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나라고 맨날 중세 판타지같은 세계관에서만 구른 건 아니다.
내가 갑자기 남녀의 정조관념이 바뀌어버린 이 세계로 떨어졌듯 한 번은 현생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문명을 이룩해내는데 성공한 세계 속으로 떨어진 적도 있으니까.
다만 현생하고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현생하고는 달리 그쪽 세계는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물을 흠뻑 뒤집어 썼다는 것 정도?
이제는 상당히 오래 전의 일이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동료 중에 한 명이었던 의사 놈의 발언을 떠올려보면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 사태가 터졌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심각해지는 상황에 보다못한 나라들이 그 효능이 완벽하게 검증되지 않은 백신을 긴급투입했다가 그게 막 변종으로 진화하던 바이러스와 만나서 그 꼴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아무튼 그렇게 탄생한 좀비들 중에 아주 가끔 특이한 모습으로 진화하는 놈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변종이라는 이름으로 싸잡아서 불렀던 놈들인데 개중에서 정말 드물게 튀어나오는 놈이 바로 크루거라는 놈이었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꼴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 전체가 시커먼 갑각으로 뒤덮인채 거대화를 한 놈들인데 맹세컨대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 놈들만큼 단단한 생물체를 본적이 없었다.
그 단단함이 어느 정도냐면 유탄을 정통으로 쳐맞고도 꿈쩍도 안할 정도였다.
헌데 정부기관은 커녕 군대조차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만한 화력을 낼 수 있는 수단이 흔하겠는가?
그러니 당시 생존자들에게 있어 크루거란 죽음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단단하면 성질이라도 좀 온순하던가 쓸데없이 포악해서 어디선가 놈이 한 번 목격됐다 하면 적어도 한 개의 생존자 집단이 터져나가곤 했다.
갑자기 왜 이런 소리를 하냐면..
'시발 더럽게 단단하네..'
지금 눈앞에서 칼을 꼬나쥐고 달려드는 놈의 단단함이 크루거 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크루거 놈이 살짝 우위긴 했다.
놈의 단단함은 생물체가 가질 수 없는 무언가였으니까.
헌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놈에게는 크루거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질김이 존재했다.
몇 천년 묵은 고목의 나무뿌리가 이런 느낌일까.
놈의 발밑에서부터 솟구친 촉수와 맞부딪힐 때마다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반발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런 게 동시다발적으로 날아온다고 생각해봐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환장할 지경인데 쫄따구라는 놈들이 그 뒤를 따르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그래도 쫄따구 놈들은 그나마 좀 나았다.
숙주로 삼은 몸의 퀄리티가 달라서 그런 지 몰라도 촉수를 휘두르는 놈만큼 단단하고 질기지는 않았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촤아악-!
"씁..!"
막아냈다 싶으면 갑자기 사방으로 촉수를 뿜어낸다는 것 정도?
이번에는 미리 눈치채고 대비하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전에는 이렇다할 전조도 없이 뿜어져나온 촉수에 옆구리와 왼팔뚝을 내줘야만 했다.
사실 그것도 보자마자 바로 반응해서 그 정도지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마 지금쯤 내 몸에는 바이올라의 어깨에 나 있었던 것에 뒤지지 않는 구멍이 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나 그랬겠지.
치료?
수단은 있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바이올라를 치료할 때 써먹은 방법 때문인지 놈은 그야말로 쉬지 않고 날 몰아붙였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창을 휘두르며 날아들고 달려드는 것들을 받아치는 것 뿐이었다.
헌데 그것도 슬슬 한계인 듯 했다.
바이올라와의 일전에서 소모한 체력이 생각했던 것보다 컸던 걸까.
아니면 당장 치료해야하는 상처를 뒤로 하고서 격하게 몸을 움직인 여파일까.
손아귀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게 느껴졌다.
맘같아서는 공격을 아예 포기하고 방어에 전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왼팔에 찬 방패는 이미 걸레짝으로 변해버린지 오래니까.
그럼에도 이미 방패라는 형태를 한참 벗어나버린 그것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런 모습이라도 한두 번 정도는 막아줄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정말 사실대로 말하자면 지금까지 나열한 것들은 지금 내가 직면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문제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긴 했다.
