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9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어느 성녀의 일기****
오늘은 드디어 교류전의 마지막날입니다.
그런만큼 여신께서도 특별히 신경써주고 계신지 오늘따라 부쩍 햇빛이 찬란하네요.
살고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성역은 참 살기 좋은 곳입니다.
가끔 살짝 심심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겨울에도 이렇게 활짝 문을 열어놔도 전혀 춥지 않으니까요.
성역이 전 세계를 뒤덮게 되면 겨울에도 추위에 떠는 사람들이 없어질텐데 여건상 불가능하다는 게 아쉬우면서도 이러한 혜택을 성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독차지한다는 것이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환기를 위해 열어놓은 창으로 쏟아져들어오는 따스한 햇빛은 여신님의 손길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분의 상징이 해라는 점을 고려하면 꼭 틀린 말은 아닌 듯 하네요.
그 안락한 느낌을 즐기고 있으려니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보아하니 슬슬 준비를 시작해야하는 모양이네요.
나머지는 옷부터 갈이입고 나서 적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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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자 성역지키미인 사라는 참 손재주가 좋은 것 같습니다.
어제 실수로 살짝 찢어먹었던 법복을 불과 하룻밤 사이에 이렇게 흔적도 없이 완벽하게 복원해놓다니.
바느질을 얼마나 잘해야 이런 일이 가능한지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네요.
한편으로는 늘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칠칠맞아서 시녀인 사라를 고생시키는 건 아닐까.. 그래서 무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때때로 들거든요.
맘같아서는 일손이 되어줄만한 이들을 붙여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사라 본인도 그 이야기만 꺼내면 괜찮다고 한사코 사양을 해대는 턱에 무턱대고 밀어붙일 수도 없고요.
남에게 자신의 뜻을 강요하는 것만큼 악랄한 행위도 없으니 아쉽지만 앞으로도 사라에게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오늘도 법복은 참 불편한 것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몸에 달라붙는 형태라서 움직일 때마다 특유의 까슬까슬한 재질이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참..
몸매가 드러나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따라야겠지요.
이또한 여신님의 뜻이니까요.
잠깐의 틈을 타 여신님께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으려니 사라가 옷과 똑같은 천으로 만들어진 베일을 들고 왔습니다.
역시 오늘도 써야하는 걸까요.
베일을 쓰게되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불편한데..
항상 이쪽을 위해 노력해주는 사라의 앞에서 싫어하는 티를 낼 수는 없어서 속으로 입만 삐죽거리고 있으려니 여신님의 따끔한 경고가 머릿속으로 들려왔습니다.
-입으렴.
그래서 입었습니다.
불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있나요?
이게 다 제가 표정을 관리하는데 서툴러서 그런 건데요.
앞으로 만나게 될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나라에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니 결코 얕보여서는 안 됩니다.
여신님을 위한 헌신보다 자신들이 가진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들은 교국의 영향력이 지금 이상으로 늘어나는 걸 원치 않을테니까요.
그런 이들에게 약점을 드러낼 수는 없죠.
-장하구나. 내 딸아.
여신님으로부터 내려온 칭찬이 기뻐서 미소를 짓고 있으려니 사라로부터 오늘 하루동안 호위를 맡아줄 이들이 도착했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해서 곧장 성역을 나서니 눈으로 들어온 건 익숙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뻤습니다.
앞으로 만나야될 이들이 하도 쟁쟁하다보니 내심 긴장이 됐는데 저들이 옆에서 지켜줄 거라 생각하니 긴장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게 오늘 하루동안 고생해줄 이들과 일일히 인사를 나눈 뒤, 그들과 대회장으로 향했습니다.
하루만에 재방문하는 대회장의 위용은 여전히 대단했습니다.
아마 다른 이들의 감상도 저와 비슷하겠지요.
그들이 이 대회장을 보고 여신님의 위대함을 깨달았으면 좋겠네요.
그걸 위해 없는 예산을 쥐어짜가며 이걸 지은 거니까요.
