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2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느 성녀의 일기 2****
그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기할만한 게 있다면 역시.. 삼국동맹이 무사히 성사되었다는 것이겠죠.
괜히 장담을 했던 게 아니라는 듯 바이올렛 양은 무사히 본국인 제국으로부터 권한을 받아냈습니다.
그렇게 권한을 확보한 바이올렛 양, 그리고 레이시아 양과 함께 기타 자질구레한 조율을 이어나갔습니다.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바이올렛 양이 이미 많은 양보를 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조율해야하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요.
게다가 대체 뭣 때문인지는 몰라도 레이시아 양과 바이올렛 양은 서로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레이시아 양이 바이올렛 양을 향해 일방적으로 경계심을 표출했고, 처음에는 그걸 신경쓰지 않는 듯 하던 바이올렛 양도 그런 레이시아 양의 태도가 지속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대응이 나빠졌달까요.
덕분에 이런저런 사안의 조율 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서 오고가는 신경전또한 신경써야해서 꽤 골치가 아팠습니다.
아마 여신님께서 특별히 당부하신 베일이 아니었다면 틀림없이 표정을 들켰겠죠.
분명 그랬을 겁니다.
아무튼 그렇게 이유모를 치열한 신경전 속에서 간신히 조율을 끝마치고 공식적인 발표까지 무사히 끝냈는데..
문제는 거기서 생겼습니다.
생각치도 못한 제안이 들어왔거든요. 그것도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곳에서 말이에요.
덕분에 동맹 내의 분위기는 굉장히 뒤숭숭해졌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제안이 들어왔다는 사실이 전해진 순간, 레이시아 양은 물론 바이올렛 양의 표정또한 안 좋게 변했으니까요.
레이시아 양이야 충분히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바이올렛 양은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마음같아서는 질문이라도 던져보고 싶었지만 표정이 워낙 좋지 않아서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그게 최근에 벌어진 일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성녀, 셀레네가 딱 거기까지 적어내려간 순간이었다.
똑똑-
어쩐지 다급하게 느껴지는 노크 소리가 그녀가 자리하고 있던 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성역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은 그녀 본인을 제외하면 단 한 명뿐이었기에 셀레네는 노크 소리가 들려온 즉시 들여다보고 있던 노트를 닫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크 소리에서부터 다급함이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듯 했으니까.
설마 그 이안이라는 사내의 몸에 무언가 문제라도 생긴 걸까?
이를테면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던지...
'그럴 리가 없을텐데..'
밤 사이에 바닥나다시피한 생명력을 보충하기 위해 쓰러져있는 그의 몸에다가 신성력을 쏟아부었던 것이 바로 한 시간 전의 일이다.
그리고 나서 살짝 현기증이 몰려와서 휴식도 취할 겸 방으로 돌아와 일기를 쓰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렇기에 내심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몸만큼은 착실하게 노크 소리가 들려온 문쪽으로 향하게 했다.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요 며칠동안은 더 나빠지는 일이 없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긴 했지만 그게 사실 급격하게 나빠지기 위한 밑밥일수도 있지 않겠는가.
해서 곧바로 문을 향해 나아가 닫아놓았던 것을 열어젖히니 눈으로 들어온 건 평소답지 않게 조급한 표정을 하고 있는 사라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정말 무슨 일이라도 생긴 듯 했으니까.
그래선 안 된다.
그래서는.
그리되면 여신께서 직접 내려주신 사명을 영영 완수하지 못하게 될테니까.
"무슨 일입니까!"
해서 다급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져봤더니 돌아온 건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그.. 깨, 깨어났습니다!"
주어고 두서고 죄다 생략된채로 내뱉어진 말이었지만 그 말의 진의를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고 깨어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게 설마 지금 이 순간이 될 줄은 몰랐으니까.
