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88)화 (287/366)



〈 288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느릿하게 이안의 볼을 쓰다듬고 있으려니 손가락 끝을 타고 미약한 온기가 올라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그 온기를 쫓아 하염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뒤에서부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시녀가 돌아온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뒤이어 들려온 소리 덕분이었다. 어쩐지 머뭇대는 듯한 기척, 그것을 느끼고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눈으로 들어온 건 아까 자신이 그러했듯 문가에 서서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이었다.

입가가 제멋대로 비틀어졌다.

맘같아서는 그대로 쏘아붙이기라도 하고 싶었다.


대체 무슨 염치로 여길 또 찾아온 거냐고.


이안을 이런 꼴로 만든 걸로는 부족했냐고.

그렇게 쏘아붙이고 싶었다.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자신이 그리 해버리면 목숨이 위험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저년을 지키려 했던 이안의 헌신을 폄하하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다시 입을 다물려 했는데 바이올라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부터 배 안쪽에서부터 들끓기 시작한 시커먼 무언가가 자꾸만 귀에 대고 속살거렸다.


-질투 안나?

본심을 정확하게 찌르고 들어오는 그 속살거림에 멈칫한 순간,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건 기회야.

기회라고?


-그래, 저년을 이안의 옆에서 떨어뜨릴  있는 기회.

솔직히 말하자면 구미가 당겼다.


조금 다르게 말하자면 인정하기 싫었다.

이안의 마음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싫었다.

거기에 넘어가면  된다는  알면서도 귓가로 흘러들어온 속삭임에 마음이 흔들린 건 분명 그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자신의 동요를 눈치챈 것일까. 기다렸다는 듯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딱  마디면 충분해. 죄책감만 자극하면..


굳이 뭔가를 더  필요도 없이 스스로 못 견뎌서 떨어져 나갈거라는 그 말에 다시 한 번 마음이 요동쳤다.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잖아? 안 그래?

허나 거기에 응하지는 않았다. 왜 그랬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기 싫었다.

"후.."


덕분에 막 열리기 시작했다가 닫히고, 다시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하던 입술 사이로 이를 악문 듯한 음성이 새어나왔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우두커니 서 있는 바이올라를 향해 말을 걸었다.

"오늘도 오셨군요."

다만 목소리까지 곱게할 수는 없었다.


"네, 네에.."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아, 아뇨.."

이안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려보면 저런 이미지가 아니었던  같은데 이안에게 진 빚이 있다보니 자연스레 태도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던 걸까.

아무튼 이쪽이 아는 척을 해주니 그제서야 문앞을 떠나서 이쪽을 향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하더라.

꼬리하고 귀가  쳐져있는 게  사고치고 주인한테 눈물이  빠지도록 혼난 강아지를 생각나게 했다.

귀엽다는 게 아니라 생겨먹은 게 그랬다는 뜻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바이올라는 어느새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와있었다. 그렇게 침대 맡에 선채 그 위에 드러누워 있는 이안의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바이올라의 얼굴이 점차 어두워졌다.

툭 건드리면 그대로 눈물을 왈칵 쏟아낼 것만 같은 모습을 한채 서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자꾸만 심사가 뒤틀렸다.

침대 옆에 도착한 후로 줄곧 이안에게 고정되어 있던 바이올라의 시선이 처음으로 다른 곳을 향했다.


"그 창문은.."


네가 열어놓은 거냐고 묻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시녀로부터 들었던 것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물론, 원래 버전에 비하면 한참 딱딱하긴 했지만.

"아, 네.."


어색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그래서 일부러 저러나 싶었다.

일부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어서 그것을 견디다 못한 자신이 자리를 뜨도록 만든 다음에 이안과 단둘이 있으려는 속셈인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흘깃흘깃 곁눈질을 해대며 열심히 이쪽의 눈치를 살피던 바이올라가 이내 이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이 온통 새하얘서 그런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눈부신 듯한 이안의 머리칼이 곧게 뻗은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졌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간신히 억눌러놨던 무언가가 울컥하고 솟구쳤다.

"굉장히 스스럼이 없으시네요."


그래서일까 입밖으로 튀어나간 말은 뾰족뾰족하니 가시가 서 있었다.


그에 이안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던 것이 그대로 멈칫했다.

 한순간에 어색하게 변해버린 분위기.


그것을 깨뜨린 건 디아나도 바이올라도 아닌  3자였다.


"환자 앞입니다."

고요하게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


그것이 귓가로 흘러들어온 순간 깨달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던 옆방의 주인이 돌아왔다는 것을.

바이올라를 상대로도 꿋꿋이 버티고 있던 자세를 풀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그래서였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지금 말을 걸어온 상대만큼은 존중을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까.


"성녀님."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안의 안위는 사실상 그녀의 손에 달려있다 봐도 무방했으니까.


그날 기적에 가까운 광경을 보여주었던 진이 자신도 한 팔 거들어보겠다면서 성녀를 따라나서긴 했지만, 지금  자리에 없는 걸 보면 다른 문제로 바쁜 듯 했으니까.

그러니 만약 성녀가 이안의 치료를 포기하기라도 한다면?


가만히 있어도 생명력이 줄줄 빠져나가는 이안의 몸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스러지겠지.


그렇기에 성녀를 향해 최선을 다해 예를 표했다.

맘같아서는 더한 것도  수 있었다. 그리해서 이안의 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라도 한다면 무엇이 아깝겠는가.

아까부터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이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흘깃 옆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제국의 황녀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지극히 공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바이올라의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물론, 상대는 아무런 감흥도 없어보였다.

제게 인사를 건네는 이가 제국의 황녀든, 왕국의 귀족이든, 길가에서 빌어먹고 사는 거지든 간에 여신이 아니고서야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극히도 무덤덤한 태도로 인사를 받은 성녀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이안의 앞에 섰다.

