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6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영웅은 늘 위기의 순간에 탄생한다.
그리고 교류전이 한창 진행중이었던 교국에서 터진 일련의 사건은 충분히 위기라 부를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교류전을 관람하겠답시고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은 물론이거니와 각국의 내놓으라 하는 젊은 인재들이 모조리 그 사태에 휘말리고 말았으니까.
그렇기에 그 사태를 기점으로 수많은 영웅들이 탄생했다.
허나 영웅이라 해도 다 같을 수는 없는 법.
누군가 한 개인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때 누군가는 만인이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존재감을 지닌 건 정확히 두 명이었다.
제국의 2황녀이자 교류전에서 제국의 대표로써 제국을 이끌었으며, 사건 당시에는 왕국 연합측 대표의 배반 사실을 일찌감치 알아차리고 그녀의 테러 시도를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각국 수뇌부의 목숨을 구한 바이올렛이 그 중에 한 명이었고, 다른 한 명은..
이제는 영웅기사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게된 '이안'이었다.
사실 이안이 바이올렛과 나란히 위치하게 된 데에는 이런저런 뒷사정이 존재했다.
누군가는 나중을 위해 그의 이름값이 더욱 높아지길 원했고, 누군가는 테러 사건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달랠 수 있을만한 흥밋거리를 원했으며, 누군가는 사건 당시 대회장 안쪽에서부터 터져나왔던 정체불명의 빛과 관련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을만한 이야깃거리를 원했다.
그런 수많은 사정들이 맞물린 결과물이 바로 '영웅기사 이안'이었다.
사실 이안이라는 존재만큼이나 써먹기 좋은 수단이 또 없기는 했다.
우선, 상황 자체가 굉장히 낭만적이었다.
진짜 의도가 어찌되었건 간에 바로 조금 전까지 치고 박고 싸우던 상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운 이안의 행동은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기사도라는 단어가 왜 존재하는지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한 이안의 행동은 많은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그 행동이 그들이 아는 모험담 속의 기사들과 꼭 닮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의롭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헌신적인 모습.
그 숭고하기 짝이 없는 모습 앞에서 영웅의 성별같은 건 별로 중요치 않았다.
뿐만아니라 이안에게 제압당한 이들 중에 사망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또한 굉장한 플러스요인이었다.
상대방이 무언가에 씌여서 조종당하고 있는 상태라는 걸 알면서도 자기 목숨 하나 챙기기에도 급급한 상황이다보니 다들 자연스레 손속이 과격해졌고, 그 탓에 건물 잔해에 깔려서 사망한 이들 다음으로 많은 게 제압과정 중에 사망한 이들이었다.
헌데 이안은 혼자서 수백에 가까운 꼭두각시들을 상대하며 죽인 이라고는 적의 수괴 한 명뿐이니 사람들이 그의 활약상에 열광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앞에서 언급한 이런저런 뒷사정들이 얽히고 섥히면서 이안의 활약상은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화제가 될만한 이야기를 각국에서 작정하고 띄우니 그 시너지는 엄청났다.
그 여파로 몇몇 지역에서는 이안과 바이올라의 관계를 두고 이야기가 와전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를테면 이안과 바이올라는 서로 미래를 약속한 사이였고, 그래서 이안이 목숨을 바쳐서 쓰러진 그녀를 지키려 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가십뿐만이 아니라 사건날로부터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이안이 여전히 병상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또한 일종의 조미료로서 이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유명하게 만드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유명세를 누려야할 사람이 정작 그걸 누리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으로 이안과 비슷한 조명을 받게 된 이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만하면 뒷수습에 필요한 시간은 충분히 지났다 판단한 것일까.
동생인 바이올라와 함께 간간히 이안의 병문안을 가는 것 외에는 의아할 정도로 외부 활동을 자제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바이올렛이 칩거를 깨고 나서 가장 먼저 한 행동은 레이시아와 성녀의 앞으로 정중하게 작성한 서한을 보내는 것이었다.
바이올렛의 편지를 받은 둘은 기꺼이 바이올렛의 초대에 응했고, 그렇게 초대자와 초대를 받은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순간 바이올렛이 꺼내든 것은 다름아닌 하나의 제안이었다.
"동맹을 맺죠."
