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이 되기 전에 (285)화 (284/366)



〈 285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디아나 시점****


이안이 적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심판과 막 맞부딪히기 시작한 그때.

모래성 허물어지듯 허물어지는 것들을 피해 대회장을 빠져나가던 디아나와 앨리스, 그리고 진 일행또한 적을 맞딱뜨렸다.


-그으으으으

지옥의 주민이 저러할까.

시커먼 연기같은 것을 줄줄이 흩뿌리며 그나마 멀쩡한 복도를 따라 돌진해오는 정체모를 것들의 향연에 디아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힘이 바짝 들어간 턱은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초조함을 대변하는  했다.


그만큼 초조했다.


이렇게 적들한테 가로막혀있는 와중에도 대회장 안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몰랐으니까.


거기에 이안이 복용한 중화제의 지속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또한 초조함이라는 이름의 불의 크기를 키우는데 크게 한몫했다.


원래 몸인 지금도 이렇게 걱정이 되는데 만약 중화제의 지속시간이 다할 때까지 이안이 있는 곳에 닿지 못한다면?

그리 가정한 순간 눈앞으로 그려지는 핏빛 투성이의 장면을 어떻게든 외면해보겠다고 눈을 질끈 감아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고작 눈꺼풀 따위로는 자신을 막을  없다는 듯 눈꺼풀로 덮여 새까맣게 변해버린 세상 위로 예의 그 장면이 고스란히 이어지기 시작했으니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그걸 티내지 않아보겠다고 손에 힘을 꽉 줘봤지만 고작 그것만으로는 얼굴 위로까지 번져나간 것을 어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괜찮아요?"

팔뚝을 가볍게 툭 건들이는 감촉과 함께 들려온 걱정어린 목소리에 눈을 질끈 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금 눈을 떴다.

"빨리 끝내자."


교국이 교류전의 주최국이라 좋은 점이  하나 있다면 여차할 때 신성력을 이용한 치료를 듬뿍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경기가 막 끝났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한곳 빠지지 않고 욱신욱신거리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제법 괜찮은 상태로 변해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최상이라고 부를만한 상태는 분명 아니었지만..


"팔 조심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시끄러."

이 정도면 충분했다.

쓸데없이 길을 가로막고 있는  정체모를 것들을 치워버리기에는.

대련용으로 지급받은 무구야 대련이 끝남과 동시에 반납한지 오래지만 그렇다고 빈손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건 아니었다.


급한대로 눈에 띄는 걸 주워서 무장했으니까.


"한 놈씩?"


"일단 그렇게 하고 빨리 끝내는 사람이 돕는 걸로."

그렇게 합의가 끝난 순간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던 것들을 곁눈질로 경계하던 앨리스가 그대로 손을 휘둘렀다.

그와 함께 쏘아져나간 것들이 허공을 찢어발기며 적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것에 얻어맞은 것들이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움찔하며 일제히 멈춰선 순간, 주워든 것을 꼬나쥐고 그대로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충돌의 감상은 보기보다 단단하다는 것이었다.


움직이는 것도 흐물흐물한게 내구성도 분명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있는 힘껏 어깨를 내리치니 손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임시방편으로 감아놓은 것을 타고 찌르르한 감각이 팔목을 타고 올라왔다.

신성력을 듬뿍 쬐긴 했지만 완전히 붙은 건 아니었던 걸까.

오른팔의 통증이 얼굴을 일그러지게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앞으로 훅 고꾸라지는 것을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뻐억-!

뭔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시커먼 것이 그대로 뒤로 날아갔다.

그렇게 담당하던 놈을 해치우고서 진을 도왔다.


"이쪽으로!"


맘 같아서는 벽이고 뭐고 다 때려부수고 이안이 있을 곳까지 달려가고 싶었다.

허나 그리하지 못했던 건 그리하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는 건물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을지도 모른다는 앨리스의 우려 때문이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그래서 어쩔  없이 일단 건물을 빠져나가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일단 이곳에서 벗어난 다음에 바깥을 살피다 보면 이안이 있는 무대까지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는 루트를 찾을 수 있을테니까.

"빌어먹을 새끼들.. 그러니까 작작 좀 해먹으라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중얼중얼대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앨리스와 함께 움직이다보니 다른 이들하고는 달리 그림자에 잡아먹히지 않고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과도 합류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건물이 무너지며 떨어진 잔해에 부딪혀 부상을 입은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급하게 움직여야하는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짐밖에 되지 않을 이들.


