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내게 덧씌워진 이 굴레가 언제 끝이 날지 나는 모른다.
처음 이 굴레에 휘말렸을 때 주인공이라는 존재를 도와 엔딩이라는 걸 본다면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 설명 어디에도 내가 평생토록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 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무리 업보 청산을 위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기회를 무한정 제공할까?
솔직히 난 좀 회의적이었다.
그렇기에 언제든 끝이 날 가능성을 내심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다음과 끝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다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만약 내게 다음이라는 게 주어지게 된다면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광경은 분명 그 거지같은 대기실일거라 생각했다.
기적적으로 되살아날 가능성?
회의적으로 본 것은 그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다.
마지막 순간 느꼈던 걸 생각해보면 온몸의 장기가 아이스크림마냥 녹아내려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전회차 성녀로 추정되는 진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그러니까 내가 아는 그 성녀에 걸맞는 기량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면 어찌어찌 거기에 기대볼 수라도 있었겠지만..
딱봐도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덕분에 기대감을 품어보려 해도 품을 수가 없었다.
필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흠?'
눈을 뜬 순간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온 것은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광경이었다.
분명 그 엿같은 대기실의 모습이 나타나야 정상인데 어째 눈으로 들어오는 거라고는 온통 회색 뿐이었으니까.
그 왜 텔레비전 신호가 끊기면 나오는 화면 있지 않으니까.
그런 회색빛의 노이즈가 온 사방에 가득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포기했다 생각했던 희망이라는 놈이 조심스레 고개를 치켜드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안 죽은 건가?'
진짜로?
몸 안이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는데?
아님 혹시 드디어 그 굴레라는 것이 날 포기한 걸까.
둘 중에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 회색빛 공간 안에 오도카니 서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찢어지는 비명같기도, 처절한 호소 같기도 했다.
대체 어디서 들려온 걸까.
눈을 굴려봤지만 애석하게도 눈으로 들어오는 거라고는 예의 그 회색빛 광경 뿐이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궁금해졌다.
'움직일 수는 있는 건가?'
이참에 한 번 시도해보기로 했다.
언제까지 이 뭔지도 모를 공간 안에서 죽치고 있을 수많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해서 조심스레 발을 들어올려보며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뭐라 해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발이 아무 저항없이 바닥에서 떨어져나왔다.
그것을 살짝 앞으로 내민 순간이었을 것이다.
'어..?'
기묘한 느낌이 몸을 타고 엄습해왔다.
누군가 내 멱살을 움켜쥐고 쭉 잡아당기는 듯한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솔직한 감상을 밝혀보자면 청소기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먼지가 느끼는 감각이 이럴까 싶더라.
저항하고 싶어도 저항할 수 없는 그 기묘한 인력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순순히 끌려가니 사방을 채우고 있던 회색빛 노이즈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
어찌보면 안개같기도 한 것들이 내 움직임에 맞춰 좌우로 쭈르륵 갈라지는 광경은 나름대로 진풍경이었다.
그에 속으로 내심 감탄하고 있으려니 옆으로 비켜서서 벽을 이룬 것들 위로 기묘한 장면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장면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말 그대로 TV 화면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저건..'
꽤나 눈에 익은 장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시야가 까맣게 변해버리기 전에 봤던 것이었으니까.
시커먼 것들과 건물 잔해따위가 널브러져있는 공간 속에서 '나'는 피칠갑을 한채 누군가를 향해 창을 내리찍고 있었다.
'어우..'
당시에는 몰랐는데 이렇게 제 3자의 관점으로 보니 그야말로 처절함 그 자체였다.
대체 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저렇게 미친듯이 창질을 해댔던 걸까.
허탈함인지 회의감인지 모를 것을 곱씹고 있으려니 내게 그것을 느끼게 만든 것이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더니 그대로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이었다.
마치 누군가 이번 회차에서 내가 한 행동들을 카메라로 찍은 다음에 그걸 거꾸로 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기억 속에 남아있는 광경들이 시간을 거슬러 눈앞으로 펼쳐졌다.
원치 않아도 자연스레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오는 그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으려니 꼭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된 것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게 주마등이라는 걸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열심히 시간을 거슬러 오르던 한 편의 영화는 서서히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때잖아?'
