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화 〉히로인이 되기 전에..
붉은 비가 내렸다.
아니, 어찌보면 바람에 흩날리는 장미꽃잎 같기도 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느려진 세상 속에서 바닥에서 솟구친 검은색 촉수같은 것이 바이올라의 어깨를 꿰뚫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조금만 더 빨리 반응했어도 꿰뚫리는 게 아니라 스치는 수준으로 그칠 수 있었으니까.
웃기는 건 바이올라의 반응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심장을 피했다고는 하나 그녀가 입은 상처는 중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검은색 촉수의 끝부분이 반대편에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바이올라는 제 상처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오로지 내게 시선을 고정한채로 입모양을 통해 뭔가를 전하려고 할뿐.
'도망치라고?'
그녀는 알까?
그 한 마디가 날 이곳에 붙들어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걸?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 건을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아아!! 이게 무슨 일이죠?! 이안 참가자! 갑자기 바이올라 참가자를 공격했습니다!
-분명 심판이 멈추라고 양측을 중재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머저리들의 의문에 답해줄 시간 따위는 없었다.
통증 때문인지 출혈 때문인지 바이올라가 더 의식을 유지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 모습이 눈으로 들어왔으니까.
그리고 바닥에서부터 솟구친 것은 내 갑작스러운 개입으로 인해 못 다한 사명을 위해 시시각각 바이올라를 향해 쇄도하고 있었고.
-저게 뭐죠? 심판의 그림자에서 뭔가가..
내 돌발행동을 두고 신나게 떠들어대던 진행자 중 한 명이 마침내 그것의 움직임을 포착한 순간.
--------!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폭발음이 대회장을 강타했다.
삐이이이이-
제대로 한 방 얻어맞은 고막이 못 해먹겠다며 이명을 쏟아냈다.
그렇기에 단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대회장을 동그랗게 둘러싸고 있는 귀빈석이 무너져내리며 나는 붕괴음도, 날 향해 야유를 쏟아내던 이들이 내지르는 비명소리도,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현실감이 없었다.
누군가 현실감이라는 것만 칼로 도려낸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몸이 움직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안 그래도 바이올라와의 육박전 때문에 온몸의 근육이 피로를 호소하고 있는 상황이었던만큼 그건 상당히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 이를 악물었다.
힘조절에 실패한 걸까.
턱을 따라 뭔가 주륵하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덕분에 귀에 물이라도 들어간 것마냥 먹먹한 느낌으로 가득하던 몸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겠다는 것처럼 바이올라의 심장을 노리고 내리찍어지는 시커먼 촉수를 향해 창을 내질렀다.
그리하여 그것이 바이올라의 몸에 닿기 전에 막아세울 수 있었지만 손목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시발..'
생긴 건 흐물흐물하게 생긴 것이 단단하기로는 쇳덩어리 뺨치는 수준이었다.
덕분에 조금도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던 손목이 욱신욱신거리며 통증을 호소해왔다.
더 환장하겠는건 나름 적지 않은 힘을 실어서 내질렀다 생각했는데 살짝 밀려난 것 외에는 거의 타격이 없어보인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창촉이라도 하나 챙겨둘 것을..
뒤늦은 후회를 속으로 읊조리면서 살짝 밀려나서 주춤거리고 있는 것을 창대를 이용해 걷어올렸다.
그리고는 바이올라와 촉수 사이로 몸을 끼워넣으며 심판을 향해 시선을 던져봤는데..
아무래도 호응은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양반이 시커먼 그림자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
딱봐도 정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황.
적인지 어떤지 구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림자에 뒤덮인 심판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녀가 허리춤에 꽂혀있던 검을 뽑아들었으니까.
그리고는 그걸 날 향해 겨누는데 솔직히 웃음부터 나왔다.
보아하니 모종의 수단으로 심판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자신감인가 싶었으니까.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고작 하나 가지고 이쪽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진심으로?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후회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렁이던 그림자가 확 퍼져나가더니 이내 대회장을 뒤덮기 시작했으니까.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대회장이 무너지던 광경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그림자가 붕괴현장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는데 성공한 이들을 집어삼켰다.