덕분에 보다 가까이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있었다.

오늘도 그녀는 회색의 천으로 온몸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딱봐도 엄청나게 뻣뻣해보이는데 불편하지는 않은 걸까.


그렇게 온통 회색 투성이인 성녀의 몸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색을 갖추고 있는 곳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머리칼이었다.


볼 때마다 은근히 부러웠던 레이시아의 머리칼이 달빛이라면 성녀의 것은 햇빛  자체였다.


마치 그녀를 사랑해마지 않는 누군가가 햇빛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것들만을 골라 잘라낸 뒤 그녀에게 선물하기라도  것처럼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이 그녀의 머리에 매달려있었다.


자신이 여신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사람이라는 증거를 살짝 흔들며 이안이 누워있는 침대 옆에 걸터앉은 그녀가 이안의 상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혹시  나빠지지는 않았는지 상태를 확인하려는 것일까.


우유를 생각나게 하는 희멀건 빛을 머금은 손가락이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드러나있는 이안의 가슴과 맞닿았다.


그리고 움찔거렸다.


어찌보면  것도 아닌 그 자그마한 움직임에 심장이 쿵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까지 떨어졌다.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한 것일까.

표정이라도 확인할 수 있으면 속시원히 알 수 있으련만 회색의 천에 감싸여있는 건 얼굴또한 마찬가지라서 확인하고 싶어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이쪽의 속이 시시각각 타들어가고 있다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음..'하는 소리를 내며 이안의  곳곳을 손가락을 이용해 짚던 성녀가 마침내 이안으로부터 손을 떼어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걸까.


처음 느끼는 것도 아니건만 오늘따라 유독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다고 닿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성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회색의 천을 향해 간절하기 짝이 없는 시선을 던졌던 건 그래서였다.

그렇게 당장이라도 입을 열어 질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아가며 성녀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옆에  있는 이의 참을성은 진작에 바닥나버렸던 모양이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요?"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된 질문이 성녀를 향해 날아들었다.

못마땅했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러면 왜.."


그렇게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반응을 한 거냐고 따지기라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번에는 살짝 억울해하는 음성이 바로 옆에서 울려퍼졌다.


"이상해서요."

"이상하다니요?"

뭐가 이상하다는 걸까.

옆에서 울려퍼진 의아한 목소리와 더불어 의아해하는 시선을 성녀를 향해 던지니 그녀가 다시   '음..'하고 침음성 비슷한 소리를 냈다.


대답할 때 사용할 말을 고르고 있기라도  것일까.

"극적으로 나아졌다고는 볼 수 없긴 하지만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회복된 상태인만큼 슬슬 의식을 회복해야함이 맞는데.."


맞는데?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지 반응이 없군요. 신성력을 이용해서 의식을 자극해봐도 뭔가에 가로막힌 것같은 느낌만 들고.."

"그래서 안 좋다는 뜻인가요?"

"지금과 같은 상태가 앞으로도 지속된다면.. 그렇겠지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내뱉은 성녀가 이내 설명을 덧붙였다.


"생물이 살아가는데 있어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가 필수라는 사실은 두 분도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된 설명이 이어졌다.


"지금 당장은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신성력을 이용해 벌충하고 있습니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고, 그런만큼 그 방법을 이용해 몸을 유지하는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래서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이후부터는 줄곧 의식을 깨우는데 집중하고 있었습니다만.."


"어, 어떻게 하면.. 어떻게.. 도울 방법이 없을까요?"


"제가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알려만 주시면.."

"두 분은 이미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솔직히 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하고 있다니?


앉아서 지켜만 보는 것이 어찌 최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허나 거기에 대고 따질 수는 없었다.


"의식을 잃은 환자의 옆에서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회복에 충분히 도움이 되니까요.  외의 것들은.."

치료를 맡은 자신이 조금  노력해보겠다고 말을 하는데 어떻게 따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니 모쪼록 지금처럼 자주 병문안을 오셔서 환자 분이 흥미를 가질만한 이야기나 근황같은  들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치 자신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보이는 성녀를 상대로 먼저 포기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다짐 비스무리한 말을 하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입에서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원하신다면 옆에서 지켜보셔도 상관없습니다만.."

"아니요. 괜찮습니다."

진이라면 모를까 신성력이라고는 단 한 톨도 다룰 줄 모르는 자신이 이곳에 남아있어봐야 방해밖에 더 되겠는가.

그래서 순순히 물러나겠다고 하니 성녀는 딱히 붙잡거나 그러지 않았다.


바이올라의 뜻은 또 다른  했지만 그녀도 순순히 물러나는 쪽을 택했다.

이미 자신이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힌 상황에서 남아있겠다고 고집을 부리자니 내심 눈치가 보였던 모양.

그렇게 나란히 방을 빠져나오니 언제 돌아온 것인지 처음 성역 안으로 들어섰을  자신을 이곳까지 안내해주었던 시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사람이 튀어나오는 모습은  번을 봐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덕분에 살짝 놀란 심장을 달래다가 밖까지 안내해줄테니 잘 따라오라 말하는 시녀를 멈춰세웠다.


생각해보니 방 안에 놓고  게 하나 있었으니까.

"앗, 그럼 제가.."

"아니에요. 바로 앞인데요."


그대로 돌아서기만 하면 되는 것을 뭣하러 남의 손을 빌리겠는가.


해서 시녀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한 뒤 다시 이안의 방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바로 조금 전에 닫았던 문을 조심스레 열어젖혀 문틈 사이로 몸을 밀어넣은 순간..


"..자매님?"

어쩐 일인지 살짝 당혹스러워하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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