왕도에 처음 도착했던 날, 골목에서 앨리스, 그리고 디아나와 마주쳤을 당시의 기억을 감상하고 있으려니 이제 정말 끝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막 이 세계로 떨어졌을 당시의 광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해서 이제 끝이겠구나하고 피식하고 웃었는데..
그 웃음을 오래 유지할 수가 없었다.
누구 맘대로 끝을 내는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풍경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니까 전회차의 기억이 말이다.
내가 내 스스로 배를 가르던 장면부터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었다.
입매를 비튼 건 그래서였다.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걸까?
혹시 뭐 내게 반성같은 거라도 요구하고 있는 걸까?
지나온 순간들을 반추하면서?
이런 짓을 벌인 이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참 악취미다 싶었다.
그렇기에 반성하는 마음보다는 반발심이 앞섰다.
'반성은 무슨.'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는 있을지언정 반성할 생각따위 추호도 없었다.
하늘에 맹세컨대 나는 그때그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럼에도 실패한 건 다 내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겠지.
'그나저나..'
어디까지 갈 생각인 걸까 이건.
지금 가장 궁금한 건 다름아닌 그것이었다.
만에 하나 초회차까지 갈 생각이라면 시간이 꽤나 걸릴테니까.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쌓인 세월이 결코 적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 내 예측이 맞았다고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시간을 거스르는 행렬은 전회차가 끝나고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덕분에 이제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순간들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개중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욕이 절로 튀어나오는 개같은 상황도 있었으며, 나름대로 그립게 느껴지는 광경도 있었다.
물론, 복장이 뒤틀리는 장면들도 존재했고.
'하..'
기분이 묘했다.
그 싱숭생숭한 감각을 만끽하고 있는 동안 끝을 모르고 이어지던 과거의 향연들도 어느덧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래서..'
이게 끝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는 오랫동안 머리를 싸매지 않으면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참으로 오래된 과거의 기억들을 들여다보며 그런 의문을 느끼고 있으려니..
'응?'
어쩐 일인지 끝나지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등장하기 시작한 것들이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기억이라는 것 정도?
'설마..'
그것을 확신한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것은 '혹시..'하는 가정이었다.
'전생까지?'
내게 그런 가정을 하게 만든 일련의 장면 속에서 전생의 '나'로 추정되는 남성은 나는 전혀 모르는 모습을 한채, 생전 처음보는 곳을 누비고 있었다.
'이건 또 순서가 제대로네.'
지금까지 보여줬던 것들은 죄다 순서를 뒤집어놔서 이번 것도 필시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어쩐 일인지 그렇지가 않았다.
내 옆을 지나쳐 뒤로 흘러가는 것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화면 속에 자리한 내 얼굴 위로 주름이 한줄씩 늘어났으니까.
혹시 여태껏 시간을 뒤로 돌렸던 건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던 걸까.
이것만 제대로인걸 보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해서 어디 한 번 살펴나 보자는 마음으로 눈앞으로 펼쳐지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자연스럽게 눈치챌 수 있었다.
전생의 나는 내가 그토록 증오해마지 않는 주인공이라는 것들과 비슷한 존재였다는 걸 말이다.
'이게 뭔..'
혼란스러웠다.
어찌나 혼란스러운지 막장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게 출생의 비밀보다도 몇 배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고 벙찌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전혀 모르는 내 기억은 유유하고 도도하게 내 앞을 지나쳐 흘러갔다.
덕분에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화면 속의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는 것을.
바로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면 속의 나는 뭘하든 승승장구했다.
내가 아는 그 주인공이라는 존재들처럼 말이다.
분명 그랬던 이가 어느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에게서 주인공이라는 역할을 거둬가기라도 한 것처럼.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하고,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에게 버려지고.
거듭되는 실패는 사람을 순식간에 바꿔놓았다.
덕분에 순간적으로 혼동마저 올 정도였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손 대는 것마다 성공시킬 것처럼 자신감에 차 있던 모습이 거짓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느새 화면 속에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추레한 몰골을 한 거렁뱅이 하나가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둘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차라리 몸이라도 멀쩡했다면 이렇게까지 안쓰러움을 느낄 일은 없었을텐데..