아직은 한산한 관객석을 둘러보다가 따로 마련된 자리로 향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아직 오지 않은 걸까요.
내부는 조용하니 비어있었습니다.
덕분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없이 일기를 쓰는데 집중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대회장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따로 챙겨온 수첩에 아침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끄적이고 있으려니 각국에서 온 귀빈 분들이 속속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저 두 명이네요.
다음 대 왕위를 이을 것이 유력하다던 레이시아 양과 제국의 2황녀라던 바이올라 양 말입니다.
새삼 둘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자면 레이시아 양을 처음 봤을 때는 크게 놀랐습니다.
사람이 어찌 저리 아름다울 수가 있나 싶었으니까요.
달빛을 생각나게 하는 탐스러운 백금발부터 시작해서 오똑한 코에 분홍빛 입술.
그리고 살짝 분홍빛이 도는 새하얀 피부까지.
그야말로 여성이라면 부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물론, 저또한 여신님의 은총일 것입니다.
부디 그녀가 그 사실을 깨닫고 여신님의 은총에 감사함을 느꼈으면 좋겠네요.
다음으로 바이올라 양은..
첫 인상은 솔직히 좀 무서웠습니다.
귀하고 꼬리 때문인지는 아니면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그리 느껴졌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꼭 한 마리의 거대한 늑대와 마주 보고 서 있는 듯한 느낌이었으니까요.
물론, 지금도 어느 정도 무서운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녀가 은근히 대화가 통하는 상대라는 걸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징조라 생각합니다.
전해들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2황녀라고는 하지만 제국 내에서 영향력이 결코 적지 않다고 그랬으니 만약 그녀와 친해지게 되면 제국 내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여신교도의 비율이 절반을 넘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자신들의 토속종교를 믿고 있는 이들도 많으니 말이죠.
그들에게 여신님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주고 여신님의 품 안으로 귀의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여신님께서 내려주신 제 사명일 겁니다.
그렇게 도착한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마지막으로 등장한 건 왕국 연합 측 대표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왕국 연합 측에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급하게 청했던만큼 이쪽에서 보낸 참가요청이 무리하게 느껴졌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응해줬으니까요.
다만 저 대표라는 여성분은 뭐라고 해야할까.. 솔직히 조금 꺼려지긴 합니다.
평범하다고는 말하기 힘든 생김새 때문일까요.
그런 거라면 반성할 수밖에 없겠네요.
생김새를 가지고 차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또 없으니 말이죠.
저들또한 여신님의 자식일진데 차별해서는 안되겠죠.
그렇게 귀빈들이 모두 입장하고 나서야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3, 4위전은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쉬웠습니다.
어째 상대측 참가자들이 영 맥아리가 없었으니까요.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저쪽에서 사제 파견을 거절했을때 한 번 더 권해볼 걸 그랬네요.
뭐, 그런 아쉬움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3등으로 마무리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주최국으로서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4개국 중에 꼴찌는 좀 그러니까요.
어쩌면 4등을 해서 기분이 나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왕국 연합측 대표는 의외로 의연해보였습니다.
뿐만아니라 결승전을 보다 다채롭게 만들기 위해 굉장한 제안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받아들였고요.
그 탓에 시작이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덕분에 평생에 한 번 볼까말까한 진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승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제국이 이길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이올라 양의 이름이라면 몇 번 들어본 적 있으니까요.
자국 내에서 열린 토너먼트들이라고는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에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있는 대회에서 몇 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적 있는 몸이니 사실상 또래에서는 적수가 없다고 보는 게 맞겠죠.
뿐만아니라 왕국 참가자들의 구성도 솔직히 좀.. 그랬습니다.
남자가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으니까요.
차별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남자는 뭐랄까.. 지키는 쪽이라기 보다는 지켜지는 쪽에 가까우니 말이죠.
그렇기에 중간 과정이 어찌되든 간에 결국에는 제국이 이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눈을 부릅 뜬채 경기 내용에 집중했습니다.
-그렇지. 잘 봐두렴. 둘 중에 한 명이니까.