그것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시시각각 내 숨통을 죄여오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혹시라도 까먹는 일이 없도록 머릿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기며 헤아리던 것은 이미 깔끔하게 증발해버린지 오래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대충 3분에서 4분 정도 남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 몸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말이다.
그 시간이 바닥나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야 안 봐도 뻔했다.
이 몸으로도 이렇게 근근히 버티고 있는데 꼬맹이 모드로 저놈들과 맞선다?
놈이 부리는 쫄따구들의 숫자라도 좀 줄어들었다면 거기에 걸어볼 수라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그림자 안에 있는 것을 행동불능으로 만들어버리면 쫄따구 놈들의 움직임또한 멈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놈들을 무력화시키는데 주력해왔지만 그렇게 한두 놈씩 바닥에 눕힐 때마다 새로운 놈들이 벌충되었으니까.
대체할 자원이야 널리고 널렸다는 듯 아주 이쪽을 약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 놈씩 뽑아다가 내 앞에 세우는데 헛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자각한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던 도박수 쪽으로 차츰 마음이 기울어졌던 것은.
'어차피..'
이대로 가면 뒈지는 건 확정이다.
이쪽을 향해 그르렁거리는 놈의 시커먼 얼굴 위에는 아까 자기가 외쳤던 걸 그대로 이행하고야 말겠다는 결의같은게 묻어있었으니까.
아니면 심판마냥 놈의 그림자에 집어삼켜져 꼭두각시 인형처럼 조종당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고.
뭐, 물론 실제로 그리될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꼬맹이 모드로 돌아가는 순간 꼭두각시로서의 가치또한 같이 증발해버릴테니까.
이쪽을 택하든 저쪽을 택하든 사지로 이어지는 건 똑같은 상황.
그렇다면 당연히 발버둥이라도 쳐볼 수 있을 것 같은 쪽을 택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꼴사납군.. 꼴사나워.."
그리 말하며 날 향해 다시 한 번 촉수를 내지르는 놈의 공격을 향해 너덜너덜하게 변해버린 방패를 들이밀었던 건 그를 위함이었다.
방패라기 보다는 쇳덩어리에 가깝게 변해버린 것은 전과는 달리 놈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주지 못했다.
덕분에 놈이 내지른 촉수에 꿰뚫리고 베인 팔에서 시뻘건 것이 후두둑 쏟아졌다.
그렇지만 시간벌이용으로는 충분했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몇 초였으니까.
놈이 촉수공격에 전념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창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는 빈손으로 변한 오른손을 그대로 허리춤에 매인 가방 안으로 찔러넣었다.
안 그런 듯 하면서도 은근히 꼼꼼한 편인 카트린느의 성정을 대변하듯 꽤나 많은 병들이 가방 안으로 파고들어간 손과 부딪혔다.
왼팔을 내어주며 번 시간은 끽해봐야 몇 초에 불과했고, 그렇기에 뭐가 뭐고, 뭐가 뭔지 구분하고 앉아있을 여유까지는 없었다.
그래서..
손을 한껏 크게 펼쳐 가방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을 모조리 그 안에다가 가뒀다.
그리고는..
-미친 건가.
그것을 그대로 입 안에다가 쑤셔넣었다.
익숙치 않은 것이 입 안으로 들어온 탓일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역질이 나오려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빨을 크게 움직여 입 안을 가득 채운 것들을 깨부쉈다.
혀가 잘리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턱에 힘을 꽉 준채 그 행위를 몇 번이고 반복하니 위아래서 가해지는 압력을 버티지 못한 것들이 하나둘씩 박살나기 시작했다.
산산조각 난 것들이 그대로 입 안을 찔렀다.
동시에 그 안을 채우고 있던 것들이 혀위로 끼얹어졌다.
순식간에 입 안을 걸레짝으로 바꿔놓은 것들이 액체와 뒤섞여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덕분에 입 안에 이어 목구멍 안쪽까지 실시간으로 걸레짝이 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스스로 입안으로 밀어넣은 것들을 모조리 씹어삼켰다.
그런 내 모습에 압도되어버린 것일까.
기묘한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 놈으로부터 날아와 꽂혔다.
그래서 놈을 향해 보란듯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입 안의 모습이 드러나도록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채 씩 웃었더니 뭔가가 입술을 넘어서 주륵하고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금방이라도 날 향해 쇄도할 것처럼 허공에서 일렁이던 촉수들이 놈의 감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제히 움찔거렸으니까.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놈을 향해 물었다.