그렇기에 그들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박혀든 순간, 이성의 탈을 쓴 무언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속살거렸다.


-버려

저들을 버리라고.

-일일히 구해주고 다니다간 정작 구하고 싶은 사람은 못 구하게 될걸?

 말만큼은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상태도 완벽하지 않은 상황인데 다른 사람까지 챙긴다?


시간이 얼마나 지체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이안의 목숨은 경각에 달하겠지.

이 좁은 복도 안에도 이렇게나 득실거리는 것들인데 드넓은 무대 위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을테니까.


 발언을 순순히 인정해주니 신이 나기라도 한 것일까.


속살거림이 한층  강해졌다.

따르지 않고서는 못 배길 정도로.


헌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암만 용을 써봐도 제자리에서 옴짝달싹도 안 하는 것이 귓가로 울려퍼지는 속살거림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누군가 발에 대고 못질이라도 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이 드는  제발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호소하듯 간절하게 이쪽을 쳐다보는 저들의 눈빛 때문일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보다는..


속살거림에 넘어가려던 찰나 귓가로 울려퍼진 이안의 목소리 때문이겠지.


참으로 공교롭게도 이안을 구하기 위해 결단을 내리려던 순간, 머릿속으로 울려퍼진 이안의 목소리가 그것을 막아세웠다.

언젠가 제법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가 지나가듯 읊조렸던 말이 하나 있었다.

'사람은 늘 뿌린대로 거두는 법이라고 했었지..'


그렇기에 생각해볼 수밖에 없었다.

만에 하나 자신이 한시라도 빨리 이안을 돕겠다고 저들을 버리고 돌아선다면?


후에  사실을 알게된 이안이 과연 기뻐할까?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다만 딱 하나 확실한게 있다면 그런다고 기뻐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이안이 자신이 알고 있는 만큼 마냥 순수하지도, 천진하지도 않다는 것을.


그렇지만 자신이 아는 이안은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리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볼 때는 그랬다.


그래서였다.


"뒤에서 엄호해."


앨리스에게 후열로 물러나라고 지시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옳은 선택이 되었다.


비록  명이서 움직일 때보다 시간은 더 지체되긴 했지만, 그렇게 챙겨서 빠져나온 이들을 두고 다시 대회장으로 향하려는 순간 반전이 있었다.

"저, 저곳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막 몸을 돌린 찰나 뒷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뜨거운 뭔가가 울컥하고 치솟았다.

그게  바로 밑까지 치고 올라오고 나서야 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걸 짜증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짜증이 났다.


위험을 감수하고서 안전한 곳까지 데려다줬으면 그 정도로 만족할 것이지 설마 자기들 곁에 남아서 지켜달라는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그 정도로 염치없이 행동하겠냐만은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었다.

원래 사람이라는 동물은 자기밖에 모르니까.

극한의 상황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고.

목까지 울컥하고 솟아오른 것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렇게 붙잡혀있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이 정도로 만족하라고 쏘아붙이는 걸로 이 쓰잘데기 없는 대화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피로 새빨갛게 물든 부분을 손으로 짚은 채 엉거주춤하게 서 있던 이의 입에서 생각치도 못한 발언이 흘러나왔다.

"그런 거라면 기존의 통로를 이용하는 건 위험합니다. 지금쯤 무너지기 일보직전일테니까요."

얼굴 가득 쓴웃음을 머금은  그리 말하는 것이 뭔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막 입밖으로 튀어나가려던 말들을 황급히 목구멍 안으로 욱여넣었다.

"그러니 지하 통로를 쓰시죠."


지하 통로라니?


그런 게 있었던 말인가?

이쪽이 무어라고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먼저 반응이 튀어나왔다.


"그런 게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는데요."


"그.. 무대를 보수할 때 사용했던 통로라 재건축 작업에 참여했던 사람들말고는 모를 겁니다."


게다가 무투대회가 종료되는 시점에 맞춰서 폐쇄될 것이라 더더욱 그럴 거라는 여성의 말에 희망이라는 것이 조금씩 부풀어오르기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막막함을 느끼고 있던 참이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지금쯤 무너져내린 건물 잔해와  시커먼 것들로 복도가 꽉꽉 막혀있었을텐데 가뜩이나 시간이 지체된 상황에서 그것들을 하나하나 치워가며 움직이게 되면 제 시간이 맞출 수 있을 리 없었다.


헌데 무대까지 통하는 지하 통로가 존재한다면?