대체 한쪽 팔은 어디다가 팔아먹은 건지 외팔의 거렁뱅이가 바닥에 엎어져 울부짖고 있었다.
믿었던 이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이 그리도 원통했던 것일까.
자신을 버린 연인의 이름이라도 부르짖고 있는지 원망이라는 감정이 그득하게 들어찬 눈을 한채 하늘을 향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이 그리 처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궁금해졌다.
대체 뭘 저렇게 원망하나 싶었으니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그 의문은 해결되었다.
목에서 피가 터져나오든 말든 한참동안 울부짖던, 이제는 정말 '나'인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남성의 앞으로 한 명의 여성이 내려섰다.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등장한 그녀는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몰라도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차라리 굉장히 잘 만들어진 인간형 로봇을 보고 있는 것 같달까.
아무튼 갑자기 나타난 여성이 기력이 다해서 엎어진 남성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뻗어져나간 것이 남자의 몸과 접촉한 순간..
-대체 뭐가 그리 원망스럽죠?
처음으로 소리라는 것이 등장했다.
그에 흠칫한 순간, 기절한 것처럼 보였던 남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러더니 그대로 여성의 다리에 매달리는게 아닌가?
벼랑 끝에서 신을 목도한 이의 간절함이 저러할까.
팔 하나만으로 어딘가에 매달리는게 쉽지는 않을텐데 그럼에도 남자는 기를 쓰고 여성에게 매달렸다.
마치 이대로 그녀를 보내선 안 된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이윽고 그런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된 사죄였다.
-제발..! 제발..! 돌려줘..!
대체 뭘 돌려달라는 걸까.
부르짖는 모양새가 처절하기 그지없는게 누가보면 여성이 남자로부터 엄청나게 소중한 것이라도 빼앗았다고 착각하기에 충분한 모양새였다.
-돌려달라니요?
여성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지만.
의문어린 상대방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기 그지없는 남자의 외침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내 운명! 주인공으로서의 내 운명!
날 충격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설마..'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으로 떠오른 순간, 여성이 남자의 말을 받았다.
-왜죠?
-그, 그야.. 내 거니까..! 내게 준 거였잖아..!
-그랬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것치고는 그 안에 담겨있는 것의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약속'을 어겼잖아요?
-그, 그건..
-개인적으로 참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요. 계약을 맺을 당시에 당신은.. 나름대로 기대주였거든요.
할 말이 없었던 걸까.
한껏 벌어져있던 남자의 입이 다물어졌다.
-향상심이 넘쳤고, 야망이 가득했죠.
-...
-그래서 특별히 계약을 제시했던 것인데..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남성을 향해 내려꽂혔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깨달았다.
분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음에도 그녀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를.
'저건..'
같은 '사람'을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자신보다 한참 하찮은, 마치 개미를 바라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라고 해야할까.
-계약을 어긴 것도 모자라 협박이라.
-...
-이런 걸 두고 같잖다고 하는 걸까?
그 순간 여성의 얼굴 위로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났다.
경멸이라는 감정이었다.
-널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성의 말에서 뭔가 불안한 예감같은 거라도 받은 것일까.
남성이 황급히 그녀에게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것도 모자라 바닥을 박박 기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해서 여성과 거리를 벌리려는 것처럼.
남자가 지렁이마냥 꿈틀대든 말든 여성의 태도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아, 그래. 그게 좋겠네.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일까.
-주인공으로 놀 때는 좋았지?
딱하고 손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퍼졌다.
-네 욕망을 위해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는지도 모르고 말이야.
갑자기 쿵쿵하고 있을 리도 없는 심장이 격렬하게 뛰면서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듯한 감각이 몸을 타고 엄습해왔다.
-그러니까..
바닥을 기는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성이 마침내 몸을 움직였다.
-이번에는 네가 좀 해봐.
그리 말하며 남성의 머리를 손으로 움켜쥔 여성의 시선은..
-좀 구르고 있으면 나중에 기억날 때 꺼내줄게.
정확히 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소름끼치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흐억-!"
길고 긴 잠에서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