"왜? 쫄았냐?"
아무래도 마지막으로 씹어삼킨게 바이올라에게 썼던 것과 똑같은 종류였던 모양이다.
턱까지 피범벅이 된 것치고는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적어도 말은 할 수 있었으니까.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상황.
이제 남은 건 거기서 제발 5나 6이 뜨기만을 기도하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도에 호응하듯 배 안쪽에서부터 후끈한 감각이 확 솟구쳤다.
제법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화제를 복용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각과 똑같았으니까.
그리고 열기는 곧 원동력이 되었다.
순식간에 전신으로 번져나간 열기가 활력으로 변해 근육 사이사이로 깃드는 걸 느낀 순간 직감했다. 아무래도 이번 회차는 여기까지인 것 같다고.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현생을 포함해서 벌써 다섯 번이나 뒈져본 나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내 묫자리라는 걸.
그래서 웃었다.
꺼지기 전의 촛볼이 가장 밝다고 가기 전에 화끈하게 불태우고 갈 수 있을 듯 했으니까.
벌써 다음 회차라 생각하니 솔직히 좀 아쉽긴 하지만 구차한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뭣보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아무 소용 없기도 했고.
무슨 일이 있어도 중복복용만큼은 안 된다고 손사래까지 쳐대던 카트린느의 충고를 무시하고 이쪽을 택한 건 나다.
그렇기에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를 감당하는 것또한 온전히 내몫이었다.
'화끈하긴 하네.'
하나만 마셨을 때는 독이라는 걸 믿을 수가 없었는데 카트린느의 충고를 어기고 나니 알 수 있었다.
독은 독이라는 걸.
기존에 내 몸에서 버티고 있던 것과 새로 투입된 중화제를 포함해 온갖 것들이 뒤섞인 것들이 몸 안에서 부딪히기 시작했다.
몸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이었다.
웃긴 건 그럴 때마다 힘이 솟구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창을 휘둘렀다.
있는 힘껏.
여태껏 방어만을 고수했던 게 거짓이었다는 것처럼 찌르고, 휘두르고, 또 찔렀다.
단단하기 그지없는 놈과 맞부딪히며 깎이고 깎여 마침내 창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이 된 것이 내 인도에 맞춰서 촉수를, 놈의 몸을 꿰뚫었다.
-이, 이게 무슨..
"왜? 꼽냐? 금방이라도 뒈질 것 같은 놈이 쓰러지질 않으니까 꼬와?"
그리 말하면서 뒤로 나자빠진 놈의 몸에다가 박아넣었던 창을 뽑아들었다.
그리고는 다시 찔러넣었다.
-크아아아악!
놈의 입에서 터져나온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촉수가 솟구쳤다.
그것들이 몸 곳곳을 꿰뚫었는지 몸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지만 개의치 않았다.
"병신같은 새끼 팔부터 어떻게 했어야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만 나왔다.
"흐흐흐흐-"
자꾸만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감각이라는 것이 완전히 멀어버린 걸 보면 이제 정말 끝이 얼마남지 않은 듯 했으니까.
그래서 더더욱 기계적으로 팔을 움직였다.
푹-!
푸욱-!
창을 뻈다 꽂았다 할 때마다 내 발에 깔린 놈의 몸이 격렬하게 들썩였다.
허나 곧 그 모습마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몸 안에서 맞부딪히던 독기가 마침내 눈까지 미친 건지 아니면 어디선가부터 흘러내린 피가 얼굴 전체를 덮기라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시야가 캄캄하게 변해버렸으니까.
소리?
안 들리게 된지 오래였다.
눈보다 한 발 앞서 멀어버린 탓에 들리는 거라고는 삐이이이이하고 길게 늘어지는 이명뿐이었다.
'뒈졌나?'
당연히 뒈졌겠지.
창을 몇 번을 찔렀는데.
시간 버는 수준을 넘어 바이올라를 노리던 흉수를 쓰러뜨렸으니 바이올라는 아마 괜찮을 거다.
'..아쉽네.'
거기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딱 하나 마지막으로 남은 미련을 속으로 곱씹은 순간..
마지막까지 버티던 의식이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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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썩-
붕괴의 현장 속에서 피칠갑을 한채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인영 하나가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화아아아아악-
어디선가 터져나온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