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91)화 (290/366)



〈 291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눈을  순간 찾아온 건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극심한 혼란스러움이었다.


그만큼 마지막 장면이 시사하는 바가 컸으니까.


물론, 그 모든 것이 누군가 날 엿먹이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꾸며낸 것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했지만 솔직히 그럴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뭣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누군지 모를 여성과 눈이 마주친 듯한 느낌을 받았던 건 결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내게 경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쓰잘데기 없는 짓은 이만 멈추고 이쯤에서 네 본분을 다하라고 말이다.


가능성이야 충분한게 그녀가 말했던 것들이 과장이 아니라면 그녀는 한 개인은 물론, 세계의 흐름마저도 제 멋대로 좌지우지할  있는 신을 뛰어넘는 불가해의 무언가일테니까.


그런 이에게 세계 몇 개를 건너뛰어 내 의식에 간섭하는 일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겠지.


그렇기에 웃음부터 나왔다.

 모든 게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인정하고 나니 어이라는 것이 더는 못해먹겠다며 짐을 싸서 가출을 시도했으니까.


솔직히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짬이  때마다 조상놈이라고 부르며 욕했던 이가 사실은 내 전생이었을 줄은.

'어쩐지..'

한편으로는 '이제와서'라는 단어가 떠오르기는 하지만 나만 유독 실패를 거듭했던  이해가 되기도 했다.


허무하게 뒤지지 말라고 내게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주었던 가문 내의 완수자들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면 대개 3번내지 4번 안에 성공을 맛보았다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들로부터 철저하게 교육받고 준비한 나는 벌써 그 범위를 훌쩍 넘지 않았던가.

그렇기에 유독 내게만 가혹한 것이 억울하기도 하면서 이해가 안 되기도 했는데 이래서야 툴툴거리지도 못하게 생겼다.


다 내 업보 때문이라는데 어쩌겠는가?


그런갑다 받아들여야지.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전생의 일 때문에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안 되긴 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개지랄을 해대면 왠지 모르게 그 정체불명의 여자와 다시 얼굴을 맞대게 될 것만 같았으니까.

주인공이라는 역할을 제 입맛대로 줬다 뺏었다  수 있는 존재에게 분노를 산다?

그리했다가 떨어지게 된 곳이 바로  굴레 속인데 이 다음은 무엇이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렇기에 그러한 처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전생의 내가 그녀와 맺은 계약의 내용은 무엇이었으며 어떤 말로 그녀를 협박했기에 어지간한 일로는 화는 커녕 꿈쩍도 안  것 같이 생겨먹은 존재의 분노를 산 것일까.

그에 대한 힌트가 아예 없냐면 그렇지는 않았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날 상대로 여성이 한심하다는 듯 내뱉었던 말이 하나 있었으니까.


'영원한 발전이라고 했었나?'


그것 외에 다른 건 딱히 언급하지 않았던  보면 아마 그 영원한 발전인지 뭔지 하는 게 유일한 계약조건일 가능성이 컸다.

영원한 발전.

굉장히 추상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언뜻 보면 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은근히, 아니 굉장히 어려운 조건이었다.


특히나 그것의 적용대상이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말했듯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굉장히 사기적인 존재다.

과장을 한 스푼 정도 보태서 말을 하자면 말 그대로 가만히 숨만 쉬고 있어도 쭉쭉 성장하는 존재가 바로 주인공이라는 존재다.

허나 그런 식의 급격한 성장에도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성장이라는  기본적으로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처음 몇 층 정도야 체력하고 몸만 받쳐준다면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지만 여태껏 지나쳐온 계단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다음 하나를 오르는 것이 힘겹게 변한다.

바로 그 시점에서 주인공이라는 존재는 처음으로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 한계는 더욱 치명적이다.

여태껏 그것을 마주한 적이 없기에 계단을 한참 오르고 난 후에야 만난 그것이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버리게 되니까.

소설같은데서 보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에는 그것을 넘어서고야 마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생각보다 그렇게 심지가 두텁지 않다.


인간이라는 생물은 생각보다 쉽게 포기를 생각한다.


하물며 여태까지 주인공으로서 누릴  다 누르고 떠받들어지기까지 한 몸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이게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내가 여태껏 봐온 주인공이라는 것들이 죄다 그랬다.

주인공이라는 사기성에 힘입어 쭉쭉 성장하기만 하다가 처음으로 부딪힌 벽이 너무나도 두텁고 높아보여서 더 성장하기를 포기하고 안주를 택한 이들.

아마 전생의 나는 그들과 같은 선택을 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다 못한  여자가 전생의 나로부터 주인공이라는 역할을 거둬가버린 것이고?


그런 거라면야 그렇게 실패라는  모르고 승승장구를 달리다가 단 한순간에 진창까지 처박힌 것또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대는 간다지만 주인공으로서 누릴  있는 것들을 빼앗긴다는 건 단순히 망한다는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수준이니까.

'거 새끼  열심히 좀 하지..'


이제와서 후회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전생의 내가 지금의 상황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대신 느릿하게라도 성장하기를 택했다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꼴은 아니었을테니까.

아무튼 이로써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여기서 더 뺀질거렸다간 엿될 수도 있다는 것.


처음 눈을 뜬 이후로 줄곧 감고 있었던 눈을 떠서 뒤늦게라도 상황을 파악하려고 한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봤는데..


'흠..?'


그러자마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 날 반기고 있었으니까.

일단은 생소했다.

나름 교국에서 오래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뭐.. 완전히 처음 보는 곳이었다.