여신께 중대한 사명을 받긴 했지만 솔직히 아직 마음의 준비는 되지 않은 상태였다. 여신께서 자신이 도와주겠노라고 분에 넘치는 조력까지 약조하시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랬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평생 남자라는 생물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갑자기 저 남자를 네 것으로 만들어 그와 동침하는 건 물론, 최종적으로는 그 남자의 아이까지 낳아야한다고 말을 한들.. 물론, 여신께 반드시 그리하겠노라고 대답하기는 했지만 그것하고 마음을 먹는 건 분명 별개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이안이라는 사내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 여유롭게 마음의 준비를 끝내놓고 마침내 그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여유롭게 그를 맞이하려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당혹스러움 때문일까.
베일에 가려진 얼굴이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끈거렸다.
-올라간 입꼬리나 좀 어떻게 하고 그리 말하거라. 내 딸아.
그렇게 당황해서 어버버하고 있던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따끔한 지적에 솔직히 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입이 찢어지겠구나.
뒤이어 울려퍼진 그 말에도 반박하지 못하고 침묵하고 있으려니..
-하긴.. 변한 모습이 꽤 네 취향에 걸맞는 모습이긴 했지.
연이어 날아온 사실이라는 이름의 묵직한 한 방이 그대로 몸을 후려쳤다.
허나 고통에 신음하고 있을 여유따윈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넋놓고 있어도 괜찮겠느냐? 저 말대로 깨어난 상태라면 지금이 가장 위험할텐데?
여태껏 들려왔던 것들을 다 합친 것보다 몇 배는 더 묵직한 것이 날아왔으니까.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그 말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님을 깨닫고는 사라와 함께 곧장 이안이라는 사내가 머물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덕분에 볼 수 있었다.
침대에 드러누운채 애꿏은 눈만 열심히 꿈뻑거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말이다.
그 순간 눈에 비춰진 광경은 말 그대로 비현실적이었다.
카트린느라는 이름의 여성이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면서 복용시킨 정체불명의 약 때문에 이안이라는 사내의 몸은 처음봤을 때보다 한결 줄어들어 있었다.
오밀조밀하게 들어찬 근육으로 구성되어 있던 강인해보이던 육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쪼그라들었고, 선이 굵다는 느낌을 주던 외모또한 갸날픈 느낌으로 변모했다.
쉽게 말해 소년과 청년의 경계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있는 외모로 변했다고 해야할까.
그리 되고 나서부터는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쉬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 한순간에 그리 변했다는 것도 충분히 놀랍긴 했지만, 그보다는 외모 탓이 컸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언젠가 꿈꾸었던 자신의 이상형과 꼭 닮은 모습이었으니까.
선이 얇아 중성적인 느낌을 주는 외모하며 그럼에도 오밀조밀하니 또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 찬란함을 품고 있는 금발까지.
그 모든 것들이 그러했고, 그렇기에 마음의 준비를 끝마치는데 더더욱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그의 외모가 전과 같았더라면?
이렇게 머뭇거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의무감과 사명감에 젖어 최대한 빨리 사명을 완수하려 했겠지.
허나 그렇지 않아서 그동안은 최대한 그의 외모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걸 피해왔었는데..
그 때문일까.
의식을 잃고 있었던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멀쩡하게 눈을 뜬채 제게로 내리쬐는 햇빛을 맞고 있는 이안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그녀가 여태껏 느꼈던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선사했다.
그 때문에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을 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곧바로 치료에 착수해야만 했다.
딱보니까 어찌어찌 정신을 차리긴 했는데 그런답시고 소모된 생명력이 상당해서 이도저도 못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아무리 당황스럽다해도 치료를 맡고 있는 입장에서 어떻게 좀 해달라는 그 간절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해가며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거리가 가까워지니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심장이 격하게 콩닥콩닥거렸지만 어찌어찌 들키지 않고 해낼 수 있었다.
물론, 얼굴 위에 뒤집어 쓴 베일 덕이 크긴 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꼼짝없이 들켰겠지.
분명 그럴 거라 생각하며 그를 향해서 뻗을 손쪽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거의 평생동안 해온 행동이니만큼 평소같지 않게 심장이 콩닥콩닥 뛰어대는 와중에도 신성력은 착실하게 손끝으로 모였다.
그렇게 하얗게 빛나기 시작한 것을 조심스레 그의 몸을 향해 가져갔다.