여신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경기에 출전하는 '남성'들 중에 한 명이 신탁 속에서 언급된 예언의 남성이라 하셨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그 진이라는 사내쪽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틀려선 안 되는 것이니만큼 아직은 한 번도 등장한 바 없는 이안이라는 사내또한 세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겠죠.
그 사실을 마음 속에 새기며 결승전을 관람하고 있으려니 이게 왠걸?
상황이 예상했던 것하고는 조금 다른 식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만큼 디아나라는 이름의 참가자의 활약은 엄청났습니다.
맘같아서는 성기사단으로 입단할 생각은 없냐고 권유라고 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어보면 레이시아 양과 굉장히 절친한 사이라 하니 권유를 한들 응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죠.
아쉽네요.
여신님의 은총을 받은 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눈부신 금발이 참 인상적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녀의 분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아찔한 장면이 몇 번 나온다 싶더니만 아무래도 부상을 입은 듯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결승전답게 이변에 이변이 몇 번이고 겹치는 걸 보고 있던 와중이었을 겁니다.
마지막 경기가 주는 긴장감이 극에 달하고 있던 가운데 왕국 연합측 대표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바이올렛 양이 그 뒤를 따라 일어섰습니다.
처음에는 둘이 따로 나눌 말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제국 측 호위가 왕국 연합 측 일행을 덮치는 게 아니겠어요?
그 다음부터는 솔직히 제대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단시간동안 워낙 많은 일들이 벌어져서 한참 지나 일기를 작성하는 지금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니까요.
다만 확실한 건..
-피하거라.
머릿속으로 여신님의 음성이 울려퍼졌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대회장 밖이었다는 것 정도?
그 다음부터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혹시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잔당을 색출 작업에 부상자들 수습,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날 대회장 안쪽에서부터 터져나온 타신의 것임이 분명한 신성력과 관련된 사항들을 수습하는 것까지.
그게 교국이라는 집단을 이끄는 자로써 해야할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한 명의 치료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이올라 양을 상대로 분전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결국에는 압도하기까지 했던 불가사의한 무력을 지닌 '이안'이라는 남성의 치료를 말이죠.
그가 사건 당시에 보여주었던 활약에 대해 들은 순간 그의 치료를 자원했습니다.
실제로 확인해보니 전해들었던 것보다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하기는 했지만, 위기에 빠질 뻔 했던 교국을 수렁에서 건져낸 은인이 허무하게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듯 상태가 워낙 심각해서 처음 며칠 동안은 정말 신성력이 차오를 때마다 그걸 그의 몸에다가 퍼붓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면 찾아오는 탈력감 때문에 기절하듯 곯아떨어지길 반복하다보니 참으로 죄송스럽게도 여신님께 기도를 드릴 시간도 나지 않았고요.
그럼에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서 결국 그를 성역 안으로 들이기로 했습니다.
그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 위해 여신님께 며칠만에 기도를 올렸는데..
-그래, 허락하마. 그를 이대로 떠나보내는 것은 아니될 일이니.
여신님께서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흔쾌하게 허락해주셨습니다.
여신님께서도 교국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이의 목숨을 이대로 거두어가실 생각은 없으셨던 걸까요.
역시나 자애로우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 생각치도 못했던 말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습니다.
-그나저나 드디어 찾은 것 같구나.
그랬습니다.
예언 속의 남자는 사실 그 진이라는 사내가 아니라 이안이라는 사내였던 것이었습니다.
-상대를 찾았으니 이제 뭘 해야할지도 당연히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말씀해주신 바 있으니까요.
다만..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주마. 남자는 익숙치 않을테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이야말로 문제였던 것입니다.
평생 남자하고는 연을 끊고 살아왔는데 예언 속 남자와 동침하여 그의 아이를 잉태해야 한다니..
여신님의 위대함을 온 세상천지에 알리기 위한 일이라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딸아. 네곁에는 내가 늘 함께하고 있으니.
전 이제 어쩌면 좋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