그리 말하는 바이올렛의 모습은 어딘가 피곤해보이기도 했고, 신경질적으로 보이기도 했으며, 분노를 조용히 속으로 삭히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치도 못한 이야기였던 걸까.
은근히 경계하는 듯한 눈빛으로 바이올렛을 바라보고 있던 레이시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동맹이라고 하심은.."
그에 비해 그녀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정중하고도 조심스러웠다.
"편의상 동맹이라고 칭한 것뿐이지 사실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에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것이 정말로 그런 듯했다.
그렇지만 레이시아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감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눈앞에 있는 여자또한 이안을 놓고 경쟁하는 이 중에 한 명이라고.
디아나나 카트린느같은 이들이야 눈앞에 있는 여자보다 이안이 목숨까지 바쳐가며 지키려 했던 바이올라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눈앞의 여자와 마주칠 때마다 오랫동안 길러온 직감이 속삭여왔으니까.
저 여자는 너와 동류라고.
그러니 저 여자를 가장 경계하라고.
그렇기에 별거 아닌 것처럼 내뱉어진 저 말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시겠어요?"
다행히 꽤나 순순한 반응이 돌아왔다.
그또한 당연히 초대자인 자신의 의무라는 것처럼 고개를 두어번 정도 주억거린 바이올렛이 음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저희에겐 공통의 적이 있지 않나요?"
그 공통의 적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건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알 수 있었다.
"사교도 년들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렇죠."
"그래서요?"
"아무래도 각각 상대하는 것보다는 서로 손을 잡고 힘을 합쳐서 상대하는 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그 편이 쓸데없는 충돌도 줄일 수 있을 거고요."
바이올렛의 발언에 레이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론이었으니까.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저질러준 이상 사교도를 색출하여 박멸해내는 작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나 다름없었다. 한 방 얻어맞은 상태에서 가만히 있어봐야 착하게 보이는 게 아니라 호구로 보일 뿐이니까.
실제로 이미 본국으로 편지를 보내 대대적인 사교도 색출작업을 지시해놓은 상태였다.
아마 이안의 몸이 조금이라도 멀쩡했더라면 진작에 이곳을 떠나 본국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작업을 직접 지휘했겠지.
허나 이안은 그 사건의 여파로 교국을 떠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그 탓에 자신또한 자연스레 이곳에 발이 묶인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쉬운대로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잘하겠지..'
아마 그럴 거다.
평소에는 대체 언제 뒤지나 싶을 정도로 밥만 축내고 앉아있는 늙은이들이지만 다들 왕국에 대한 자부심하나만큼은 대단한 양반들이니까. 지금쯤 아마 사교도 놈들이 어딜 감히 깝치냐고 눈이 뒤집어져 있을테니 편지가 도착하는대로 색출 작업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맹제안이라니.
저 바이올렛이라는 여자가 노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수뇌부의 목을 원하시는 군요."
"그럼 잔챙이들로 만족하실 생각이셨나요?"
역시나 비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부터 색출작업을 시작해봐야 걸리는 건 잔챙이들 뿐일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이쪽이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일거라는 사실쯤이야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생각해낼 수 있을 정도로 당연한 것이니 아마 지금쯤 수뇌부라 할 수 있는 것들은 진작에 수사망이 닿지 않는 곳으로 내뺀지 오래일테니까.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손을 잡는다면?
왕국, 제국, 교국 뿐만이 아니라 그 외의 국가도 이쪽의 뜻에 맞춰서 움직이게 만들 수 있을 거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와 그 다음가는 나라가 손을 잡은 것도 모자라 교국까지 가담했는데 거기에 대고 거절을 표할 수 있을 정도로 간큰 곳은 없을테니까.
특히나 지금처럼 세 곳 모두가 눈깔이 돌아가있는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게다가 아직 확정된 건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왕국연합을 노리고 계시군요."
"예."
하긴 교류전의 대표랍시고 얼굴을 내민 이가 이번 테러 사건의 주동자 중 한 명 아니었던가.
교류전에 대표로 선임될만큼 왕국 연합 내에서 지위가 상당했던 걸로 아는데 사교도들에게 홀라당 넘어가버린 유력자가 꼭 그년뿐일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
그 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대가리 중 한 명이 사교도의 수뇌 중 한 명이었으니 그 밑에 있는 놈들이라고 멀쩡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왕국 연합은 대대적인 대피를 시작한 사교의 수뇌부들에게 있어서는..