그것도 관계자들 외에는 모르는 곳이라면?


중간에 무언가에 가로막히는 일 없이 그대로 무대까지 쭉 내달릴  있을 터.

"무대까지 이어져있는 것 맞죠?"


"정확히는 무대 옆이긴 합니다만은.."


그래도 다 무너진 곳을 일일히 뚫는 것보다는 안전할 거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안내를 부탁하려는 찰나..

"자, 잠시만요!"

이번에는 다른 이가 끼어들었다.


"그대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손에 쥔 것을 바라보며 그리 말하는 걸 보면 무장상태를 지적하는게 틀림없었다.

허나 방법이 없었다.


여기가 뭐 왕국이었다면 뭐라도 방법이 있었겠지만 여긴 타국 아닌가?

"복도에도 그 정도인데 무대에는 더 많을 겁니다. 그런 무장 상태로는.."


그렇기에 답답했다.

이쪽의 사정을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어쩔 수 없다고 대꾸하고 지하통로를 알려주겠다고 말한 이와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이, 이거!"


끝까지 뭔가를 말할  말  주저하던 이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서 이쪽을 향해 던졌다.


휙하고 날아드는 것을 얼떨결에 낚아채 확인해보니  열쇠같은 것이 손바닥 위에 놓여져있었다.


"혹시 이거 병기창고 열쇠입니까?"


"그 정도 수준은 아니지만  명 정도 무장하기에는 충분할 겁니다."

"어디 있는 거죠?"

"저, 저기.."


타국의 인물에게 나름 기밀이라 할  있는 사안을 알려준다는 것에 끝까지 거부감을 느꼈던 걸까.

건물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그렇지만 어느 곳을 가리키는지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해서 일단 그곳을 향해 내달렸다.

마침 지하통로가 자리하고 있는 곳하고 방향도 같았다.


그렇게 무장을 끝마치고서 재건축 작업에 참여했다던 이가 안내해준 지하 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통로 안은 어두웠지만 조용했다.

지상에서 벌어진 일은 이곳과는 완전히 별개의 일이라는 것처럼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는 그곳을 빠르게 내달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통로 끝에 도달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쇄될 예정이라 했던 게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통로 끝은 통로의 존재를 알 수 없도록 무대를 이루는 것과 같은 재질의 석재로 가로막혀 있었다.

허나 그리 두꺼운 것 같지는 않았다.


옆의 벽들을 두들겼을 때와는 달리 바깥으로 이어지는 쪽의 벽을 두들기 순간 상대적으로 가벼운 소리가 통로 안으로 울려퍼졌으니까.

"들어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시험삼아 살짝 힘을 주어 밀어봤지만 살짝 흔들리기만 할뿐 미동조차 없었다.

제법 단단하게 틀어막아둔 모양.

해서 세 명이서 힘을 합쳐 그것을 떠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용을 쓴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그그그극-


돌이 갈리며 나는 소음과 함께 통로를 가로막고 있던 것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자그마한 틈이 생겨난 순간 이안을 위해 창고에서 챙겨온 것을   사이에다가 끼워넣었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잡아당기니..


쿠쿠궁-

마침내 문이 열렸다.

그렇게 목적지였던 무대에 진입한 순간 눈앞으로 들이닥친 광경은-

절망이었다.


자신들이 대회장 밖으로 피신하는 동안 이곳에서는 대체 어떤 싸움이 있었던 걸까.

복도에서 상대했던 놈들이 한 곳을 중심으로 이리저리 널브러져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에는..

푹-!

푸욱-!


바닥에 쓰러진 누군가를 향해 기계적으로 손에 쥔 것을 내리찍는 혈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으로 들어온 모든 것이 새빨갰다.

늘 찬란하던 금발도, 오늘을 위해서 빳빳하게 다려놓았던 정복도 온통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그렇기에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마침내 힘이 다한 것일까.

땡그랑-

창이 먼저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것의 주인이었던 사내가 그 뒤를 따랐다.

자신은 여기까지라고 고하는 것처럼 빨갛게 물든 형상이 힘없이 몸을 뉘였다.


쓰러지는 소리라도 날 법 하건만 그런 것도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의 싸움에 내용물을 전부 쏟아내기라도  것처럼.

그렇기에 술렁이기 시작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어느새 그쪽을 향해 뻗어져나간 손끝이 제멋대로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을 것이다.


화아아아악-!

빛이 있었다.

찬란하고도 황홀하면서 어딘가 서글프게 느껴지는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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