서야 그럴 리는 없겠지.
그렇다는 말은 성녀가 저러는 데에는 다 그녀가 모시는 여신의 허락이 있었다는 건데..
'흠..'
일단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당장은 더 급한 것들이 수두룩빽빽했으니까.
이를테면..
"그 혹시.. 제가 얼마나 쓰러져있었나요?"
바로 이런 것들이 말이다.
얼마나 쓰러져있었느냐.
사실 이건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상당히 중요했다.
얼마나 쓰러져있었는지를 알아야 이제 곧 소식을 전해듣고 찾아올 이들을 어떤 식으로 맞이할지 결정할 수 있을테니까.
해서 다른 건 집어치우고 그것부터 물어봤는데..
"음, 3주하고도 3일째일거에요."
어째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3주하고도 3일이라니.
그 말은 일주일만 더 기절해 있었으면 31일기준으로 한달을 꽉 채웠을 거란 소리 아닌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 공백기를 앞에 두고 벙찌고 있으려니 그때부터 심상치 않은 정보들이 성녀의 입을 통해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기 시작했다는 소식도 있었고..
"아, 그리고 사교도 잔당을 색출하기 위해 교국과 제국, 그리고 왕국 간의 삼국 동맹이 체결되기도 했죠."
"..."
"근데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참가 의사를 전해오는 바람에 발족식은 잠시 미뤄진 상태구요."
"생각치도 못했던 곳이라면.."
"그게.."
어딜까.
어디길래 저렇게 내 눈치를 보는 걸까.
왠지 모를 불안한 예감같은 게 몸을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라오는 걸 느끼고 있으니..
"유목민족들이요."
그것이 정확하게 적중해버렸다.
"네? 어디라고요?"
"정확히는 유목민족들이 세운 연합체라고 해야할까요.. 아무튼 그곳의 대족장이라는 이가 자신들도 한 팔 거들겠다면서 참가 의사를 전해왔지 뭐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