"몸을 숨기기에는 그만한 곳도 없을테니까요."
그래, 분명 그럴 거다.
그 말은 즉, 그곳을 털지 않으면 이 갑갑한 마음을 풀기 힘들 거라는 뜻이고.
그 점까지 생각하면 이건 받는게 맞았다.
받는 게 맞았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문득 의문이 하나 드네요."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할게 하나 있었다.
해서 입을 열었더니 얼굴로 날아와 꽂힌 건 이런 말이 나올 거라고 익히 예상한 듯한 반응이었다.
어디 한 번 말해보라고 말하는 듯한 바이올라의 눈빛에 레이시아는 내심 쓰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쪽의 수에 걸려든 듯 했으니까.
"제 기억이 맞다면 제국에는 황태녀님이 따로 계신 걸로 아는데.."
그럼에도 꿋꿋이 하려던 말을 이어나간 건 결과적으로 나쁠 게 없었기 때문이었고.
본국에 차기 황제인 황태녀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데 황위계승권자도 뭣도 아닌 네게 그런 걸 제안을 권한이 있느냐?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것에 대해 물으니 튀어나온 건 무언가가 뺴곡하게 적혀있는 종이 두 장이었다.
"당장은 없습니다만, 두 분께서 도와주신다면 다르겠지요."
"필요한 건 동맹의 맹주 자리인가요?"
"예, 그 정도는 되어야 만족하실 듯 하네요."
쓰게 웃으며 그리 말하는 모양새가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었다.
혹시 황태녀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걸까.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둘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걸로 아는데 황태녀 입장에서는 능력 좋은 동생이 당연히 신경쓰일 수밖에 없을테니까. 아무리 본인의 입지가 굳건하다해도 그건 사람인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니까.
"저는 황제 자리같은데에는 관심 없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었는데 말이죠.."
지나가듯 내뱉어진, 그러나 결코 흘려들을 수는 없는 말을 들으며 어느새 바로 앞까지 배달된 서류를 집어들었다.
어쩌면 이쪽으로 향하는 관심을 분산시키려는 술수일 수도 있었으니까.
꼼꼼하게 확인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해서 꼼꼼하게 들여다봤지만 딱히 걸려드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이쪽에 득이 되는 내용이 더 많았다.
그러니까 동맹의 맹주 자리를 저쪽으로 넘기겠다고 약조한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긴 했지만 말이다.
"일단 제 선에서 약조해드릴 수 있을만한 것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나름대로 신경써서 작성해봤는데 어떠신가요?"
더 요구할 게 있다면 위에다가 전해줄테니 지금 말해보라는 듯한 시선이 날아와 꽂혔지만 추가로 요구할만한 사안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만큼 철저하게 이쪽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들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뭔가 더 요구한다면?
나중이 좋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나쁘지 않네요."
하물며 제안을 받은 둘 중에서 한쪽이 저렇게 말하며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태세를 취한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그렇기에 이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어쩐 일인지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입을 열어 수락의 의사를 밝히려고 하면 자꾸만 뭔가가 울컥하고 솟구쳤으니까.
허나 둘이 자신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고 합죽이로 있을 수는 없었기에..
"알겠습니다. 받아들이죠."
자꾸만 솟아오르는 그것을 있는 힘껏 내리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수락의 의사를 밝힌 레이시아가 어차피 복수를 생각하면 협력하는 게 맞다고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이고 있던 순간이었다.
각각의 서명을 받아내는데 성공한 바이올렛이 똑같이 생겨먹은 두 장의 서류 중에서 자신의 몫을 챙겨들었다.
그리고는..
"아, 성녀님."
"..네?"
"이안의 상태는 어떤가요? 좀.. 괜찮아 졌나요? 아님 혹시 정신을 차렸다던지.."
성녀를 향해 그리 묻는 게 아닌가?
목소리와 함께 던져진 걱정 가득한 눈빛을 확인한 순간, 레이시아는 깨달았다.
깨닫고 말았다.
자신이 우려하고 있던 것이 단순한 우려가 아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