다행히 추측하고 있었던 게 맞았던 모양이다.
"으.."
간당간당하게 바닥을 보이고 있는 것을 다시 채워주기 시작하니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라 부를만한 것이 흘러나왔으니까.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어느 정도 채워졌다 싶을 때 몸을 움직여보라 하니 침대 위에 찰싹 붙어있던 그의 팔이 움찔하며 움직임을 보였으니까.
"하.."
그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꽤나 날카롭게 내뱉어진 헛웃음이었다.
-기회구나.
그분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것도 바로 그때였다.
'기회라니요?'
-보면 모르겠느냐.
답답해하는 그분의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퍼졌지만 자신은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었다.
그걸 그분께서도 알아주셨던 것일까.
한숨소리와 함께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딱봐도 제 몸 상태가 어떤지 깨닫고 상심한 모습 아니더냐.
듣고보니 확실히 그랬다.
돌아가는 상황또한 그러했고.
-무릇 남자란 건 말이다. 자기가 힘들 때 옆에서 위로해주는 여성에게 끌리는 법이다.
'그, 그런가요?'
-설마 내 말을 의심하는 게냐?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말에 잽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절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진심이라는 걸 여신께서 알아주셨는지 그 이상의 추궁은 뒤따르지 않았다.
-그럼 이제 뭘 해야하는지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그를 위로하라는 말씀이시지요?'
-그래, 겸사겸사 쓰러져있는 동안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까지 읊어주면 저 사내는 자연스레 널 의지하게 될 거다.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이를 이쪽의 입맛대로 이용하는 것 같아서 살짝 양심에 켕기긴 했지만, 그런 건 잠시 뒤로 미뤄놓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자신에게는 멸망을 치닫는 세상을 구원하고 그분의 명예를 드높일 구원자를 잉태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양심의 가책 정도야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었다.
헛웃음을 짓고 있는 그를 상대로 조심스럽게 말을 건뒤 혹시 뭐 궁금한 건 없냐고 물었던 건 스스로에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일탈의 맛은 꽤나 짜릿했다. 덕분에 심장이 아까하고는 다른 느낌으로 콩닥콩닥 뛰었지만 눌러쓰고 있는 베일 덕분에 들킬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려니..
"그.. 그러면 혹시 제가 얼마나 쓰러져있었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까 흘러나왔던 잔뜩 갈라진 목소리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제대로 물을 마시지 못해 메마른 상태일 수밖에 없었던 목에는 그마저도 치명적이었던 걸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콜록콜록하고 거칠기 짝이 없는 기침소리가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귓가로 울려퍼지는 그 소리를 들으며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을 사라를 향해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당연히 물이라도 한 잔 가져다달라는 의미였다.
그런 자신의 뜻을 알아준 것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달칵하고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뒤쪽에서부터 들려왔다.
그렇게 방을 빠져나갔던 사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방으로 돌아왔고,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것을 곧바로 이안에게로 넘겼다.
"가, 감사.."
"우선 목부터 축이세요."
아무래도 이쪽의 지위가 있다보니 자연스럽게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지금쯤 목이 많이 아플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컵을 비우는 것보다 감사부터 표하는 이안을 조심스레 다독였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좀 안심이 되었던 건지 이내 꼴깍꼴깍하고 물을 삼키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딱보니 한 잔으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다시 한 번 사라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는 이안의 손에 들린 것이 바닥을 보이기 무섭게 새 것으로 교체해주었다.
"목이 마른 건 이해하지만 최대한 천천히 들이키려고 노력해봐요. 급하게 마시다가 사레라도 들리면 큰일이니까."
"네, 네."
그렇게 목을 축이고 나니?
꼬르르륵-
이제는 자기 차례라고 외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뱃고동을 생각나게 하는 소리가 이안의 배 안쪽에서부터 터져나왔다.
그 노골적이기 짝이 없는 소리에 이안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이 심장이 살짝이긴 하지만 전보다 더 크게 뛰는 걸 느끼며 다시 한 번 사라를 향해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