혹시  날 사건에 휘말려 다친 이들을 수습하기 위해서 교국 측에서 따로 마련한 곳인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확인은 할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딘지 확인해보겠답시고 폭신하게 내 몸을 받쳐줘고 있는 것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는데 어째선지 몸이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질 않았으니까.


내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걸 바란 건가 싶어서 움직이는 범위를 손가락으로 국한해봤지만 그럼에도 옴짝달싹도 안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니..'

황당해서 헛웃음부터 나왔다.


몸이 많이 망가졌을 거라는 사실쯤이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게 설마 이 정도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더 무서운 건 몸이 이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고통은 몸이 제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다.


헌데 시력이나 청각같은 건 다 멀쩡한 듯 한데 유독 그것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딱  순간부터였다.

머릿속으로 왜앵하고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뭐라도 조치를 받지 않으면 머지않아 좆될 수도 있다는 걸 암시하는 소리였고, 나름대로 다급하게 입을 열었던 건 그래서였다.

근처에 누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정도 되는 환자를 대책없이 방치해놓지는 않았을테니 대기하고 있을 이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는데..

-..!


암만 입을 열어봐도 흘러나오는 거라고는 바람 빠지는 소리 뿐이었다.

혹시 힘이 부족했나 싶어서 나름 안간힘을 써봤지만 바람 새어나오는 소리만 강해질  내가 원하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미치겠네 정말.


이러다가 진짜 아무 것도 못하고 이대로 가만히 누워서 뒤지는  아니겠지?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내 영혼만 쏙 빼다가 인형에다가 옮겨놓은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정도였다.


그렇게 누운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못한채 그저 낑낑대고만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 뒤를 따른 건 굉장히 안락한 향기였다.


햇빛 아래에서 잘 마른 이불냄새라고 해야할까.

맡고만 있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향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누군가 내가 드러누워 있는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방을 관리해주는 사람일까.

아무튼 언제 다시 의식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에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그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서 시선을 던졌다.

맘 같아서는 고개라도 움직여보고 싶었는데 당장은 그게 내 최선이었다.

그런 내 간절함을 알아준 것일까.

"어..?"


막  안으로 들어온 이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어어..?"


그렇게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는 잠시동안 굳어있던 여성의 눈이 이내 왕방울만하게 커지더니..

"자, 잠시만요!"

그리 외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가는 게 아닌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같은 반응이어서 살짝 떨떠름하긴 했지만 그래도 안도할 수는 있었다.

저렇게 황급하게 뛰쳐나갔으니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 뭔가 조치를 취해줄  있는 사람을 데리고 돌아와줄테니까.

'그나저나..'


여긴 대체 어딜까.


어디길래 창밖에 보이는 거라고는 들푸른 초원 뿐인 걸까.


창문 밖으로 끝없이 펼쳐져있는 초원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떠오르는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딱봐도 풍경이 목가적인게 교국의 수도는 아닌 듯 한데  상태가 박살난 나를 어떻게 여기까지 옮겼는가부터 시작해서 말 그대로 온갖 의문들을 마주하고 있으려니 다시 한 번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에 창문 쪽을 향해 놓고 있던 눈동자를 다시금 그쪽을 향해 돌리니 눈으로 들어온 건 아까 눈이 마주쳤던 여성과-

회색빛 천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또다른 여성이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기억 속에서 저런 식으로 특징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건 딱  명 뿐이었으니까.


그녀의 모습이 눈으로 들어온 순간 헛웃음부터 흘렸던 것도 그래서였다.


아니, 대체 내가 기절해있는 동안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내가 의식을 회복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녀가 저런 식으로 황급히 뛰어오는 건가 싶었으니까.

허나 당장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있었다.

실시간으로 좆되고 있을 가능성이 큰 내 몸을 어떻게  해달라는 뜻을 전하기 위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제대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입을 열심히 벙긋거렸다.


그게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던 걸까.


뭣 때문에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당황한 듯 몸을 작게 움찔대던 성녀에게서 '아-'하고 뭔가를 깨달은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다.


그러더니..

"자, 잠시만요."


살짝 말을 더듬으며 황급히 내 옆에 자리를 잡는 게 아닌가?


 일련의 행동들이 내게는 살짝 의외였다.


멀리서봤을 때는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약간 신비로운 이미지로 다가왔었는데 가까이서 확인해보니 묘하게 허당의 냄새가 났으니까.


그것도 꽤 짙게 말이다.


설마 저렇게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건 그 허당끼를 숨기기 위해서인 걸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마침내 조치를 취해주려는 것인지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성녀의 손이 우유를 생각나게 하는 말갛고 흰 빛을 사방으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얗게 빛나던 손이 내 몸에 와서 닿은 순간-

가만히 있어도 뭔가가 쭉쭉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던 몸 안으로 활력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느낄 수 있었다.


"으.."

바람빠지는 소리만 새어나오던 목구멍 안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라고 부를만한 것이 흘러나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한 번 몸을 움직여 보시겠어요?"

다만 거기까지는 좀 비관적으로 보았다.

목소리를 내는 것과 몸을 움직이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내 몸 상태를 책임져줄 이의 말을 무작정 거부하기도 그래서 손에 살짝 힘을 줘봤다.


그랬더니..

움찔-

깨어난 후로 암만 용을 써봐도 꿈쩍도 하지 않았던 몸이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그 순간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신세가 대충 어떨지 눈앞으로 그려지는 것만 같아서..


"하.."


헛웃음부터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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