저항?
무의미했다.
거대한 짐승이 벌레를 집어삼키듯 저항을 하든 말든 그대로 그림자에 뒤덮여버렸으니까.
그러더니 그림자 속에서 심판과 비슷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것들이 하나둘씩 걸어나오기 시작했다.
하나.
둘.
넷.
여덟.
수를 세보려고 할때마다 수가 늘어났다.
그래서 헤아리기를 포기했다.
대신 피로를 호소하며 파르르 떨리는 팔에 힘을 바짝 실어 땀으로 미끌미끌거리는 창대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그림자 인간이 몇 놈이나 달려오든 솔직히 관심 밖이었다.
몇 놈이 달려오든 뒤를 내어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몇 분이나 남았지?'
이 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약효가 다하고 꼬맹이 모드로 돌아간 후라면?
그때도 버틸 수 있을까?
그리 가정한 순간 이성이 나지막하게 속삭여왔다.
그건 불가능하다고.
그 몸으로 아무리 분전한다고 한들 결국에는 물량에서 오는 질량에 짓눌려버릴 거다.
그렇기에 답은 딱 하나 뿐이었다.
계속 이 몸을 유지하는 것.
많이도 필요 없었다.
지금 남은 것에다가 20분 정도만 더 있어도 충분했다.
그 정도면 바이올렛이 달려오든, 디아나가 달려오든, 아니면 레이시아가 보낸 누군가가 달려오든 분명 누군가는 달려올테니까.
다른 곳과는 다르게 바이올렛이나 레이시아, 성녀가 앉아있었던 귀빈석만큼은 무너지지 않고 멀쩡하다는 사실또한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디아나하고 앨리스는..'
미리 언질해둔 게 있으니 미리미리 몸을 피하든 했겠지.
대회장 밖까지는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폭발 당시에 대기실에 있지는 않았을 거다.
그러니까..
'나만 잘하면 된다 이거지.'
어느새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서 닦았다.
지금부터 빡세게 움직여야할텐데 괜히 창을 놓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렇게 방해가 될만한 것을 제거한 뒤에 아까부터 창이라 부르고 있지만 사실 창이라고 보기에는 많이 애매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것을 무대 바닥에 대고 문질렀다.
그그그극-
사실 의미없는 짓일 수도 있었다.
통짜 철로 된 것을 돌바닥에 대고 문지른들 내가 원하는 만큼 깎여나갈리 만무하니까.
그럼에도 손의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누군가 도달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이거라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손을 바삐 움직이면서도 눈만큼은 놈들을 관찰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날 어찌하는 것보다 제가 조종할 수 있는 것들의 머릿수를 늘리는데 주력할 생각인 걸까.
'하긴..'
저게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놈들이 노리는 건 바이올라의 목숨이고, 지금처럼 어깨에서 피가 철철 쏟아지는 상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굳이 나와 드잡이질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만히 내버려둬도 자연스레 목표가 달성될테니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놈들은 나와 일정거리를 둔채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주력할뿐 나나 바이올라를 노리고 달려들거나 그러지 않았다.
조종하는 게 어느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다만 놈이 하나 간과한 게 있다면..
'중화제만 챙겨준 게 아니란 말이지.'
내 허리춤에 달려있는 자그마한 가방 안에는 중화제와 거기에 세트로 따라붙는 해독제 뿐만 아니라 다른 것들도 그득그득하게 들어차 있었다.
다 카트린느 특유의 과보호가 작용한 결과물들이었다.
그러니 저까짓 관통상 쯤이야 치료하는 건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다는 건데..'
바이올라의 상태를 걱정하는 척 내 뒤에 쓰러져있는 그녀 쪽을 힐끔거렸던 건 그래서였다.
물론, 그러면서 입술을 살짝 깨물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림자 인간들을 조종하고 있는 놈이 이 현장을 지켜보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지켜보고 있다면 놈에게는 시시각각 안 좋아지는 바이올라의 상태 때문에 그러는 것으로 보였으리라.
그렇게 '거리'를 가늠했다.
동원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는 눈대중 뿐이었지만 딱히 어렵지는 않았다. 창잡이에게 거리와 간격을 가늠하는 건 일상이나 다름없으니까.
가늠을 끝낸 후에는 주변을 둘러싼 그림자 인간들을 보고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슬며시 뒷걸음질을 쳤다.
한 걸음.
두 걸음.
몸을 움직일 때마다 가늠했던 거리가 시시각각 줄어드는 걸 유념하면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 안에 들어있는 것중에서 제일 작은 병을 꺼내 손 안에다 쥐었다.
사이즈가 어쩜 이리 깜찍한지 그대로 주먹을 쥐니 손안에 완벽하게 숨겨졌다.
-지금 뭐하는 짓이지?
딴지가 들어온 건 치료약을 손에 쥐는 것까지 끝냈을 떄였다.
심판이었던 것에서 흘러나온 짐승이 그르렁대는 듯한 음성에 당황한 것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동시에 가방 안으로 찔러넣고 있던 손을 등뒤로 돌렸다.
-무슨 헛짓거리를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약병을 숨기고 있던 손에 힘을 바짝 실은 건 놈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쳐대기 시작했을 때였다.
파삭-
과자같은 게 부스러지는 소리가 작게 울려퍼졌다.
병이 손 안에서 깨져버린 탓에 손바닥 전체에서 따끔따끔한 감각이 올라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창을 쥐는 거야 한손으로도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손가락 틈 사이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것이 손을 타고 떨어져내리는 것이 아주 생생하게 느껴졌다.
덕분에 처음으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 감각이 느껴진 순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바이올라의 어깨를 치료해줄 약이 상처 부위 위로 정확히 떨어져내렸다는 것을.
-허!
그리고 확신은 곧 사실이 되었다.
-같은 남자로써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고 허황된 세상 속에서 허우적대기 바쁜 신세가 불쌍해서 건드리지 않고 넘어가주려 했건만..!
그르렁거림이 한층 격해졌다.
-주제도 모르고 명을 재촉하는 구나!
격분한 듯한 놈의 음성에 쫄은 듯한 표정은 집어치우고 입꼬리를 말아올리며 웃었다.
그걸 도발로 받아들였던 걸까.
포위망의 선두에 서 있던 것이 검을 치켜들고 쇄도해옴과 동시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것들이 그 뒤를 따라 달려들기 시작했다.
'시발 좀비물도 아니고..'
물론, 맞설 생각따위 없었다.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에서 포위된 채로 드잡이질을 해봐야 빨리 뒤통수 후두려 까달라고 광고하는 꼴이니까.
몸을 돌려 바이올라의 몸을 안아든 뒤에 그대로 몸을 날렸던 건 그래서였다.
달려들던 놈들을 날려버린 뒤 그렇게 생겨난 틈 사이로 내달렸다.
그런 날 잡아보겠다는 듯 바닥에서부터 검은색 촉수들이 솟구쳤지만..
-놈!
어렵지 않게 피해낼 수 있었다.
무대 곳곳에 떨어진 파편들을 징검다리 삼아 움직이니 날 향해 쇄도하던 촉수들이 누군가에게 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우뚝하고 멈춰섰으니까.
'역시나..'
추측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으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햇빛을 가리고 있던 귀빈석이 철거된 탓에 환하게 변한 곳까지 그대로 내달렸다.
목표는 꽤나 굵직해보이는 귀빈석의 잔해였다.
무슨 묘비마냥 무대 바닥에 일자로 꽂혀있는 그것의 앞에 도착해 바이올라부터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뒤로 돌아서니 그새 내 뒤를 따라온 시커먼 것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딱 하나 아까하고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면 내 등을 잔해가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다는 것 정도?
그렇기에 날 바라보며 그르렁대는 것들을 향해 자신있게 손을 까딱일 수 있었다.
"죽여버리겠다면서? 들어와 봐."
창을 옆구리에 끼운 채 그리한 순간..
-갈기갈기 찢어서 개먹이로 만들어주마..!
시커먼 것들이 일제히 쇄도해왔다.